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바퀴벌레는 3억년이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종 자체의 우수성과 현대사회의 찌든 맛을 낱낱이 맛본 덕에 놀라울 정도의 생존력을 자랑하시는, 한마디로 다른 집 바퀴와 별 다를 바도 없는 바퀴벌레시다. 그래서 다른 집들이 했던 것처럼 레이드도 뿌려보고 컴배트도 설치해봤지만 역시나 다른 집들처럼 바퀴벌레들은 밤만 되면 열심히 자신의 제국을 삘삘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레이드를 뿌려봤자 가끔씩 발라당 배를 하늘로 내민 채로 사망한 바퀴가 한 두어 마리, 컴배트를 깔아놓으면 도대체 이놈의 바퀴가 죽은 건지 안 죽은 건지 확인할 수가 없는데 가끔씩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있을 때면 두리번거리면서 제 새끼들과 함께 생태사회의 순환과정을 실천하고 있는 대형포유류에게 인사하고 어디론가 재빨리 달아나시는 걸 보니 별로 효과가 없는 게 확실한 듯 싶다. 깨지는 돈, 위생상 문제, [미믹] 때문에 생겨난 대형 바퀴벌레에 대한 혐오감 및 미래 인간 사회의 위협 등등을 우려하여 네이버 지식인을 검색해봤는데 그중 가장 쓸모 있는 정보가 다음 지식인의 글이었다.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8&dir_id=813&eid=e8%2BDpSBjV114jRd4ZTaFds%2BtUS%2FBN8G0
과연, 이 정도로 하고도 구제가 안된다면 그것은 방역업체가 와도 안된다는 수준이랄까. 그러나 난 글을 쓴 이 만큼의 끈기와 노력이 없는데다 돈 깨지는 것도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간편한 방식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 옆집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
"시장에서 파는 바퀴벌레약 있지? 쭈욱 짜서 바르는 거 말여. 그걸 써 봐."
그러고보니 위의 지식인에도 시장에서 파는 그 물건이 효과가 좋다고 했으니 이동형 가판대에서 너무 노골적이라 광고효과가 떨어지는 현수막을 두르고 바퀴벌레 완전 박멸을 주장하고 다니는 녹색 케이스의 약을 말함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랬다, 그 아주머니는 시장의 모처에서 일년 365일 사라지는 걸 못 보았으니 아무튼 느긋하게 그곳으로 향했다.
25그램에 6000원.....
뭐 이렇게 비싸?-_- 이건 밑져야 본전 수준이 아닌데? ...라는 나의 당혹스러운 눈치를 본 아주머니는 약장수 특유의 말빨을 동원해가며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학생, 이거 정말 좋아. 이거 해충박멸하는 회사에서 쓰는 거야. 이거 안 듣는 집이 없어, 쓴 집에서 다시 쓸려고 사간다니깐. 6000원이 비싼 값이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것이 내 상인 생활 25년의 자부심과 조선 팔도를 넘나들은 역마살조차도 무릎 꿇고 길동시장에 머무르게 만든 탁월한 효능의 어쩌구저쩌구...."
파워시그마겔이라는 제목에서 보여지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수학공식중 하나의 이름과 녹색유통연합이라는 수상쩍은 유통회사, 녹색과 흰색으로만 이뤄진 소박투박한 외관 디자인 등등이 선택을 꺼려하게 만들었으나.... 결국 구입. 이것도 안 통하면 기존의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바퀴벌레와 종과 종을 넘어선 우정을 구축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반포기스러운 구상을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
쥐어짜도 제대로 안 나와서 있는 힘을 다해써 짜니 그제야 찔끔찔끔 나오기 시작한다. 색은 누르팅팅한 게 우리집 강아지 대변을 압축시킨 것 같은 모양이다. 여러가지로 표피적인 모양은 볼썽 사나운 약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이 약을 바르고 나니 지금껏 니 세상이 내 세상이요라는 도가적 세계관을 몸으로 실천하던 바퀴벌레들이 코빼기도 안 보이게 된 것이 아닌가. 이거 완전 약장수삘이긴 한데 이정도로 효과가 좋을 줄은 전혀 생각도 않았기 때문에 솔직히 신기했음이다.
나는 곧 이 탁월한 약이 어째서 약국에서 판매되지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우리 동네만 그런가?) 네이버에서 제조원인 그린메디팜을 치니 회사 주소만 달랑 나온다. 그런데다 조선팔도를 넘나들던 아주머니가 소속되 있을 녹색유통연합은.... 말그대로 괴단체다. 주소없음 정보없음. 고객 상담 전화 번호 하나 02-2281-7844.
약의 내용물이 어떨게 되먹은 것인가도 의문인데 성분, 함량에는 이 약의 100그램 중 피프로닐이 0.05그램이 들어가 있다는 것만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일단 피프로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 1987년에 롱프랑(Rhone Poulenc)의 과학자에 의하여 발견되었으며 종자처리, 미끼, 또는 경엽살포시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피프로닐은 염소채널(chloride channel)에서 염소이온의 이동을 방해하여 중추신경계의 활동을 교란하고 고농도에서 사망효과를 일으킨다. 1996년에 Hainzl과 Casida는 피프로닐을 설폰(sulfone), 설파이드(sulfide), 디설피닐(desulfinyl), 디트리플루오로메틸설피닐(detrifluoromethylsulfinyl)의 4가지 대사물질로 변환하였다. 그들의 연구와 결합된 독성연구에 따르면 디설피닐 대사물질이 피프로닐보다 집파리에 더 큰 독성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꽃바구미의 방제를 위하여 목화에 처리한 피프로닐의 효과와 분해
[출처 : Journal of Economic Entomology 92: 1364-1368 : 1999년 12월호]
관련 정보 : 처리방법 따른 바퀴용 살충제 수평전파
http://www1.kisti.re.kr/%7Etrend/Content472/agriculture16.html
뭐 피프로닐은 그렇다치고 그럼 나머지 99.95그램엔 도대체 뭐가 들어가 있는 건데? ...라고 해봤자 더이상 정보도 없고. 암튼 정부등록도 없이 제조번호만 달랑 쓰여진 채 여러가지 의문스러운 사항을 남기는 이 약은 아무래도 과다노출시 암 및 피부병 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의심된다는 얘기도 있는 것으로 보아 신체접촉시 벌어질지도 모를 대단히 유감스러운 모종의 현상 때문에 제대로 등록이 안된 건 아닐까 의심해본다.
단 한 번 바르고 이제 두 달이 훌쩍 넘었는데, 가끔씩 미이라가 되어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놈 몇마리를 제외하곤 아직까지 한마리도 목격하지 못했다. 말그대로 싸그리 사라져버렸다. 인류따윈 가볍게 비웃어줄 수 있는 3억년의 역사를 가진 생물을 단지 땅바닥에 발라댄 것만으로 접근도 못하게 만든 이 약, 어떻게 생각하면 무섭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