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떠나는 17일간의 여행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3
조연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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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수를 했더니, 얼굴에 까칠한 것들이 돋아난다. 피부가 안 좋은 탓에 건조한 겨울이 되면 늘상 겪는 일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마음밭은 어떠한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세수를 한 듯 한숨을 내쉬고 나면 감춰졌던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두 숨을 쉬면 마음 밭은 깊은 고랑이 생겨나고, 세 숨을 내쉬면 마음 밭엔 풀들이 돋아난다.

조연현 씨의 '나를 찾아 떠나는 17일간의 여행'은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 볼만한 곳들을 소개하고 있다. 역사의 시계추는 이성을 모든 것의 기준으로 알던 시대를 건너 다시 영성의 문제에 관심 갖도록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 마음의 문제는 곧 영성의 문제이고, 영성의 문제는 삶의 방식이 아닌 세계관에 관한 문제로 옮아간다. 어떤 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며, 행동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따라 이 세상은 충분히 다르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17 군데의 영성 수련원들은 그러한 확신을 매듭지어 준다.

이 책은 수련과 마음 수행의 방법들이 무척 다양하다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종교도 다르고, 역사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조건 속에서 방법이 같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삶의 처지와 조건이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익혀진 것들이지만, 그것들은 모두 하나로 귀결된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마음에 있다는 것,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 주변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 수련이라는 것이 본래 자기의 마음에 집중하고, 개인적 삶을 성찰하는 것에 목표가 있기에, 부당하고 불의한 주변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역동적 실천을 가로막는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음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가 실은 다른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깨장에 가면 파트너의 손으로 먹여 주는 식사를 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임을, 나는 너이고 너는 나임을 드러내는 실천적 행위로 서로 음식을 먹여 준다. 그 사람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 속에도 이미 모두가 한 몸임을 알게 하는 힘이 있다. 깨장에 참여했던 유리 씨가 분노 때문에 운동했던 과거를 돌이켜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한 운동을 하겠다고 마음먹는 것처럼 마음 수련은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삶의 방식까지 변화시키게 된다.

참선이나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는 마음을 갈고 닦아 아무 것도 마음에 접근할 수 없는 경지를 가르쳐주고, 천도교 시천주수련을 통해서는 온 우주 만물에 빗대어 작디 작은 자아를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그 자아 안의 시련과 번민이 얼마나 작은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끝없이 마음 경계에 벌어지는 마음들의 투쟁을 조용히 바라봄으로써 마음의 번민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게하는 원불교 마음공부, '구나', '겠지', '감사'의 끝글자를 합친 나지사를 통해 마음과 화해하는 법을 알게하는 동사섭, 절대자와의 끊임없는 대화로 존재의 의미와 고통의 의미를 밝히는 영신 수련. 부루더 호프의 공동체적 삶.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 글쓴이가 모든 수행에 직접 참가해 보았다는데 있다. 하나 하나 참가하면서 느꼈던 것들을 바탕으로 그것의 의미를 찾아줌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게다가 책 뒷편에 수련에 참가할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적어두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게 해 놓았다. 마냥 이곳에 등장하는 단체들을 바라다보고만 있기엔 글들이 끌어당기는 힘이 너무 크다. 마음 속 풀들이 풀 밭을 만들기 전에 마음 밭을 다시 들여다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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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잘쓰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의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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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을 작성한다는 것은 자신의 개념을 체계화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방법론적 작업의 경험이며, 원칙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는 <대상물>을 구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테마보다는 그 논문에 수반되는 작업의 경험이 더 중요하다.'

인문학이 죽어가는 마당에 논문을 잘 쓴다는 것은 별 의미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이명원 사태인가? 피해자, 양심적인 고발자의 이름이 붙여진 표절 고발 사건처럼 우리 사회에서 표절은 공공연하다. 1차적 출전과 2차적 출전의 차이를 아는 대학생이 얼마나 될까? 오늘의 대학생들에게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그 많은 자료들이 그들에게 1차적 출전이자 교과서가 된다. 이것저것 잘 짜집기만 한다면 그럴싸한 논문 하나가 나오는 셈이다.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법은 다른 데 있지 않아 보인다. 정직하게 쓸 것. 자신의 노력과 탐구 영역을 솔직하게 시인할 것. 어렵다면 주제를 줄일 것. 무식한 작업 같아 보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자료 정리용으로라도 쓸모가 있어 보인다면 충실할 것 등등. 우리네 글쓰는 방식, 양식과는 전혀 다른 솔직함을 내세우고 있다. 논문을 솔직하게 쓰기 위해서, 자료들과 참고 문헌 목록을 만들고, 카드를 만들어 자료들을 잘 정리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꼼꼼해 질 것을 요구한다.

