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빈치 코드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이창식 번역 감수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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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은 인간이 온전하게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통합, 음과 양의 통합을 제시한다.

그는 내면에 있는 또 다른 나는 내가 가진 성(性)과는 다른 성을 지닌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통합시키는 것이 참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남성이나 여성, 그 어떤 것도 한 쪽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가톨릭은 수천년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가톨릭 안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잘 융합시켜 왔다. 하나님이 남성을 상징한다면, 마리아는 여성을 상징한다.  남성을 상징하는 하나님이 남성성을 대표한다면, 마리아는 여성성을 대표한다. 진취적이고 성취지향적이지만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남성성을 여성성은 온화한 것으로 바꾸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남성 중심의 역사이고, 남성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노력들이 득세해 왔다.

아마도 '다빈치 코드'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에서 감추어진 여성성을 끌어내려는 시도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화와 기호학이 뒤섞이고, 그림 속에 담겨진 전설들을 좇아 가면서 지은이의 돋보이는 상상력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교황청을 뒷배경으로 하는 소설들의 공통점대로 무엇인가 있는 듯 하지만, 별로 남는 것 없는 결론을 보여주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다빈치 코드' 역시 교황청에는 뭔가 숨겨진 것이 있다는 것에서 출발하고, 그 안에는 아주 다양한 음모들이 엇갈리고 있으며, 교황청은 진리를 나타내는 곳이 아니라 비밀을 제거하고 감추어두는 곳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해내는 것은 그간의 기독교의 진리를 뒤엎는 것이며 교황청은 엄청난 저항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그려 놓는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다빈치 코드가 말하려고 하는 주된 주제 중의 하나인 예수는 아버지였다는 부분. 그리고 그 후손들이 있고, 후손들의 가계도가 있으며, 그것을 보호하려는 세력과 제거하려는 세력이 있어 왔다는 이야기. 이 얼마나 자주 이야기되었던 전설같은 이야기인가? 예수가 인도에 가서 몇 년을 수련했다는 이야기를 포함해서 끊임없이 떠돌던 낭설에 불과한 이야기 중에 하나이다. 예수가 아버지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성배를 찾았는데, 그것이 사람이었다는 것이 과연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이다.

다빈치 코드를 처음 읽을 때에는 지은이가 잃어버린 여성성을 찾기 위해 바른 길로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여성성을 찾기보다는 변죽올리기에 바빴던 것 같다. 도무지 이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그래서 성배를 찾았는데, 그 다음엔 뭐야,  라는 질문말고는 떠오르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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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속한 사람 믿음의 글들 214
윈 형제.폴 해터웨이 지음, 고석만 옮김 / 홍성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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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소설을 처음 읽었던 것은 일제의 침략 속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하던

중국 공산당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홍천오성기라고 하던가?

붉은 하늘 바탕에 별 다섯개가 그려진 그 국기를 휘날리며 일제의 탄압에 맞서던 중국 공산당.

그들은 일제에 의해, 또 국민당 정권에 의해 엄청난 고문과 박해를 받았다.

그들이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독립전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들은 중국을 점령했다.

중국공산당은 최소한 인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 시기에 기독교는 역시 공산주의를 싫어했다.

계급적 기반이 달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하늘에 속한 사람>의 이야기들은 항일 투쟁하던 중국공산당 대신 기독교가,

탄압하던 일제 대신 중국 정부로 대치된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주체와 대상만 바뀌었을 뿐 또다시 피의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누가 더 중국 인민들을 더 사랑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중국공산당은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중국에서 기독교가 부흥하는 것은 기독교 본래의 사랑이 다시 그 땅을 감동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그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사람 윈 형제가 피로 쓴 고백이다.

예수님의 이름만이 높임을 받는다면 그는 스스로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이었다.

사역의 내용과 방향이 조금 달라진다 한들,

그가 어떤 탄압과 고통을 당한다 한들 그에게는 예수님의 사랑만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사랑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그가 그만큼 깨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를 들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사람들을 보내셨다.

