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 옆 철학카페
김용규 지음 / 이론과실천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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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희망, 시간, 사랑, 죽음, 성. 지은이가 내세운 여섯 가지의 주제는 인간이 자리하고 있는 실존에 관한 것들이다. '우리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의 질문에 '우리는 행복을 위해 산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인간 실존이 행복을 느끼고만 살지 않는다. 도리어 숱한 좌절과 절망,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한 첫번째 답은 존재 그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 행복이라 말한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할 수 있을 때, 그 무엇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때 행복은 자리를 잡는다. 그럼에도 숱하게 엄습하는 이 세상의 고통에 대한 대답으로 지은이는 '희망'을 말한다. 이 희망이란 무엇인가 더이상 좌절할 수 없을 때, 그만 쓰러지는 것이 마지막 방법일 때, 도리어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진정한 희망은 그 때에서야 비로소 희망이 된다.

희망은 현전하는 과거와 현재, 미래 속에 있다. 실존이 처해 있는, 또는 실존이 갇혀 있는 곳이 시간아닐까? 희망이란 이 시간을 넘어서 온다. 시간에 갇힌 자는 우리 앞에 닥친 죽음의 단계에 멈춰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희망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한다.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고, 어떤 희망도 없이 흔들리는 것 같지만, 우리에게 희망이 있으므로, 이 세상에 대한 절망적 사랑이 아니라 보다 고귀한 것, 순결한 것, 지고지순한 것을 향해 사랑을 품는다.

지은이가 끝으로 말하고 있는 두 주제 죽음과 성 역시 인간에게 놓여져 있는 실재이자,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한계이지만, 인간다움은 이것을 인간답게 이겨내며, 인간다움의 모습으로 승화시켜 왔음을 역설하고 있다.

이 모든 존재와 관한 이야기들을 영화를 바탕으로 써 내려간 책이 <영화관 옆 철학 까페>이다. 지은이가 보기에, 영화란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창조해 내며,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주는 가장 예술다운 예술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새롭게 창조된 시간과 공간을, 그 세계관과 더불어 해석해 내야 한다. 전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인 것이다.

그런 바탕 위에 영화를 통해 드러난 존재의 문제들을 서양의 여러 철학자들의 입을 통해 두루두루 엮어낸 그의 글들은, 또다른 창작이며, 말 그대로의 영화읽기가 된다. 내 인생의 영화라고 꼽을만한 영화들이 내게 그런 의미일 수 있었떤 있었던 것은, 영화가 단순히 즐김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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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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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당신은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당신은 왜 언제나 침묵하고 계십니까?”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신은 종종 침묵해 왔다. 현대사 속에서 아우슈비츠의 그 참혹한 현장에서도,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시체 무덤에서도, 인종 청소라는 끔찍한 이름으로 르완다와 코소보에서 벌어지는 살육전. 지구 어느 한 구석이라도 평안히 평화를 노래하며 쉴 수 있는 곳이 있을까? 그 때마다 과연 신은 침묵했다.