우리에게도 에코처럼, 글 쓰기를 잘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세세한 규칙들까지 일러주면서 솔직한 글 쓰기를 말해 줄 수 있는 솔직한 스승. 언제나 우리는 표절과 복제의 어두운 늪을 지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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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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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스탕스는 발랄하다. 어느 날 문득 귀찮아진 남자 친구. 그의 요구가 점점 무례해진다고 느꼈겠지. 그러다가 그녀는 결국 혼자가 되었고, 자신만의 아름다운 버릇, 침대 위에 누워 책읽기를 여유롭게 가지려 한다. 그녀처럼 자기만의 버릇들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고 싶진 않지만, 가장 여유롭고, 가장 편안하고,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 자신만의 일..

그녀가 처음 접한 밑줄은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였다. 책을 읽는 독자에게나 소설 속의 주인공에게나 얼마나 기대감을 심어주는 말인가? 차버린 남자 친구처럼 책읽기가 한참 지루해지고 있을 무렵, '더 좋은 것이 있다' 정말 뭔가 더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책에서 발견하는 밑줄들은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문장들이다. 하긴, 책에 적혀 있는 대부분의 문장들은 사람에게 읽히기 좋은 형태와 문투로 자리잡혀 있겠지. 읽어줄 사람도 없는 책을 쓰는 사람은 없으니까. 콩스탕스는 점점 밑줄에 관한한 박사가 되어가고 있다. 아니, 상상력이겠지. 이 밑줄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펜으로 그려졌을지를 똑똑히 상상해 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기질이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가 밑줄을 긋는 습관일지도 모르겠지만.

콩스탕스는 자신의 농락당하고 있다고 느낄 무렵에 밑줄들에 대해 다시 조립해보고 분석해 보지만 결론은 아리송하다. 그러다 다시 접하는 밑줄들은 분명하게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처지를 어쩜 그렇게 잘 알까? 이 책에 그 문장이 쓰여 있다는 것을 알고 밑줄을 그었을까? 아니면, 무슨 말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밑줄을 그었을까? 암튼, 그거야 중요하지 않겠지. 그녀가 지금 읽고 있는 밑줄이 자신에게 이야기 하고 있으니까.

이 소설은 책은 말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성공작이다. 끊임없이 독자를 향해 열려있고,독자로 하여금 해석되기를 기대하고 바라고 갈망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독자는 책을 읽으며 반응하고, 책은 독자의 시선을 통해 존재의의를 찾게 되는 것이고. 이를테면 해석학적 순환이 매우 잘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의 밑줄, 아탕뒤에 대한 해석까지 책을 읽으며 책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기다릴 줄 아는 자세에 대해 마무리하며 소설을 마치고 있다. 작가에게 책은 끊임없는 독백이 아니라 대화인 셈이다. 콩스탕스의 내면 속에 쉴 새없이 속삭이며, 그의 영혼을 갈망케 하는 밑줄들.

책에 밑줄을 긋는 습관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긋고 있는 이 밑줄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읽힐지 생각해 본다면, 아무대나 아무 의미없이 밑줄을 긋진 않으리라.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되고, 밑줄을 그은 다음 다시 반추해 보고. 글읽기가 더욱 풍성해 질 것 같은 느낌.

나는 이 책을 읽은 후로 오히려 더 많은 줄을 긋게 되었다. 책은 언제나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것 같고, 나는 너무 조금밖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같아 조바심이 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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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새와 카바리아 나무 웅진책마을 13
손춘익 지음 / 웅진주니어 / 199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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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환경회담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리우에서 카바리아 나무가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도도새와 카바리아나무, 스모호 추장은 영영 잊혀진 과거가 될 수도 있을뻔했다. 지나가 버린 기억들을 되새기는 것은 엄청난 상처를 불러오는 일임과 동시에 현재 잊고 살아가는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일이 된다. 하여, 지난 기억을 되불러오는 것은 현재에 대한 긴장감 높은 투쟁이 된다.

“나는 이 땅의 주인 인디오 추장 스모호다. 침략자들은 잔인무도하다. 그들은 하늘과 땅을 모르는 무법자들이다. 그들은 아름다운 도도새를 사라지게 했다. 도도새가 사라지면 카바리아 나무도 씨가 마른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그 뿐인가? 그들은 우리 인디오를 노예처럼 부리고 학살했다. 미리 일러 두거니와 침략자들이 땅과 숲에 저지른 만행은 반드시 먼 뒷날 큰 재앙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만일 이 카바리아 나무가 끝내 살아남지 못한다면 지구는 머잖아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

리우에 단 한 그루밖에 남지 않았던 카바리아 나무는 그 땅에서 숲을 이루고 살았었다. 도도새들은 이 숲에 함께 살았다. 카바리아 나무는 딱딱한 껍질을 소화시켜 싹이 나게 해주는 도도새가 꼭 필요했고, 도도새는 깃들어 살 수 있는 숲이 꼭 필요했다. 이것을 스모호 추장은 잘 알고 있었고. 하지만, 어느 날엔가 포르투칼의 침략자들이 카바리아 숲에 불을 지르고 농장으로 삼더니, 아름다운 새 도도새를 잡아들였다. 한 쪽만 있어서는 살 수 없는 그들이었기에 둘은 멸종되는 길 밖엔 없었다. 그 불행의 와중에 딱 한 그루 카바리아 나무가 살아남았고, 스모호 추장은 위의 글을 그 나무에 새겨 놓았다. 무려 400년 동안, 이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해 카바리아 나무는 생존해 왔던 것이다.

