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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 벌레 이야기
이청준 지음, 최규석 그림 / 열림원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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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guess that she thinks like this...

평온한 얼굴을 하고 나를 맞이한 유괴범의 얼굴에서 내 사랑하는 아이를 죽였던 그런 살인적인 눈빛이 아니다. 그는 이미 딴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어딘가 잘못되어졌다. 내가 기대했던 모습으로 그는 앉아 있지 않았다. 

나는 가까스로 평온을 되찾았다. 아니 평온을 되찾은 것처럼 보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여전히 왜 내 아들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집사님도 그랬다. 모든것은 주님의 뜻이 있다고.  내가 용서를 해야지. 누가 용서 할 수가 있었어. 하느님은 날 이리도 많이 사랑하시는데 말이다. 용서를 구하러 가야 겠다. 그넘한테.

이건 내가 그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시혜이기 때문이다. 불쌍한 넘. 좀 있으면 사형장 이슬로 사라져 버릴- 아들을 죽인 당연한 댓가이다. 그런넘은 죽어도 싸다!- 내가 베풀 용서를 그는 분명 거절할 것이다. 왜? 그는 내 아들을 죽인 짐승만도 못한 넘이므로. 그런 넘이 신의 사랑이 신의 용서가 가당키나 해. 그런 넘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말한다는 것이 어찌보면 우스울 지도 모르겠다. 그런 악마같은 넘에게 하느님의 사랑은 불필요한 것이기에. 

면회날.
내가 생각했던 그는 살인를 저질렀던 눈빛도 아니다. 그는 발광하지도 내게 복수를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나를 저주하지도 않았다.
그는, 나에게 용서를 말했다. 그가 감히 그가. 나에게 용서를.
이 혼란을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지?
어떻게 저런 넘에게 신의 사랑이 가당키나 하고, 신의 용서가 가당키나 하는지 그를 만나고 온 지금 나는 미쳐 버릴 것 같다. 내가 얼마나 아팠는데, 내가 얼마나 죽을 만큼 미칠 것 같았는데, 신은 내 마음을 요만큼도 생각해 주지 않았다.

난 그를 용서할 수 없다. 아니 난 하느님을 용서할 수 없다. 하느님은 날 배신했다. 난 그 살인범보다 신에게서 배신감을 지을 수 없다.
그의 사형집행 날짜다. 라디오를 통해 그의 마지막 음성이 들려온다.
"나는 하느님의 품에 안겨 평화로운 마음으로 떠나가며, 그 자비가 희생자와 그 가족에게도 베풀어지기를 빌겠다."

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라디오를 집어 던졌다. 아니 주변에 있는 손에 잡히는 모든것은 다 던져 버렸다. 네가 뭔대! 감히 자비와 희생을 운운해! 이런 악마같은 새끼! 넌 그럴 자격이 없어. 넌 평생 저주와 욕을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구! 넌 내 아들을 죽인 살인마야!!
마지막 손에 잡힌 성경책을 찢어 던져 버린다. 그리고 소리쳤다. 확실히 존재하지 않은 무능력한 신에게!

"당신은 개나 소나 아무나 다 용서해 주는, 막 되쳐먹은,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한 아주 후진 신이군요. 당신은 내 아들을 죽인 그 유괴범과 마찬가지로 공범이군요. 그에게 용서를 줄 권리가 당신에게는 없다구요!"

i guess that he thinks like this..

감옥에서 만난 김목사는 내게 성경책을 건넜다. 사형 집행을 언도받고, 난 이제 죽음의 날짜만을 세고 있다. 목사는 내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용서해 준다고 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것 마음이나 좀 편해야 하는것 아닌가.. 내가 죽인 남자아이의 엄마가 면회를 온다고 한다. 흠 그 사람이 왜 여기까지 올까? 내가 어떤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줘야 하지?
그래, 난 이미 하느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었다. 아들을 죽인 건 분명 잘못이지만, 이미 하느님은 날 용서했다고 했다. 목사도 그랬다.
그래서 그녀가 찾아온다고 하도, 별로 할 말이 없을 것 같다.하느님이 이미 나를 용서해 주었는데 말이다. 그녀가 날 찾아와서 멱살을 잡고 욕을 해도 난 이미 용서 받았잖아. 어차피 난 죽는 몸인데. 오늘밤 읽은 구절은 십자가에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신 그 부분이다. 신을 믿는다는 것이 참 편안하군. 천국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있다면  이제 천국에 가겠군.