그들에게 엄청난 비전을 담아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비전을 감당하지 못했다.

끝까지 붙들지 못했다.

나의 비전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가?

 

<책 내용 중에서 발췌>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저 내게 맡겨라. 상황을 보지 말고, 너 자신도 보지 말고,

다른 사람도 보지 말라. 열심히 기도해라. 그러면 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고전 4:9,13)

"주님, 저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군요." 우리의 힘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그것은 곧 패매가 아니고

하나님의 무한한 창고를 여는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사역이 우상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보다는 하나님을 위한 일이 우선시되었다.

나는 하나님이 당신의 자비와 사랑으로 개입하시기 전까지,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들에게

내 상태를 숨기고 스스로의 힘만으로 사역을 계속했다. 물론 나는 여전히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 함께 기도하고 ... 성경을 읽었다. ..... 의무감과 타성에 젖은 행동이었다.'

"울지 말라. 내 백성을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해 내가 택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 아니다.

다른 여러 사람들도 명령을 받았지만, 이 비전을 끝까지 붙들지 못했다."

"사람은 이 일을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마 19:26)

"박해가 멈추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기 바란다! 우리는 날라야 할 짐이 가벼워지도록

기도하기보다는 더욱 튼튼하게 견뎌낼 수 있는 동허리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정말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고난과 역경을 몸소 통과함으로써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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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평, 어떻게 쓸까? 시네파일(Cine-file) 5
티모시 코리건 지음, 이권 옮김 / 시공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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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에도 몇 편씩 생산되고 소비되는 영화. 아무리 영화가 산업의 한 부분이라 하더라도 이건 좀 심한 것 아닐까? 우리 모두는 소비를 촉진하는 사회에 살고 있고, 소비가 점점 더 미덕이 되어가고 있고, 그래서 영화도 역시 소비되어져야 하는 한 부분인걸까?

그럼에도 한 편의 영화가 태어나기 위해서 걸리는 몇 년간의 제작 과정과 수 많은 스탭들의 피 같은 땀방울. 한 아기가 태어나듯 힘겹게 힘겹게 이 세상에 태어나는 영화들이 그러나 단 1주일만에, 때때로 몇일만에 사라져 가기도 한다.종종 영화는 오해되고, 그저 오락물이 되기도 하고, 일견한 후 잊혀지기도 한다.

영화에 대한 글 쓰기는 어쩌면 이런 미안함에서 출발하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영화 글쓰기에 대한 소극적인 의미라면, 이책은 좀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글쓰기를 권한다.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그저 오락물이라고 소비해 버리기에 급급했던 우리 마음을 영화에 대한 글쓰기로 옮긴다면 '오락물'은 더욱 큰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즐거움을 갖기를 권한다. 그리고서 영화와 관련된, 또 영화에 대한 글과 관련된 기초적인 그림을 큰 윤곽으로 그려준다. 영화형식의 요소들에 대해 웬만한 것은 다 이야기하고 있고, 영화 비평 이론에 대한 것들도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정도는 이야기해주고 있다. 게다가 이 책은 아주 많은 질문을 담고 있다. 질문들 모두는 영화를 어떻게 더욱 깊게 읽을 수 있는지에 대한 것들이다. 그냥 지나쳐 버렸을, 그래서 의미를 찾는데 무관심했을 부분에 대해 구체적 질문을 제시해 주고 있다.

또 하나 장점이 있다면, 아주 세심하기까지 하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영화를 보며 메모할 것을 권하며 이렇게 설명하는 식이다.
- 영화를 두번 이상 봐라!
- 첫 번째 메모 : 시간의 경제적 활용, 주요 시퀀스와 숏, 내러티브 요소의 파악
-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서너 개의 씬, 숏, 시퀀스만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도 한 방법.
- 가능한 한 구체적이고 상세해야 한다.
- 프레임 자체와 그것의 사진적 속성이 카메라 앵글, 조명, 심도 조절, 편집 등을 통해 어떤 식으로 내용을 설명하는 지 기록.
- 특정 씬에 나타난 공간의 연극적 활용, 밝은 컬러의 뛰어난 효과
- 섬세한 오버램이나 사운드의 이미지의 분리에 주목.... 뭐 이런 식이다.

