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살아서는 평생을 가난한 자들의 편에 살았고 죽어서는 성자로 추앙받는 마데테레사의 공개된 40여통의 편지엔 다음과 같은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예수님은 특별히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마더 테레사 편지가 공개된 후 신은 있은 과연 있는 것일까라는 회의적인 물음에 아마 무신론자들은 회심의 미소를 보냈는지는도 모르겠다.
내용이야 어떻든 신의 부재를 경험했던 테레사의 고민이 얼마나 깊었을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그것도 평생을 걸쳐 오직 타인을 위해 삶을 살았던 그녀에게서 조차도 신의 현존은 실존의 물음보다 더욱더 고통스러운 것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이해인 수녀 역시 " 정말 그분이 계실까란 생각이 들었다'라고 고백했다. 이해인 수녀는 또한 우리에게 어떠한 존재인가? 내가 이해인 수녀의 책을 처음 접한것은 고등학교때 정도.. 그녀의 꾸미지 않은 해맑은 책을 읽으면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그녀의 신앙은 정말로 닮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였다.
2.
탈레반에 붙잡혔던 19명의 인질이 풀렸났다. 그들이 선교를 했건, 봉사를 했건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협상을 벌인 탈레반들은 비난 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이슬람 그들 편에서는 미국은 자신들의 나라를 질밟은 제국주의 정복자 그 이상의 의미도 없기에 자신들의 행동들은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 되어진다. 자신의 땅에 허락없이 들어온 사람들을 내쫒겠다는데 그 누가 그들을 비난 할 수가 있겠는가? 물론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미국 그 자체가 선이기에 탈레반에 대한 다른 판단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탈레반은 악의 세력 그이상도 아니기 때문에. 여튼, 그들편에서는 그들의 일은 성전(성스러운 전쟁) 즉 독립전쟁일 뿐이다.
3.
누리꾼들이 물을 만났다. 가뜩이나 개독교가 싫어 죽을 것 같은데, 이때다 싶었나 보다. 그들은 봉사로 간게 아니예요. 선교죠 그건 정말로 애교썩인 댓글이다. 죽어라! 죽어도 싸다!는 막발이 서슴없이 오고간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너희를 천국으로 인도해줄테니 뭐가 걱정이냐는 비아냥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비물질적인 가치를 향한 그들 개인의 열정과 헌신까지 광신도와 철없는 개신교인들이 치기어린 행동이라고 폄훼하고 비난하며 무차별적인 인신공격과 파쇼적인 댓글들은 광란의 말 잔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도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설령 그들이 죽기를 각오한 유서를 쓰고 그곳에 갔다 한들 죽음앞에서는 한 없이 약해지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난 섬뜩한 댓글들을 읽을 자신이 실은 없었다. 내가 마치 온갖 욕설을 다 먹고 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4.
마데테러사나, 이해인 수녀, 그리고 필립얀시, 래리크랩등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내어놓은 명제가 하나 있다. "하나님은 나에게 부재중일 때가 많다."
나 처럼 믿음이 빈약한 사람들은 뭐라고 답을 해야할까?
그들에게서도 조차 신의 현존이 물음표일때가 많은데, 난 믿음을 포기하고 무신론자가 되어야 할 형편이다. 성인의 반열에 오른 그들에게서 조차 신이 부재하다니...
그러나 그들의 고백은 존재론적 고백 일 뿐이다. 신이 정말로 없어서 그들이 신이 없다!를 공개적으로 지지(?) 하는게 아닌란 말이다.
5.
때마침 한국 복음주의 교회의 문제점과 치부를 들어낸 책을 내어 놓았다. 이럴때 타이밍이 죽인다는 얘기를 해야 하는가?
1907년도 평양에서 일어났던 대부흥-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된,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미국 근본주의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된- 에 촛점을 맞춘다. 그리고 한국의 교회는 성장주의, 물질주의,도덕적 배타주의에 보수적(?)- 난 보수보단 수구의 의미를 사용하고 싶다- 길로 걸었다고 한다.