그녀가 왔다.
그녀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말했다. " 전 이미 주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어요."
그녀는 침묵한다. 그녀와 나와의 면회는 짧았다.
난 그녀의 아들을 죽였지만, 그건 내 실수였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그러나 지금은 그것 조차도 모두 하느님이 용서했다.  나의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 말을 남기라고 한다. 무슨말을 해야 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비난 없이 갈 수 있지? 그래 예수가 말했던 것 처럼 사랑과 자비를 말해야 겠다.   "나는 하느님의 품에 안겨 평화로운 마음으로 떠나가며, 그 자비가 희생자와 가족에게도 베풀어지기를 희망하겠다. " 
유괴범의 용서에는 진정한 용서의 행위가 깃들여 있지 않았다.
용서란 자신의 행한 일이 없어지는 일이 아니다. 용서란 덮는 행위가 아니다. 용서란 우월자의 입장에서 서는 건 더더욱 아니다.
특히 살인범의 신의 용서의 개념은 아주 잘 못 되어진 것이다. 그가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은 원죄에 대한 용서이지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용서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살인까지도 용서받았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그는 여자에게 비수를 한번 더 꽂는다. 그의 입장에서 신의 자비란 자신의 원죄를 용서받은 것에 대한 개인적인 구원의 자비일 뿐이다. 그는 오버했다. 그는 용서를 오도했다. 그는 자신이 신의 입장이 될려고 했다. 그는 그녀에게 용서를 구할 입장은 맞았어도, 그녀에게 자비와 용서의 시혜를 베풀 입장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그녀에 대한 진정한 용서구함은 눈물이 되었어야 했다. 그가 그저 그녀 앞에 울기만 했다면 그녀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지 않았으리라. 그가 신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녀에게 용서를 말했던 것은 몰염치 했으며, 뻔뻔스럽기 까지 했다.

여자의 용서는 안타깝지만 벌레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그를 용서하고자 갔던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런 살인범의 얼굴에서 분노와 미움과 살인적 광기를 다시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유괴범은 자신이 생각했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힘들었고, 아팠고, 괴로웠다.
자신이 원했던 대로 그는 되어있지 않았고, 그는 너무 뻔뻔스러웠다. 너무 잘 지내고 있었다. 그건 그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피해자 입장에서 가해자가 너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우리는 너무나 많이 봤다. 그가 용서를 구했을 때, 그녀는 그 용서를 아들에 대한 용서까지도 하느님이 용서했다고 착각했다. 그녀가 만약 그의 용서가 원죄에 대한 용서만이었다라고 생각했다면 그녀를 자살까지 몰고 가지는 않았으리라.
내가 용서하지도 않은 사람을 신이 먼저 용서했다고 지껄이는 인간이 있다면 밀양의 여자가 그랬던 것  처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인간의 본질적인 이기적인 내면인 것이다. 여자가 집사한테 말한 부분에 그래서 상당부분 공감이 갔다. 그러나 그녀 역시 유괴범과  마찬가지로 신의 영역까지 침범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용서를 하지 못했다. 현실은 그가 이미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는 뒤 였는데, 그녀는 너무 성급하게 신의 용서를 꺼내 버렸다. 그래서 막상 현실적인 상황에 맞닥트렸을 때, 그녀는 어설픈 용서와 냉정한 현실에서의 갭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치기에 충분한 상황이 되어진 것이다.
그녀는 먼저 자신의 미움과 자신의 분노를 떠내 보냈어야 했다. 그를 어설프게 껴안고자 했던, 용서하고자 했던 그녀의 우월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 시킨 것이다. 


 