몇 가지 눈에 거슬리는 점(굳이 이렇게 비싸게 책을 만들어야 했을까, 우리 형편에 잘 맞지 않는 표기 방법 등등)이 있긴 하지만 영화를 보고 무엇인가 쓰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가져본 사람에게는 아주 적합하고 유용한 책이 될 듯 싶다. 영화를 소비하기만 하던 내 자신에게 좀더 부지런할 것과 좀더 노력할 것을 요구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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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oyster 2004-07-12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평 내용만큼이나 상세하고 구체적이고 섬세한 서평이네요. 감사합니다.
 
타인에게 말걸기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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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의 균형 잡힌 삶을 난폭하게 허물고 도도한 감정의 물줄기에 격량을 일으키고 그리하여 나에게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을 모조리 팽개쳐버리기를. … 당신에게 속할 수 있다면 당신의 환부라도 되고 싶습니다. 종양 같은 것이 되어서 당신을 오래오래 아프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고통을 달래느라 나에게 쩔쩔매고 배려하고 보살피겠지요. ” '연미와 유미'

당신은 타인이었는지요. 사람은 누구나 홀로 선 나무라고 했지요.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타인이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되뇌어 보아도 허공을 맴돌다 사라져 버리는 먼지 조각일 뿐입니다. 당신으로 향한 그 문을 열 수만 있다면, 그것이 설령 당신을 고통스럽게 한다 하더라도 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내 말에는 성처도 안 받습니다. 당신은 대꾸가 없습니다. 결코 존재 증명 따위는 할 수도 없습니다.
비어버린 위장 안에서 울컥, 소리가 올라온다 싶더니 이윽고 눈물이 솟아 올라옵니다 '먼지속의 나비'. 아무리 당신이 타인이라지만 이토록 당신과의 거리가 멀다는 것은 차마 몰랐습니다. 하긴 우리가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이라 하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었겠지요. 그저 당신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보며 추측이나 했겠지요.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더라도 각자의 즐거움뿐이겠지요. 입을 맞춘다 하더라도 그건 입술만의 만남일 뿐이지 우리 마음의 합일은 아니겠지요.

설령 당신이 결혼한 후에 내게서 연애감정과 섹스를 인출해 간다 하더라도, 마치 돈이 떨어졌을 때 잔고의 일부를 인출하듯이 당연하게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는 이해한 게 아니라 단지 습관을 바꾸지 못한 것이겠지요.'그녀의 세 번째 남자' 그래요. 우린 늘 따로였어요. 합한다는 건 환상일 뿐이에요. 고작 육체를 합할 수는 있겠지요. 진심인 것 마냥, 진실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 마냥 스스로를 속인다 하더라도 우린 서로를 다 알 수 없겠지요.

당신이 낯선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이제 더 이상 건넬 말도 없기 때문인지는 아닌지요. 나는 타인이 내 삶에 개입되는 것 못지않게 내가 타인의 삶에 개입되는 것을 번거롭게 여겨왔습니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에게 편견을 갖게 된다는 것일 뿐이니까요. 타인과의 관계에서 할 일이란 그가 나와 어떻게 다른지를 되도록 빨리 알고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타인에게 말 걸기'.

그러나 나는, 당신이라는 타인 앞에서 아무 것도 건네주지 못한 채 무의미해지는 나를, 나는 참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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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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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짊어진다고요? 글쎄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운명이 있지요. 운명이라는 말이 거슬린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선택하고 혹은 선택 당하고 그리고선 선택된 길을 따라 가게 되지요. 분명히 내가 선택했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운명이라 하겠지요. 하지만 진정한 운명은 종종 우리의 손을 넘어선다지요.