대부흥운동이 영적각성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 음주, 흡연, 제사등을 금하는 등 배타적인 도덕 운동으로 기울었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미국에서 맹위를 떨쳤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의 절대적 무오류, 개인의 회개와 정화, 세속과의 구별을 강조하면서 기독교를 편협한 도적 종교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일차원적인 도적주의는 오늘까지 목회자들로 하여금 일반 신자들을 정죄하고 일상의식을 지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평양 대부흥운동의 100주년을 맞이해서 보수적 개신교 교단에서는 여러가지 기념식이 한창이다. again 2007을 모토로 말이다.
그러나 어게인 2007은 참회는 없고 부흥(외적부흥)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참회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절대적 부정을 통해 새롭게 거듭나는 것을 의미하는데 현재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무엇을 참회하고 거듭나겠다는지에 구체적인 실체와 내용이 불분명하다고 지적한다.
작년에 처음으로 한국 개신교수가 줄었다고 한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 곳이라면 성당을 선택한 사람들이 많고, 개신교인 사람들조차 성당으로 옮긴 사례들이 많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교세 위축은 교회를 중심으로 벌어진 목회자들의 부정부패와 세습, 성추문, 교회 재정 비리, 비민주적이고 가부장적인 질서와 제도, 타종교를 악마시화는 사회적 공신력이 추락한 결과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번 탈레반 사태에 대한 누리꾼들이 배타적인 개신교에 대한 반응도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삼박자 복음이 난리를 치는 교회일수록 그 교회는 세력을 더해간다. 하나님만 믿으면 에브리띵 오케이를 외친 목사들은 승승 장구 한다. 하나님의 복은 내생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설파하는 교회일수록 그 교회가 집행하는 예배에는 앉을 자리가 없다. 복을 준다는데, 그것도 물질적인 복을 준다는데 그 복을 거부할 사람들이 어디있던가?!
주일 예배시간에 자신이 원하는 시간때에(1부에서 혹은 5부 6부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목사들이 축복해 주는 축복을 받으면 나도 언젠가는 박성수 처럼 130억의 십일조를 드릴 수 있을지 혹 누가 아는가? 아니면 말구.~!
더 승승장구하는 목사들은 삼일절날, 광복절날 무슨 무슨 철날 시청앞에 자신들의 교인들을 수천명씩 동원하여 서울 한복판에 성조기를 흔들며, 10만의 청중 앞에서 영어로 기도하는 그 목사님들이다. 설마 하나님은 한글을 이해 못해서 영어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더 정확하게 알아들으신다고 착각해 그런것인가?
아님 개신교를 한국에 전파해준 고맙고 은혜스러운 미국이라는 강한 나라의 하나님이 한국의 하나님도 된다는 아버지 나라에 대한 고마운 마음 때문인가?(이는 정확하게 말하자만 미국의 힘있는 권력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 기도였다. )
1960년대 이후 성장한 대부분의 대형교회들은 미국 교회의 성장과 관계된 형식이나 전략을 그대로 복사하여 미국식 설교, 기독교 음악, 설교예화, 성장모델을 재셍산 하는데 앞장서 왔다고 주장한다. 순복음 교회, 광림교회, 은혜와 진리교회, 온누리 교회, 지구촌 교회 같은 세계적 규모의 교회들은 수도권 신도시에 지교회를 설립해, 대기업 할인점들이 지역 중소상인을 고사시키듯이 지역교회의 뿌리를 흔들며 그들만의 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뉴라이트 운동 역시 기독교 복음주의 목사들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영적 각성과 내부 자성은 온데간데 없고 수구세력 한나라당과 같이 "잃어버린 10년"을 외치고 있다.
6.