 자신 에게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삶의 짐을 진 사람을 용서하는것이 쉬운 일인가? 가슴 속 깊이 까지 타들어가는 절망을 느낀 적이 있는가?   그 사람은 자비와 평화의 얼굴로 신 앞에 나가 미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린다. 예전에 서로에게 준 상처와 모진 마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렇게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것이 해결 되어질 것이고, 예전일은 아물테니 말이다. 흉터와 상처는 남겠지만 더 이상 그 상처와 흉터는 아프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 할 수 없는 상황에 용서를 구해야 상황이 온다면? 
덜 아팠던 사람이 용서를 구해야 하는것인가? 더 많이 미안했던 사람이 용서를 먼저 말해야 하는가? 아님 더 죄책감과 자괴감을 가진 사람이 용서를 구해야 하는가? 셋다 아닐 것이다.
용서란, 나를 위한 것이기에.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과거의 아픈 기억으로부터, 분노로부터, 상처로부터 나아갈 수 없으므로.  분노와 상처와 아픈 기억만을 안고 살아가기에는 삶이 너무 짧고 찰라와 같으므로..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영역은 따로있다. 인간의 영역이 따로 있듯이. 그 영역을 혼동하다 보면 유괴범과 여자 같은 용서의 본질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벌레이야기에 여자는 자살을 택한다. 밀양에서 여자는 다시금 살아간다. 꾸역꾸역... 
용서를 거절한 인간도, 용서를 구한 인간도 꾸역꾸역 살아가야 하니깐.
그 사람이 용서를 거부한들, 그 사람 인생이 절딴 나는것도 아니니깐. 다들 꾸역꾸역 살아갈 테니깐. 그 사람은 먹고, 자구, 또 살아갈테니깐. 그리고 잊을테니깐..

용서를 안 받는다고 해서, 미안함을 거절했다고 해서 내 인생이 예전의 평범했던 그것으로 다시 돌아오지도 않을텐데 말이다. 아파서 가슴을 쥐어뜯고,  굵은 눈물줄기를 뚝뚝 떨어트려도, 하늘을 바라보며 당신이 맘에 안든다고! 당신은 내 삶을 이렇게 해주면 안되었다고 대들고 따져도 모든것을 예전으로 돌려 놓으라고 소리쳐도 잘못은 내게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내가 후회할 행동에 영향을 끼친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분께 할 수 있는 일은 내 삶을 그전으로 돌려놓으라고 땡깡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날 받아주신 그것에 대해서 고마워 해야 하는 것이다.

나야 말로 그분 앞에 용서 받을 수 없는 사람이지 않은가?!
나의 한계를 나의 현실를 받아들이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은 내려놓는 것이다.  그것이 내 삶을 이해하는 일이되어지며, 내 삶을 내 스스로 용서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사람을 용서해 주는 일이 될테니깐.
그게 인생이니깐 말이다. 

사람하나 제대로 용서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신의 구원을 말하고, 신의 자비를 말하고, 주일마다 미사 혹은 예배를 드리고 어려운 이웃을 향해 봉사활동을 하는 행위들..  이럴때 인간이란 본질이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흔번씩 일곱번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겐 너무 어려운 가르침 처럼 보여진다. 예수그리스도를 올곳이 믿는 것은 그래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할련다.
그게 삶이니깐. 상대방이 용서를 거부한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내 영역이 아니므로. 그러나 용서를 구했다고 끝낼일은 아니다.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용서는 상대방의 화해가 있을 때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용서란 있을 수 없기에..
그러나 용서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다 할때까지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머리를 망친 머리를 자신이 다시 거울을 보며 짜른 전도연 처럼 말이다....


"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가야 하고 사람으로서 갈 수 밖에 없는 길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람에겐 사람으로서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page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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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10-26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님 잘 읽었습니다. 전 영화를 본 후 이 책을 읽었는데
섬뜩한 감동이 있었어요. 사람이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 할 수 없는 일.
신에 대한 도전장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로 들리기도 해요.^^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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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전에 신학대를 다닐때 내가 좋아했던 강사님이 신학생이라면 한번정도는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의 책을 읽으라는 권유를 받았다. 당시에 나는 나 나름대로 믿음이 holy 스럽다고 믿었던 사람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실상 내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아닌, 내가 세운 나름대로의 신념체계다는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 믿음은 마치 모래성과도 같이 한번에 무너져 내렸다.
내 신념이라는 것이 그렇게 가볍고, 바람같았던지. 내 신념을 포기하는 일이 그토록 쉬운일인지는 몰랐다.

나는 신학대를 떠남과 동시에 교회도 홀가분(?) 하게 떠났다. 그러나  가끔 내 삶이 어렵거나 지칠때면 난 참 뻔뻔스럽게도 하나님을 찾았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될 그 즈음에는 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다시 하나님을 찾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나에게 마치 지니의 요술램프 같은 그런 존재였으므로.

2.