이 동화책엔 여러 이야기들이 모여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최소한 올바르다는 것은 건조하지만, 변화의 힘이 있고, 가슴 아프지만 무관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영한다. 아이들에게 올바로 읽히는 것은 아이들에게 올바른 삶의 기초를 만드는 일이다.

TV에서 보이는 걸프전의 불꽃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꽃놀이로 보였겠지만, 작가에게는 걸프 만을 시커멓데 오염시키고 갈매기가 이 기름밭에 죽어가는 모습으로 비쳐진다. 아이들의 눈에 화려했을 전쟁이 실상은 가장 잔인하고 가슴 아픈 현장이란 것을 작가는 조금도 놓치지 않고 ‘하느님의 눈물’을 통해 보여준다. 외딴 바위섬에 홀로 살던 등대지기 아저씨와 양과의 만남 속에서는 외로운 사람과 자연이 만나 하나가 되어야 함을 ‘외딴 바위섬’에서는 이야기한다.

<도도새와 카바리아 나무>에 실린 동화들은 이렇듯 자연과 따뜻한 만남, 회복을 그리고 있다. 아이들에게 왕자와 공주의 힘만 보여주고 싶지 않다면 꼭 읽혀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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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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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속에 명료하게 드러난 바깥세상은 사실 나에겐 맨날맨날 낯설어. 너무 무서워서 겁두 나구, 나 한테 적의를 품고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아서 괜히 긴장하는 게 피곤하기도 하구.' 영빈의 초등학교 동창 현금의 이야기. 늘 바쁘게 살면서 이것 저것 당장에 눈 앞에 급한 것들을 치우고 나서 언제 여유라도 있었을까 되돌아 보면, 또 그만큼 쫓겨 왔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떻게인지도 모르지만 쫓기고 쫓겨서 여기까지 왔다. 명료하게 드러난 세상의 모습에 비쳐진 내 모습은 너무 흐릿하고 불분명하다. 마치 떨어뜨리기 위해 시험을 치는 것처럼 불안하고 힘든 시험을 치루는 듯 하다. 문득 문득 덤벼드는 실존의 고민과 아픔은 잊고 싶다. 종종 잊어 버리고 싶다.

'나는 남편을 위해 먹을 것도 만들기가 싫다는 걸 알아낸 것은 그보다 훨씬 뒤였다' 현금의 전남편은 현금에게 집밥이 먹고 먹고 아우성을 쳤다. 가정부가 해 준 밥은 집밥이 아니라고 우기는 현금에게 그건 하숙집밥이라고 했다. 벅차디 벅찬 세상 살이에 현금의 전 남편이 원했던 건 그런 것이다. 따뜻한 밥, 사랑하는 사람이 정성스럽게 만들어서 차린 밥. 그건 남자고 여자고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을 느껴보고 싶고, 그런 느낌을 서로에게 주고 싶은 것이다. 현금은 알게 된 것이다. 팔려가듯 간 남편에게 주고 싶은 사랑이란 없었음을.

단 하루도 사람이 안 태어나거나 안 죽는 날은 없다. 영빈이 치킨 박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뒤늦게서야 깨달은 진실이다. 언제 어디서고 도처에서 이름도 모르고 왜인지도 모르지만, 죽고 태어나고를 반복한다. 무한하다 싶을 정도로 열려 있는 세계이지만, 그 죽음과 탄생이 나와 연관되었을 때에서야 나는 느낀다. 누군가 죽었다고, 누군가 태어났다고. 내 아픔이 시작된다. 내 기쁨이 시작된다. 하지만,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누군가의 죽음과 탄생은 그저 그런 일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사람들은 죽어가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사는 것 자체가 농담같은 건 아닐까? 나 한테만 심각하게 닥쳐올 뿐이지 타인들에게 진담으로 여겨지는 일들도 아닐텐데.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다가 끝에는 우리 모두 가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로. 하지만, 누군가에게 따뜻한 집밥을 차려주고 싶듯, 오늘은 사랑하고 싶다.


영빈에게 남겨진 현금의 기억, 그녀가 불쑥 내밀던 빨간 혀에 대한 기억은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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