그 복음주의의 목사님들은 신의 존재를 날마다 느끼며 정말로 힘있게 살고 계신듯 하다.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만 하면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오냐! 하고 나타나 한국을 좌파, 빨갱이들의 세력들로부터 구해주실 것이다. 그렇게 기도하는것이 그들의 부여받은 신성한 사명이고, 선지자의 역할이라고 굳게 믿는 듯 보여진다. 그래서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 이 모씨가 대선주자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하나님의 큰 복과 은혜가 된단 말인가?! 그들에게 있어 이모씨의 부정직함과 거짓은 아무것도 아니다.이모씨는 장로님이고 걔다가 서울까지 봉헌하지 않았던가?
하나님도 살짝 눈 감아 주실 테니까.
아니 그들은 이미 면죄부를 이모씨에게 부여해진듯 보여진다. 자신들이 말이 곧 하나님의 말이라는 구약시대의 제사장직 직분은 그들에게 있어 여전히 유효한 효력이 되기 때문이다.
목사=제사장의 신성불가침의 그들의 무소불의한 권력은 어느때보다 높다. 현재 개신교가 처한 부끄럽고, 경박한 종교다라는 현실은 무시한채 그들은 이 모든 개신교의 비판과 현실을 아주 가볍게 사탄의 역사(?) 내지는 악마가 준동하는 발악쯤으로 치부해 버린다.
목사는 직업이 아니므로 세금을 걷는것은 그들에 대한 모독이며, 기독교 대학들은 세상적인 법앞에 판단받을 만한 성질이 아니기에 사학법 개정은 악마의 법이 된다.
하여,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모씨를 대한민국 땅에 보내주셨고 이 대한민국을 좌파와 빨갱이 세력들로부터 구원해줄 꺼라 아주 굳게 믿는다. 평양 대부흥이 드디어 again 2007로 이제 머지 않아 눈앞에 펼쳐진듯 보여 진다. 하나님은 이모씨를 대한민국에 역사적 사명으로 불러주신 것이다! 대통령으로.
김영삼을 불러주셨던 것 처럼.
7.
2000년전 예수님은 약자의 편에 서 계셨다. 예수님은 철저히 아웃사이더인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셨고, 그가 부른 제자들 역시 정말로 볼 것 없는 그저 그런 필부들이셨다. 그분은 멋진 회당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닌 때론 벌판에서 예배를 하셨고, 죽은 나사로를 보며 눈물을 흘리셨다. 비싼 향유를 그 발에 뿌린 창녀인 마리아에게 "많이 사랑한 자는 많이 용서함을 받는다"는 말도 하셨다.
자신의 영혼의 관심이 많았던 부자청년이 예수님께로 나와서 "예수님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란 물음에 예수님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부자는 근심을 하고 돌아간다.
한국교회는 예수님이 계신가?
세계적으로 큰 교회가 한국에만 3개가 있다고 하는데. 으리으리한 성전만 지어놓고, 그 안에 예수님을 몰아낸 곳이 현재의 한국교회라면 도데체 내 종교가 개신교입니다라는것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기독교는 종교를 믿는 종교가 아니다.
주일마다 교회를 가는것 중요하다. 땅끝까지 선교하는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들이 단순한 도덕적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한 종교행위에 그친다면 이 종교 행위처럼 미친 짓이 또 있을까? 여전히 자신의 밥그릇과 기득권을 놓지 않는 그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시대적 사명이라고 한다. 시대적 사명은 그 누가 부여했단 말인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종을 욕하면 벌을 받는다는 그런 말도 안되는 얘기를 강대상에서 해대며 성도들을 협박한다. 그 협박에 순진무구한 성도들은 기름부은 그들을 대적하지 못한다. 분명히 잘못되었음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아픔, 세상적인 소외로 아픈 사람들을 위해 나서는 교회, 으리으리한 성전을 지을 돈으로 세상의 약자들을 돌보는 교회, 농민들과 같이 심각하게 FTA문제를 논의하는 교회, 그런 교회를 저 복음주의(보수주의) 교회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너무 큰 바램일까?