누구나 한번정도는 살아가면서 의문을 품었을 만한 "신은 존재하는가?" 란 물음.
이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한번정도는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정도는 신의 존재의 유무 때문에 친구들과 혹은 사람들과 싸워본 경험정도는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결론은 늘상 나지 않는다. 신을 본 사람이 없으므로.
10년이 흐른 지금에 나는 왜 러셀의 이 책을 사서 읽게 되었을까? 그건 지금 내가 "신은 존재하는가?"란 물음을 심각하게 던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물음은 존재론적인 것이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상황은 겪게 된다.  테레사 수녀 역시 믿음을 부정한것이 아닌, 존재론적 고백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신의 존재 유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고자 애쓰는 과정이 아닌,- 과학도 일종의 신념체계이다. 과학이 정확하다고 하는것은 극장의 우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들은 왜 신이 없다고를 말하는것일까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표적 무신론자 두 명인 러셀과 도킨스 책을 주저없이 산 이유가 되기도 한다.

3.

러셀은 말하기를

" 종교의 일차적인 주요한 기반은 두려움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여러분이 온갖 곤경이나 반목에 처해있을 때 여러분 편이 되어줄 큰 형님이 있다고 느끼고 싶은 갈망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모든것이 기초다"
마르크스의 딸과 결혼한 러셀의 이와 같은 주장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마르크스 역시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말했으니까. 러셀의 주장은 마르크스의 종교 해악설과 그 맥을 같이 한다.
( 마르크스의 종교(기독교)의 비판의 토대는 종교는 현실을 옳바르게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는 민중의 아편과도 같다고 한다. 아편은 일시적인 쾌락이외에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오히려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든다. 막스는 종교가 이와 같다고 한다.  그래서 민중의 헛된 행복으로서의 종교를 억압하는 것은 곧 민중의 참 행복을 위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위안거리 없이 속되게 사슬을 차고 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사슬을 떨쳐 버리고 살아있는 꽃을 꺽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당시 민중(프로렐타리아/ 브르조아와는 반대 급무세력) 들의 삶은 피폐하고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노동자들은 살기 위해 마치 상품처럼 자신들을 팔았어야 했고, 그들이 받는 급료는 기계화가 그들의 노동가치를 저하시키는 만큼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소수(브르조아/ 유산계급) 가 절대 다수를 억압하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했어야 하는데 막스는 이때 프로렐타리아가 단합하고 노동자들이 당을 만들어 단합할 것을 주장한다.  막스의 살아온 행적과 그의 지적 사유과정, 당시의 시대상황들을  종합적으로 보면 왜 종교가 아편이었다고 말했는지 이해가 간다. )

내가 이 부분에 밑줄을 그은 이유는 두려움이라는 말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신을 믿던 안 믿던 어떤 대상에 두려움이 있다. 그 두려움은 내적으로 올 수도 있고, 외적으로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요즘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도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과거에 대한 두려웠던 기억부터 현실에 대한 현실적 문제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등.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그래서 종교와 두려움과 함께 가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내어쫒고자 종교를 믿을 수도 있고, 내가 지옥불로 가게 되는 건 아닌지 하는 두려움으로 인해 신을 믿을 수도 있으니까.
이럴때 종교는 사람들을 향한 두려움에 대한 협박이다. 두려움을 없애고자 신을 믿을 수도 있고, 두려움을 받지 않고자 신을 믿을 수도 있으므로.  믿던 안믿던 두려움은 동시에 존재한다. 

4.

종교-기독교/ 하나님을 배제시킴-의 기능이 순기능이었던 것만은 아니기에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십자군 전쟁이나 마녀 사냥 그리고 지금의 미국의 네오콘자들에 의해서 벌어진  전쟁까지. 지금도 분쟁중인 수 많은 국가들중에 -크고 작건- 종교의 이름을 가지고 벌어지는 전쟁은 무수히 많다. 서로들 자신들의 종교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들의 종교가 정의라고 부르짖는다. 이럴때 자신들의 믿는 신(종교)은 정의가 되는 것이며, 정의는 모든것을 정당화 시킨다. 이슬람의 성전이 그 좋은 예가 되며, 기독교의 우월적 승자주의식 선교형태(정확하게 말한다면 미국식의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 전쟁들이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 되어진다. 여기서 하나님의 역할은 구경꾼이나 이신론에 불과하며 단지 하나님을 배제시킨 종교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종교들은 말한다.   신의 정의를 위해!

