
지금 와 생각해보니 보르헤스에 대한 신선한 감각이 사라지게 된 중요한 두가지 이유 중 하나는 그간의 이미지와는 달리 의외로 은자답지 않은 그의 모습 덕이었다. 보르헤스는 피노체트에게 베르나르도 오히긴스 훈장을 받으면서 "그(피노체트)는 훌륭하고 정중하며 인자한 사람입니다. 무정부화되어 버린 대륙이자 공산주의로 가득한 이 대륙에서 이곳과 내 조국, 그리고 우루과이는 자유와 질서를 구해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을 [칠일 밤]의 말미의 옮긴이가 쓴 것처럼 진지한 농담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그런 배려적인 시선이 힘든 이유는 그가 분명한 보수당원이었으며 미국의 피그만 침공을 공공연히 지지했다는 사실이 떡하고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압도적인 문학적 성과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그가 차원이 다른 시대를 열어제꼈고 아직까지 그 영향력이 거둬지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의 텍스트는 현실에 느슨하게 걸쳐진 시간과 공간을 통해 이중적인 세계의 속성을, 그 방대하고 영원한 영역을 잡아냈다. 마치 그자신이 그리 원했던 것처럼. 그러나 그 문학적 성과들에 대한 매혹은 그의 '현실적인' 정치적 입장에 대한 판단을 끊임없이 유예하게 만든다.

보르헤스가 우회한 보수파였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길 꺼려했다는 세간의 판단은 명백히 보르헤스의 무정부주의적인 작품세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한당들의 세계사]에 실린 그의 인터뷰에서, 그는 '남미에서 보수파가 된다는 것이 중도주의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라고 분명하게 말할 정도로 '현실적'이였다. 난 그 말에 동의했다. 그가 재창조해낸 불한당들의 이야기보다 그 한마디가 계속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것이 정치적 보수성을 넘어선 우익스러움을 보여줬던 그의 선택을 덮어줄 것 같진 않다. 심지어 그것이 '현실적'인 차원에 따른 것이라 할지라도. 요란스러운 유혈시민혁명으로 인한 무질서적 폭력과 무혈정권교체를 통한 독재자들의 지속적인 학살이 서로 별 차이가 없다는 결론이었다면 보르헤스는 차라리 진짜 은자가 되는 법이 더 나았을 것 같지 않은가. 그것이 설혹 더없이 뜨겁고 효과적인 파시즘을 설파했던 간교한 레니 리펜슈탈의 차가운 방법론이었을지라도.
반페론주의자이자 반공산주의자로서의 그를 뭐라고 할 순 없다. 말마따나, 그는 다른 남미작가들의 고질적인 해외체류(정치적 이유에서든 일신상의 이유에서든) 성향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오랫동안 고국에서 머무르면서 색깔있는 작품세계를 펼쳐나갔다. 이 사실은 소위 그를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영역에 넣게 만드는 국지적-남미지역적이라는 특성과 그의 코스모폴리탄적 면모에 스위치를 걸면서 보르헤스라는 인물의 통합적이고도 부조리한 면모를 두텁게 만든다.
그는 무정부주의에서조차도 무정부주의를 그리던 순환 오류적인 '진짜' 무정부주의자였을까? 확신하긴 힘들다. 왜냐면 그조차도 보르헤스가 가진 면모의 한부분일 터이니. 어쩌면 그의 멀어버린 눈 너머에는 페론주의에 반대하며 보수파를 선택할 정도의 그의 면밀한 면모(움베르토 에코는 어쩌면 이 부분을 간파하고 호르헤 수도사를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를 담당하는 뇌세포의 작동으로 자신을 '그 모든 것'으로 만들 의도된 행동선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론, 무정부주의의 영역을 추구하는 이들이 보여줄 수 있는 뻔한 과오를 그대로 따랐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들의 아름다움과는 반비례하여 안타까움을 저버릴 수가 없다.
남는 것은 '지금' 읽는 자의 선택뿐이니. 이래서 미래는 언제나 우리의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