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이 통하는 곳이긴 하지만 오이도는 역시 멀다. 왔다갔다 하는 데만 해도 4시간 가까이 걸리니, 고속버스 타고 대전을 왔다갔다 하는 것과 별 다를 바가 없을 정도다.
오이도엔 왜 갔느냐, 하면 뭐 겨울바다를 느끼고 싶어서였는데. 워낙 황량해서.... 예상한대로 실망스러웠다. 왜 나는 실망할 걸 뻔히 알면서도 하게 되는 걸까.... 라고 되물으면 뭐, 순전히 변덕의 쾌감에 방점을 찍는 내 성향 탓이다. 그래서 실망스러웠는데도 후회는 없었다. 아니, 단순히 더 생각하기 싫은 거겠지.
가는 길에 읽을 책으로 두 권을 가져갔었는데, 하나는 전에 읽었었지만 다 까먹어버려서 다시 읽기로 한 [침묵과 열광]이다. 이거 정말 영화시나리오로 만들고 싶은 걸! 첫 시퀀스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는 기내에서의 황우석 박사와 연구원들의 대화, 그리고 이어지는 공항에서의 엄청난 환대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뭐 역시 재밌다. 황우석 사건은.
다른 하나는 [논증의 역사]. 3페이지를 본다.
-어떤 면에서 볼 때 논증은 사실을 드러내는 것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 논증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신념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더구나 논증은 확실성보다는 합의와 관계된 문제이다.... 의견이 불일치할 때 논증이 활성화된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하지만 논증은 호전적인 대립보다는 논쟁적 토론, 토의를 통해 의견 차이를 해결하려 한다.
아아, 이거 좀 애매한 거 아냐? 그러나 아직 끝까지 다 읽은 건 아니고, 이것 자체로 꽤 쓸모있는 말이다. 43페이지.
-데카르트는 "이성의 특징은 명확성이라고 하면서 증명만을 합리적인 것으로 여기기를 원했다. 증명은 명확하고 분명한 생각들에서 출발하여 공리의 명백한 성질을 정리로까지 넓히는 것이다." 페렐만은 여기서 생겨나는 잘못된 양자택일을 거부한다. 여기서의 양자택일이란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증명적 이성으로, 그리고 계산할 수 없는 것... 진실임직한 것과 가치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힘, 본능, 제안 또는 폭력"으로 구분하는 것을 말한다...
"만일 우리 행동의 방향을 잡거나 다른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이성을 사용하고 있는 논증 이론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를 원한다면, 공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성의 특징인 명백함에 대한 개념이다."
난 이 말이 양날의 검이라고 생각한다.
http://news.empas.com/show.tsp/cp_hi/cul00/20070114n04214/
이번 중복서평 싸움의 지속적인 오메가 역할을 담당하신 위서가님의 블로그를 알게 됐고 거기서 저 기사를 보게 됐다. 아니, 난 야설을 쓰겠다고 자청해서 들어가서는 내 상상력을 지양하는 온갖 표현상의 검열 때문에 지쳐서 떨궈져 나왔는데-_- 뭐 어쨌든 저 시인분이 참기름 공장을 때려치운 것이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모욕의 의미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단지 문제는 갭인 것이지. 휘유~ 남말할 땐 아니지만.
위서가님과는 예전에 모처에서 약소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내가 유동닉이었던데다 워낙 적이 많으신 분이라 기억은 못하시겠지만.
내 위치는 알라딘에서 열외자적이면서도 깊숙한 내부자라고 생각한다. 뭐 이거 거의 말장난인데, 생각해보면 난 알라딘 서재분들과의 친분도는 다른 분들에 비해 그리 높지 않고 알라딘보다는 디시에서 유동닉으로 노는 시간이 더 많으니까-_- 그러면서도 난 알라딘의 혜택은 받고 있었고, 그 혜택에 값하기 위해 알라딘이 안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나름 노력했다. 어쩌면 나야말로 박쥐?
사실 이번 논쟁의 주안은 풍토적인 차원의 문제로도 보인다. 위서가님의 화법이라는 것이 온갖가지 막말의 폭풍 속에서 진실을, 혹은 고도화된 구라뻥 낚시를 잡아채야 하는, 거의 정보의 생존경쟁 같은 디시인사이드에선 꽤 익숙.... 이라기 보단 엄청 순화된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는 알라딘이다. 알라딘의 공기와 나름의 암묵적인 대화의 흐름이 있는 곳이다. 그러니, 싸움이 안 일어날 수가 없었고.... 그리고 이건 본능적인 문제를 떠나 어느 정도 의도된 바였다고 생각한다.
음, 결론은, 오이도는 황량했다는 거. 실망스러웠고 그래서 맘에 들었다는 거. 아, 생각해보니 겨울바다는 황량해야 맛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