러셀은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가 신을 부정했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그 역시 그는 자신이 무신론자 라기보다는 불가지론자라고 했으니까.
신이 속시원하게 우리 앞에 나타나 " 나 여기 있소"를 보여준다면 현재 무신론자, 유신론자 ,불가지론자 등의 논쟁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텐데 그분은 아마도 이 지구가 끝나는 날까지 그분의 존재를 쉽사리 들어낼 것 같지는 않으시다.

5.

이 책은 무신론자인 사람보다는 나 처럼 유신론자인 사람이 읽어야 더 유익한 책인듯 하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근저인 선과 악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분법적인 관점이 아닌- 기독교가 아니면 악-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은 근본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잣대만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하든 그렇지 않던 하나님 만큼 이 세상에서 관심의 대상이 또 어디있으며 인간의 각종 주제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아마 하나님에 대한 논쟁은 이 인류가 끝나는 그때까지 지속 될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논리와 이론을 만들어서 책을 내고- 팔아먹고-( 그렇게 본다면 그들도 하나님 이름을 팔아서 돈을 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강연을 하고 강의를 하고,  반대편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난 러셀처럼 나는 왜 기독교인가 라는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얘기하지는 못하겠다. 믿음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경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중에는 믿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놓은 책이 아주 많다. 그럼에도 왜 나는 기독교인이가를 얘기해야 한다면, 나는 내 존재와 실존에 대한 나 스스로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디서 부터 왔으며 나는 어디로 가는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내 이드, 에고, 수퍼에고는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믿을 수 밖에 없다. 이는 내 실존에 대한 긍정의 답변이 되기 때문이다.  

6.

내가 만약 신을 알지 못했다면- 혹 믿지 않았다면- 난 러셀보다 더한 지독한 무신론자가 되어졌을 듯 하다. 러셀의 이 말은 마치 하나님을 믿는 C.S 루이스가 한 말 같기도 하다.


"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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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9-01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갱지 2015-05-30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니 글 쓴 분께서 무신론자가 되셨을 확률은 0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 하라
래리 크랩 지음, 윤난영 옮김 / 두란노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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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의 고백...
이 말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기를...

우리들이 이때까지 선함이고, 옳은길이라 굳건히 믿었던 것이 오히려 사단의 참소였고, 하나님 앞에 전혀 반대였다면?
개발서류의 신앙서적이 남무하고, 긍정의 힘류의 책들이 힘을 받는것이 어찌보면 참 슬픈일이다.

10년전에 종로서적에서 사지 않고 서서 읽었던 버트런 러쉘의 "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의 책이 더 개발신앙책(?) 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정말로 하나님 앞에 좀 제대로 살고 싶다고 맘 먹은 사람들은 꼭 읽어야 할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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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또 읽고
GOD - 갓. 하나님 규장 A. W. 토저 마이티 시리즈 9
A. W. 토저 지음, 이용복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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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하나님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토저가 자신의 하나님의 지식을 모두 담아낸 <GOD>.

너무 바쁘지 않으면 난 꼭 서점에 들린다.온라인 보다는 오프라인- 서점- 에서 책을 골라 읽는것을 더 선호하는 나.  한달에 한번씩은 시간을 내서라도 요즘은 꼭 서점을 들린다. 매주 세째주 토요일은 무슨일이 있더라도 영풍문고에 들린다. 책을 사던 안사던 서점으로의 발걸음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모든 책을 다 살수는 없는 노릇이라 걔중엔 꼭 집 책장에 꽂아 놓지 않아도 될 법한 책들은 그자리에 선 채로 읽는다. 그리고 정말로 사고 싶은 책만 산다.. 그게 오프라인 서적의 매력이니까 말이다.

전병욱 목사님이 신학대학원 시절 자신의 파트타임으로 번 150만원 전부를 책 300권을 샀다고 했는데..  나는 그 축에는 못 끼지만 내 수입의 10%는 적어도 책 사는곳에 투자하고 있으니 10년후 내 책장에도 수 많은 나의 손때묻는 책들이 있겠지. 

 종로서적이 폐장된 이후로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기게된 영풍문고. 실은 살짝 비쌌다. 거의 2만원에 근접한 책이었으니깐.

붉은색의 겉 표지- 흡싸 마르크스를 연상시키는. 그러나 나는 왠지 붉은책 표지가 너무 맘에 들었다. 나는 뭐 레드컴프렉스같은건 없으니-가 유독 눈에 들어왔는데, 얼마전에 나가보니 붉은책의 겉표지는 이렇듯 산듯하게(?) 바뀌었다. 아직 한국인에게 붉은책 표지는 금기아닌 금기일까?