침묵. 기치지로는 몇 번씩이나 배교한 자이다. 그는 구원받고 싶은 자였지만, 동시에 이 세상의 힘겨움을 이겨내지 못했다. 병적으로 신에게 매달리고자 하지만, 그는 약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시련을 이겨내지 못했다. 포르투칼에서 온 가톨릭 선교사를 차례차례 고발하는 기치지로는 영락없는 배교자일 뿐이다. 힘 있는 자 혹은 가혹한 탄압 끝에 순교 당한 자는 그를 향해 비겁한 자라 손가락질 할 수 있겠지만, 그는 약한 자일뿐이다. 고통당하는 약한 자를 향해 돌을 던지는 것이 과연 기독교적이라 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것이나 선한 것을 위해 죽는 일은 쉽지만, 비참한 것이나 부패한 것들을 위해 죽는 일은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배교자이자 버림받는 자인 기치지롤 위해 성화를 밟고 자신이 수모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인 성화에 발을 올려놓는 것은 끔찍한 배교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한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신만이 있었다. 고통이 있는 곳에서 그 고통을 이겨내고, 약한 것을 강하게 하며, 부족한 것을 완벽하게 하는 신이 있었다. 신은 언제나 말해야 하는 존재이며, 신이 침묵하는 것은 신에게 합당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신은 침묵한다. 그 침묵은 고통과 처참한 현실에 대해 눈 감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 속에 그 처참한 현실을 함께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겪는 끔찍함을 신도 나와 함께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세포 하나하나에 느껴지는 그 고통들 속에 신은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고통을 당하느라 미처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우리와 고통을 나누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그러나 교회에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 교회에는 고통당하는 자보다 고통을 떠넘겨 주는 자들이 더 많다. 이 세상에서 그럭저럭 먹고 살며, 정신적인 위안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는 예수의 이름으로 고통을 전가하는 자들이 더 축복받은 자들이라 불린다. 교회 건물은 더더욱 하늘을 향해 높아가고, 이웃들 사이에서는 기피 건물이 되어가고 있다. 고통당하는 자 사이에서 고통당하신 예수, 고통당하기 위해 오신 예수를 그들은 믿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 그대가 확신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는 없을지도 모른다네. 오히려 침묵하는 신이 더 좋은 그대들이여! 고통 속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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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1 - 현경 순례기 1
정현경 지음 / 열림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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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가장 가슴 뛰게 하는 것, 그것은 자유였다.” 현경님의 자유를 향한 영적 순례. 그녀에 대한 평가들은 참으로 극과 극을 달린다. 나를 지도하는 교수님은 서슴없이 ‘무당 딸’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내가 아끼는 후배는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라는 제목만으로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환호한다.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캔버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에서 성령에 관한 강연을 했다는 것을 접하고 나서였다. 해방신학의 민중지향적 집단성, 아시아신학의 뿌리 깊은 영성, 여성신학이 강조하는 몸과 영혼의 불분리성을 강조하기 위해 집단적인 춤,
아시아적 영성의 상징, 그림들로 가득 찬 제례적인 신학적 공연, 그리고 그 공연을 통한 강연”이라는 해설이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결국 그녀가 지향하는 것은 해방이었고, 자유였다.

정통 기독교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자유롭고 분방한 그녀의 신학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나는 여성이 아니기 때문에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여성이 겪고 있는 아픔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며, 지구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수치를 통해서 말고는 접하기 힘들다. 에코페미니스트이며,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 여신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그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나는 정통 기독교의 세례를 받아 자라왔고, 그 안에서 이단 감별사가 다 되어 있으니 말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하는 것이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주요한 표준이 될 수 없다고 받아들이면서도 종교에 관한 한 그 깊은 보수의 끈들을 놓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 역시 그녀가 그토록 지향했던 자유에 대한 열망들을 가지며, 이 세상에 대해, 이 사회에 대해, 종교들에 대해 심각한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현경님의 자유를 향한 영적 순례를 많은 기독교인들은 종교 혼합주의 혹은 종교 다원주의, 우상 숭배의 이름으로 정죄할 것이다.

물론 나도 그의 영적 순례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녀는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해악들을 보았고, 기독교가 태연하게 저지르고 있는 위선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무엇이 가장 최선의 해방의 길인지에 대해 우리 모두는 충분히 논쟁할 수 있지만, 어느 누구도 현경님의 영적 순례에 돌을 던져서는 안될 것이다. 자칭 신실한 자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인 자들,
그들이 가지 못한 길을 현경님은 온 몸을 던져 풀어 왔다.

엄청난 댓가를 알고서도 그 길을 뚫고 나올 수 있는 현경님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그녀는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니라, 아름답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그녀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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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2004년 판) 세계를 간다 18
중앙M&B 편집부 엮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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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와 이스라엘을 가게 되어 여행 안내 책자를 찾아 보았지만 별로 선택의 대안이 없었다. 그나마 가장 자세하게 나와있는 책이었는데, 실전에 너무 약했다. 처음 책을 구입했을 때에는 현지 사정이 어떤지 잘 몰랐고, 가장 최근에 업데이트 된 것으로 나와 있어 선택하게 되었지만 업데이트는 거의 말뿐에 지나지 않았다.

이 책의 장점이라면 두꺼운만큼 자세한 정보를 담으려 한다는 점이지만, 그것도 사실 여행지에서 들고 다녀야 한다는 것에 비추어보면 장점일수만도 없다. 여행준비라든지, 이집트나 이스라엘의 특징들을 주제로 묶어서 편집한 부분들은 유용하고 흥미로운 주제들이었다.

