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는 선릉역 근처의 고깃집이었고 시간은 7시 15분이었다. 나는 그때 리서치 알바를 하기 위해 걸어가고 있었다. 저녁 시간대에 있는 이런 종류의 알바는 대개 저녁식사를 제공하는 법이라 본격적인 알바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내 몫을 때울려고 정해진 시간보다 15분 정도 먼저 도착했다.

그런데 가게 안 2층에는 이미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로 차 있었다. 모두 어색해 하는 모습, 그 자리에 있으면 안된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인물들뿐이었다. 그중에서 앞에 놓인 음식에 젓가락을 대는 뻔뻔스러운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세명밖에 없었다. 예상을 벗어난 것은 일번적인 생고기구이 정식을 먹을 때 처럼 우리들 자리 앞엔 정식 반찬들이 놓여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주최측에서 실험용으로 쓰일 술들을 가져와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주최측의 설명이 이어졌다. 술을 마시는 방법과 설문지를 작성하는 방법. 바깥 홀에선 다른 모임에서 온 단체손님들이 욕설을 하느라 시끄럽다. 설문지는 내가 받아본 것중에 가장 간단한 양식이었다. 이윽고 식사 겸 설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우리는 생고기와 양파, 마늘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두종류의 술을 각각 두잔씩 마셔야했다. 그 이후엔 몇잔을 마시든 자유였다.

술은 소주였고 하나는 기존의 것, 다른 하나는 신제품인 듯 했다. 그리고 아마도 신제품으로 추정되는 소주는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다소 걸리는 느낌이 드는 기존의 소주완 달리 그 소주는 살짝 달콤한 맛을 내면서 목뒤로 넘어가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곳곳에서 웃는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술이란 재밌는 음식이다. 그리고 그런 현장에 같이 앉아있는 것도 나름대로 재밌는 상황이었다. 그 자리엔 다양한 사람들이 와있었다. 학생, 회사원, 부동산 컨설팅, 구멍가게 사장, 공무원, 회계사 등등의 사람들이 술이 한잔 돌기 시작하자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소개팅을 시작한다. 덕담과 농담들, 직업의 애로사항과 미래에 대한 고민.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들은 재빨리 사라져가고 있었고 그 사이로 오가는 리서치 회사 직원들과 식당 종업원들의 분주함과 함께 취기 어린 사람들의 이야기 경쟁이 시작된다. 재밌는 일이다.

그러다 문득, 어제 길거리에서 본 사건이 생각났다. 팔뚝의 굵기가 어지간히 부실한 내 팔보다는 두배 정도 두껍고 키는 머리통 하나 반쯤이 더 크고 문희준과 비슷한(고백하건데 이 친구에 대해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헤어스타일을 한 남자가 차옆에 앉아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바로 앞엔 빼빼 마른 할머니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체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막 119차가 도착하고 있었다. 119에 신고한 아줌마의 말에 따르면 그 남자가,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손자가 길을 가다가 갑자기 할머니의 뒤를 잡고는 마구 흔들어서 넘어뜨리더라는 것이었다. 곧 도착한 경찰은 손자의 얼굴을 보더니 혀를 차면서 왜 자꾸 할머니를 괴롭히느냐고 되물었다. 상습적이었던 것이다. 손자가 앉아있는 자리는 반지하방인 그 가족의 집 앞이었고 부모는 일을 하러 나가서 집에 없었다. 할머니는 심한 관절염으로 인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었다. 생활고, 스트레스, 친족간의 폭력.

내 앞에 있는 남자는 팔을 다쳤는지 기브스를 하고 와서 제대로 고기도 못 먹고 있었다. 나와 그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 할 얘기도 없었다. 한시간 정도 진행되자 사례금이 담긴 봉투가 각자에게 돌아갔고 그걸 받은 사람은 돌아가도 좋다는 소릴 들었다. 그러나 된장찌개와 밥과 고기가 새로 나오고 있었고 얼굴에서 얼큰하게 홍기가 도는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는 게 아쉬운 듯 명함을 교환하고 얘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가장 먼저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역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표창원이 쓴 [한국의 연쇄살인]을 읽었다. 거기엔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불특정 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을 골라서 죽이고 강간하고 분해한 연쇄살인자와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가족들을 차례로 죽인 여자의 이야기가 쓰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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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10-07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재밌는 리서치를 하셨군요..^^ 먹으면서 돈도 받다니... 이런게 젤 부러웠어요..!

hallonin 2005-10-08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네이버 알바에서 리서치나 좌담회 키워드로 검색하면 나올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