<종소리>에서 처마밑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튼 새들은 스스로 선택한 축에 든다면,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계속 고통당해야 하는 ‘당신’은 선택당한 쪽에 들겠지요. 스스로의 뜻이든 아니든 그들은 고통을 치러야 했고, 끝내는 그 진한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떠나보내어야 했지요. ‘당신’은 직장을 옮기고 삶의 터전이 바뀌어 갔음에도 나는 알지 못했습니다.

운명은 혼자만의 것이라 생각하셨나요? 같이 나누어 주었더라면 ‘당신’이 훨씬 덜 힘들었을 텐데요. 둘이서 서로를 마주하고 식탁에 앉더라도 그것은 서로 다른 운명들의 만남이었나 봅니다. 나에게는 혼자서 고통당하는 당신을 지켜봐야 할 고통이, 당신에게는 당신의 그 고통 전부를 감당해야 했듯이. 그리고 티벳의 천장처럼 독수리들에게 온 몸의 살점을 다 떼어주고서도 얼굴에는 미소를 짓는 경지에 올라서야 비로소 운명은 제 몫을 다하게 된 것일까요?

어느 날 '우물을 들여다보다'가 그만 허공을 떠돌던 누군가를 만났습니다. 그녀 역시 이 세상에서 운명과 다투다 우물에 들어앉게 되었지요. 그 누군가에게는 누군가의 위로가 늘상 필요하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혹은 그녀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차려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리고 독경을 가만 가만 읊어 주면 그녀는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지요. 누군들 그녀를 만나거들랑 모른 척하거나 도망가지 마세요. 운명은 혹시 모르잖아요. 당신 역시 자리를 못 잡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수도 있으니까요.

혹시 지하 다방에 악어를 기르던 여자를 아시는지요? 아무도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잘 알지 못한답니다. 수족관에 악어가 어떻게 기어들어오게 되었는지도 모르구요.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답니다. 어느 누구도 아는 것이 없답니다. 더구나 밤마다 불을 지르고 다녔던 또 다른 그녀를 아는 사람이 누군들 있었을까요? 그냥 운명이 그들을 거기에 묶어 놓았고, 그렇게 있도록 했다고만 하기로 합시다. 이런 저런 설명으로 궁금증을 해결하기 보다는 그저 있었다고만 생각하자구요. 호기심이 해결된다 해도 바뀔 것은 없으니까요. 어차피 모든 것이 '물 속의 사원'이 되어 이승에서는 탑돌이도 못할 테니까요.

자는 모양도 똑같이 오른발을 왼발에 꼬고 이마에 팔을 얹은 할아버지와 손자. 그리고 그 손자의 고모와 할머니, 아버지. 할머니는 한사코 할아버지의 음주를 막으려 하지만 할아버지는 항상 할머니보다 한 수 위입니다. 고모는 객지에 나와 나이가 차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습니다. 손자의 아버지는 이혼을 했다지요. 부모님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그저 동생에게 털어 놓다가 자존심만 상해했지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스스로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너무 안쓰러워 보이지 않으신가요? 술을 먹으면 병이 재발할 거라는 진단이나 또는 누군들 하고 싶어서 이혼을 했을까요? 직장에서도 잘리고 뭐 어디 얼굴이라도 내밀고 다닐 수 있겠는지요. 그냥 짊어지고 가기만 하면 된다면 운명이라도 쉽게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그런데 그 운명에 무릎은 꺾기고 허리는 지탱을 해 주지 못하는군요.

저 먼 낯선 땅에서 뇌종양의 큰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을 혹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아이 앞에서, 오히려 그 아이가 어머니를 위로할 때 뭐라고 대꾸해 줄 수 있을까요? 내가 앓는 병이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찢어지지는 않을 텐데요. 운명에 포위된 채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 역시 삶은 불안한 적막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혼자 간 사람'이겠지요. 저 운명 내가 대신 못 지고, 내 운명 다른 사람에게 대신 넘겨주지 못하고 혼자서 지고 가야겠지요. 그것이 아픔이 아니길 바라면서도 끝내 삶은 고통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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