교회는 세상과는 담 쌓고 오직 개인의 구원에만 포커스를 맞춰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현재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더이상 무슨 무슨 절날 시청앞에 떼거지로 나와 반핵 반김을 외치며 성조기를 흔들며 부시를 위해 기도하는 일 따위도 당장 집어 치어야 한다.
저들 복음주의 교회의 말처럼 그들을 감싸고 함께하며 고민하는 것은 민중신학이며 좌파의 신학이며 악마의 준동에 놀아나는 일이 되는 것일까?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 한국의 개신교 여론을 주동하고 있는 몇몇 큰 교회들)들은 이웃과의 의사소통도 실패했지만, 하나님과의 의사소통도 이미 실패했다.
선교는 예수님 믿으세요! 라며 찌라시를 뿌리며 확성기 들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이 아니다. 선교는 예수님이 가장 확실하게 본을 보이셨다. 선교는 예수님 믿으세요란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저절로 묻어나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말한 교회의 청지기적 역할 빛과 소금인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는 물질을 얻고, 큰 건물의 교회를 얻고, 세속적 지위를 얻었을 지언정 그들은 예수님이 말한 빛과 소금의 영적인 능력, 내적인 능력은 잃어버렸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정하는 자들이 된 것이다. 성경에 보면 이런말씀이 있다. "내가 당신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기적도 행했고, 귀신도 물리쳤습니다. " 그때 예수님은 말한다. "나는 너를 모른다. " 혹시 하나님은 한국 교회를 향해서 "나는 너희 한국 교회를 모른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8.
나 역시 복음주의(근본주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다행히도 내가 다녔던 복음주의 교회들은 좀 덜 복음적이였던 듯 하다. 아님 내가 덜 근본주의자 였던가?!
그래서 나 역시 하나님의 복= 물질이라는 이원화된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목사님의 복을 주소서 혹은 축복해 주소서란 기도에 성도들은 크게 아멘으로 화답한다. 그 복은 곧 물질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 안에 나도 모르게 누적되어왔던 복=물질을 끊임없이 분리시켰다. 난 더이상 이제 복=물질이라는 개념을 도식화 하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하나님의 복이란 그분을 알아가는 일이다.
성자의 반열에 오른 분들도 신의 부재를 경험했는데 나는 어떻겠는가? 나 역시 신의 부재, 신의 침묵으로 인해 괴로웠다. 신은 정말로 있을까를 여전히 고민한다.
그러나 내가 신이 없다! 라며 도킨스처럼 자유함(?)을 누리게 될까? 그는 "만들어진 신"에서 장담하기를 기독교인이 자신의 책을 읽고 무신론자가 되면 그 보다 더한 기쁨이 없다고 했으니까. 아직 그의 책은 삼분의 일도 못 읽고 있으니-두껍기도 하고, 어렵기도 함- 다 읽고 나서 내가 역시 도킨스 말대로 신은 없다! 라고 손을 든다면 그의 책은 훌륭한 무신자 전도 홍보용 책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구한다.
한국의 개신교에서 빚어낸 승리주의, 성장주의, 물신주의의 탈을 쓰고 그것이 마치 진리인양, 복인양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세뇌시킨 종교가 아닌 정말로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고 따랐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현존을 의심했던- 그들의 삶의 궤적을 따르고 싶다.
정말로 그렇게 살고 싶다. 예수님과 함께 이 짧고 찰라와도 같은 세상에서.
나의 삶이 물질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닌, 그래서 이 세상의 안락과 일신의 영달을 위해 그분을 찾는 것이 아닌, 오직 그분을 찾는것이 나의 복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세상 가운데 가장 낮은자로 오셔서 그들의 삶에 관심과 애정을 보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이 조금이라도 실천되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