각설하고.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람의 모든것을 알고 싶어한다. 내가 이 책을 주저없이 산 이유중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난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는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께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찬양하면서도 정작 나는 그 분에 대해 아는것이 별로 없었다. 정말로 두꺼운 책이다. 그러나 두꺼운 것 만큼 그 안에는 두꺼운 하나님에 대한 본질 성품등이 정말로 잘 나열되어져 있다.

토저는 말하기를 오늘날 경박해진 기독교는 사람들이 예배로부터 멀어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제까지 우리가 이룬 것들은 모두 "외적인 것"이라고 일침을 가한다.

반면 내적인 것들, 하나님의 위엄, 예배, 장엄함, 영성, 하나님의 임재, 경외심 그리고 영적기쁨을 현대 기독교인들이 잃어버렸다고 한다. 하나님을 싸구려 신으로 전략시킨 책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행여 내가 이때까지 느꼈던 하나님은 단순히 내 상한마음만을 위로해 주고, 내 산적해진 고민만을 해결해주는 해결사만은 아니었던지.

그 안에 그분에 대한 어떠한 외경함이나 존귀함 없이 나 조차도 하나님을 단순히 알라딘의 램프의 요술같이 내 소원만 들어주는 그런분으로 끌어내린건 아니었는지..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정말로 묻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주저없이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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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내려놓음 -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결심 이용규 저서 시리즈
이용규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하버드를 졸업하고 몽골로 날아간 평신도 선교사.

한국에 와서 가장 처음으로 집어들었던 책 중의 하나다.
영국에서 제대로 한글로 된 책과 접하지 못한 나로써 한국에서 가장 행복했던 일 중의 하나가 한글로 된 -그것도 저렴한- 책들을 맘껏 접한 일중의 하나다. 

이 책은 내것을 비우고 하나님것으로 채우게 될때 하나님께서 인생의 삶을 채워주시는 일종의 신앙고백 책이다.

실은 힘들다. 자신의 기득권, 욕심, 재능, 물질등.. 자신이 가지고 있는것을 내려놓는다는 말이다. 한발은 세상에 한발은 하나님께 양다리 걸치며 살고 있는 인생들이 많다. 나도 그 중 한사람 중에 속한다. 내가 하나님께 모든걸 내려놓았을 때의 왠지 모를 손해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많지도 않은 내껄 포기했을 때 알 수 없는 집착들.

 

난 요즘 그걸 연습중이다.

혹시 내 안에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것들이 있다면 내려놓기로 말이다. 아직 실은 많이 서툴다.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 그것도 구분 못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난 믿음이 그렇게 holy 스럽지 못하다. 예전에 신학대 다닐때 친한 친구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너랑 신이랑은 왠지 안 어울려.." 그도 그렇것이 난 나름대로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학대를 가서 선교사가 되겠다는 결심이 서기도 하고. 그러나 나는 신학대에서 outside 였다. 그리고 내가 좋았다라고 믿었던 믿음이 얼마나 모래성과도 같은 것이었는지... 난 그래서 요즘도 믿음이 좋아? 나빠? 그런 질문을 가장 싫어한다. 믿음은 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은 유혹에서 빛을 발한다. 믿음을 test 하고 싶은가?

자신이 유혹당하고 있다는 순간. 명백히 이건 아니다라고 느끼는 순간에도 여전히 유혹 당하고 있다면, 여전히 유혹의 대상 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앞에서 여전히 흔들리는 사람인 것이다. 난 하루에 열두번씩 흔들린다. 또 다시 무릎이다. 반복되지만, 이게 또 나인 듯 하다.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인생에 있어 가장 무서운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난 주저없이 대답할 듯 하다. "하나님 없는 삶."

난 그게 가장 무섭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은 없을테니깐. 그럼 삶이 너무나 절망스러울 테니깐. 날 지지해주고, 날 응원해주고, 내 모습이 어떠하던지 이 모습 이대로 받아주는 분이 이 지구에 존재치 않는다면 정말로 삶이 무서울 듯 하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나님안에서 자유자이고 싶다. 그렇게 살고 싶다. 그렇게 feel free로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 여전히 당신과 저는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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