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빛 속에 명료하게 드러난 바깥세상은 사실 나에겐 맨날맨날 낯설어. 너무 무서워서 겁두 나구, 나 한테 적의를 품고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아서 괜히 긴장하는 게 피곤하기도 하구.' 영빈의 초등학교 동창 현금의 이야기. 늘 바쁘게 살면서 이것 저것 당장에 눈 앞에 급한 것들을 치우고 나서 언제 여유라도 있었을까 되돌아 보면, 또 그만큼 쫓겨 왔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떻게인지도 모르지만 쫓기고 쫓겨서 여기까지 왔다. 명료하게 드러난 세상의 모습에 비쳐진 내 모습은 너무 흐릿하고 불분명하다. 마치 떨어뜨리기 위해 시험을 치는 것처럼 불안하고 힘든 시험을 치루는 듯 하다. 문득 문득 덤벼드는 실존의 고민과 아픔은 잊고 싶다. 종종 잊어 버리고 싶다.

'나는 남편을 위해 먹을 것도 만들기가 싫다는 걸 알아낸 것은 그보다 훨씬 뒤였다' 현금의 전남편은 현금에게 집밥이 먹고 먹고 아우성을 쳤다. 가정부가 해 준 밥은 집밥이 아니라고 우기는 현금에게 그건 하숙집밥이라고 했다. 벅차디 벅찬 세상 살이에 현금의 전 남편이 원했던 건 그런 것이다. 따뜻한 밥, 사랑하는 사람이 정성스럽게 만들어서 차린 밥. 그건 남자고 여자고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을 느껴보고 싶고, 그런 느낌을 서로에게 주고 싶은 것이다. 현금은 알게 된 것이다. 팔려가듯 간 남편에게 주고 싶은 사랑이란 없었음을.

단 하루도 사람이 안 태어나거나 안 죽는 날은 없다. 영빈이 치킨 박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뒤늦게서야 깨달은 진실이다. 언제 어디서고 도처에서 이름도 모르고 왜인지도 모르지만, 죽고 태어나고를 반복한다. 무한하다 싶을 정도로 열려 있는 세계이지만, 그 죽음과 탄생이 나와 연관되었을 때에서야 나는 느낀다. 누군가 죽었다고, 누군가 태어났다고. 내 아픔이 시작된다. 내 기쁨이 시작된다. 하지만,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누군가의 죽음과 탄생은 그저 그런 일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사람들은 죽어가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사는 것 자체가 농담같은 건 아닐까? 나 한테만 심각하게 닥쳐올 뿐이지 타인들에게 진담으로 여겨지는 일들도 아닐텐데.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다가 끝에는 우리 모두 가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로. 하지만, 누군가에게 따뜻한 집밥을 차려주고 싶듯, 오늘은 사랑하고 싶다.


영빈에게 남겨진 현금의 기억, 그녀가 불쑥 내밀던 빨간 혀에 대한 기억은 끝이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