불편한 점을 든다면 우선 자세하고 큼직한 지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작은 지역, 도시의 지도가 있고, 이집트나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나온 지도가 있긴 하지만 나라의 지도는 너무 허술해 보였고, 도시의 지도들은 너무 협소해 보였다. 또 실측보다는 단순화시킨 도로지도가 많아 거리감이 도저히 생기지 않았고, 실제 여행에서 움직이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이집트 박물관 같은 설명에 있어서는 체계적인 설명이 되어 있지 않아 많은 정보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게 편집되어 있었다. 사진의 처리가 대단히 미흡하고 인쇄상태가 좋지 않아 느낌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

이 책대로 여행했다간 이집트나 이스라엘에서 딱 미아가 되기 십상이다. 문화나 역사, 유물 등에 대한 설명은 업데이트가 좀 늦어도 상관없지만 여행에 직접적인 부분들, 교통 시간표라든지 전화하는 법, 환율, 치안과 정치 상황 등등에 대해서는 흉내만 낸 업데이트말고 세세하고 치밀한 없데이트가 필요할 것이다.

사족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이제 우리 나라에서도 우리 나라 사람이 쓴 여행 책자도 가능할 것 같다. 일본책 번역만 하지말고 새로 만드는 것도 출판사로서는 시도해 볼만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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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신 - 환경신서 9
이안 브래들리 지음, 배규식 옮김 / 따님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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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God is Green>이고, '환경주의적 성서해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녹색은 즉자적으로 자연을 떠올리게 한다. 생명이 있는 푸르름의 색깔이 녹색이다. 이 책은 하나님의 색깔, 혹은 하나님의 의미가 녹색이라고 선언한다. 지구상에 환경 운동이 출현한 것은 더 이상 인간이 생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갈수록 파괴되어가는 생태계와 지구 환경은 분명코 인간의 미래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절박함이 팽배해 있을 무렵에야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발맞춰 신학에 있어서도 생태주의적 신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온 세계와 사람, 하나님이 한 몸이라고 주장으로부터, 인간은 자연을 지키는 청지기여야 한다는 소박한 의견에 이르기까지 더 이상 계속되어져서는 안될 환경의 파괴에 기독교계가 생태신학으로 대답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대답의 한 방법으로 환경주의적 성서해석을 제시한다.

모두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장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관심이라는 제목으로 이 땅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며, 그의 충만함으로 가득차 있음을 설명하며, 2장은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 들판의 나무들이 기꺼이 즐거워하며 손뼉치는 무도임을 말한다.

3장에서는 자연계의 타락, 곧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저절로 타락하게 된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다는 바울의 목소리를 제시하며 신학적으로 재해석한다. 4장에서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의 장엄한 의미들을 되살리면서, 그리스도께서 이 우주를 주관하신다는 믿음의 고백 아래 인간 역시 그리스도의 사역에 무릎꿇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결국 5장에서 인간의 역할은 어떤 위치가 되었든지 피조물을 잘 돌봐야 한다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 책은 성서에 대한 환경주의적 해석 말고도 기독교 역사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성인들의 기도와 시를 인용한다. 바른 신앙은 균형을 갖추어야 하며,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신앙 고백은 하나님의 의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현대에서야 등장하는 환경주의적인 성서 해석의 뿌리가 초기 기독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한국교회의 환경과 생태계에 대한 모습은 어떠한가? 건축물의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육면체의 교회 건물들 속에 푸르름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찾아볼 수 없다. 교회는 그저 사람들만의 구원을 위한 장소이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 역시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만의 구원을 신봉하는 동안 우리 모두는 공멸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다. 성경을 어떤 특정한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은 성경에 대한 대단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환경주의적 성서해석 역시 그러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 사역 자체를 인간에게만 한정짓는 좁은 믿음의 소유자는 성경의 진리를 제대로 발견할 수 없다. 환경주의적 성서 해석은 최소한 인간 중심 신학에 대한 반격이다. 성서를 축소하려는 개인주의적 신앙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며, 우리에게 고정관념처럼 박혀 있는 내세만 바라보는 영혼 구원론의 변경을 요구하는 해석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 우주 만물, 피조물들의 슬퍼하는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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