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 벌레 이야기
이청준 지음, 최규석 그림 / 열림원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i guess that she thinks like this...

평온한 얼굴을 하고 나를 맞이한 유괴범의 얼굴에서 내 사랑하는 아이를 죽였던 그런 살인적인 눈빛이 아니다. 그는 이미 딴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어딘가 잘못되어졌다. 내가 기대했던 모습으로 그는 앉아 있지 않았다. 

나는 가까스로 평온을 되찾았다. 아니 평온을 되찾은 것처럼 보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여전히 왜 내 아들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집사님도 그랬다. 모든것은 주님의 뜻이 있다고.  내가 용서를 해야지. 누가 용서 할 수가 있었어. 하느님은 날 이리도 많이 사랑하시는데 말이다. 용서를 구하러 가야 겠다. 그넘한테.

이건 내가 그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시혜이기 때문이다. 불쌍한 넘. 좀 있으면 사형장 이슬로 사라져 버릴- 아들을 죽인 당연한 댓가이다. 그런넘은 죽어도 싸다!- 내가 베풀 용서를 그는 분명 거절할 것이다. 왜? 그는 내 아들을 죽인 짐승만도 못한 넘이므로. 그런 넘이 신의 사랑이 신의 용서가 가당키나 해. 그런 넘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말한다는 것이 어찌보면 우스울 지도 모르겠다. 그런 악마같은 넘에게 하느님의 사랑은 불필요한 것이기에. 

면회날.
내가 생각했던 그는 살인를 저질렀던 눈빛도 아니다. 그는 발광하지도 내게 복수를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나를 저주하지도 않았다.
그는, 나에게 용서를 말했다. 그가 감히 그가. 나에게 용서를.
이 혼란을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지?
어떻게 저런 넘에게 신의 사랑이 가당키나 하고, 신의 용서가 가당키나 하는지 그를 만나고 온 지금 나는 미쳐 버릴 것 같다. 내가 얼마나 아팠는데, 내가 얼마나 죽을 만큼 미칠 것 같았는데, 신은 내 마음을 요만큼도 생각해 주지 않았다.

난 그를 용서할 수 없다. 아니 난 하느님을 용서할 수 없다. 하느님은 날 배신했다. 난 그 살인범보다 신에게서 배신감을 지을 수 없다.
그의 사형집행 날짜다. 라디오를 통해 그의 마지막 음성이 들려온다.
"나는 하느님의 품에 안겨 평화로운 마음으로 떠나가며, 그 자비가 희생자와 그 가족에게도 베풀어지기를 빌겠다."

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라디오를 집어 던졌다. 아니 주변에 있는 손에 잡히는 모든것은 다 던져 버렸다. 네가 뭔대! 감히 자비와 희생을 운운해! 이런 악마같은 새끼! 넌 그럴 자격이 없어. 넌 평생 저주와 욕을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구! 넌 내 아들을 죽인 살인마야!!
마지막 손에 잡힌 성경책을 찢어 던져 버린다. 그리고 소리쳤다. 확실히 존재하지 않은 무능력한 신에게!

"당신은 개나 소나 아무나 다 용서해 주는, 막 되쳐먹은,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한 아주 후진 신이군요. 당신은 내 아들을 죽인 그 유괴범과 마찬가지로 공범이군요. 그에게 용서를 줄 권리가 당신에게는 없다구요!"

i guess that he thinks like this..

감옥에서 만난 김목사는 내게 성경책을 건넜다. 사형 집행을 언도받고, 난 이제 죽음의 날짜만을 세고 있다. 목사는 내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용서해 준다고 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것 마음이나 좀 편해야 하는것 아닌가.. 내가 죽인 남자아이의 엄마가 면회를 온다고 한다. 흠 그 사람이 왜 여기까지 올까? 내가 어떤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줘야 하지?
그래, 난 이미 하느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었다. 아들을 죽인 건 분명 잘못이지만, 이미 하느님은 날 용서했다고 했다. 목사도 그랬다.
그래서 그녀가 찾아온다고 하도, 별로 할 말이 없을 것 같다.하느님이 이미 나를 용서해 주었는데 말이다. 그녀가 날 찾아와서 멱살을 잡고 욕을 해도 난 이미 용서 받았잖아. 어차피 난 죽는 몸인데. 오늘밤 읽은 구절은 십자가에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신 그 부분이다. 신을 믿는다는 것이 참 편안하군. 천국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있다면  이제 천국에 가겠군.

그녀가 왔다.
그녀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말했다. " 전 이미 주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어요."
그녀는 침묵한다. 그녀와 나와의 면회는 짧았다.
난 그녀의 아들을 죽였지만, 그건 내 실수였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그러나 지금은 그것 조차도 모두 하느님이 용서했다.  나의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 말을 남기라고 한다. 무슨말을 해야 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비난 없이 갈 수 있지? 그래 예수가 말했던 것 처럼 사랑과 자비를 말해야 겠다.   "나는 하느님의 품에 안겨 평화로운 마음으로 떠나가며, 그 자비가 희생자와 가족에게도 베풀어지기를 희망하겠다. " 
유괴범의 용서에는 진정한 용서의 행위가 깃들여 있지 않았다.
용서란 자신의 행한 일이 없어지는 일이 아니다. 용서란 덮는 행위가 아니다. 용서란 우월자의 입장에서 서는 건 더더욱 아니다.
특히 살인범의 신의 용서의 개념은 아주 잘 못 되어진 것이다. 그가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은 원죄에 대한 용서이지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용서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살인까지도 용서받았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그는 여자에게 비수를 한번 더 꽂는다. 그의 입장에서 신의 자비란 자신의 원죄를 용서받은 것에 대한 개인적인 구원의 자비일 뿐이다. 그는 오버했다. 그는 용서를 오도했다. 그는 자신이 신의 입장이 될려고 했다. 그는 그녀에게 용서를 구할 입장은 맞았어도, 그녀에게 자비와 용서의 시혜를 베풀 입장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그녀에 대한 진정한 용서구함은 눈물이 되었어야 했다. 그가 그저 그녀 앞에 울기만 했다면 그녀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지 않았으리라. 그가 신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녀에게 용서를 말했던 것은 몰염치 했으며, 뻔뻔스럽기 까지 했다.

여자의 용서는 안타깝지만 벌레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그를 용서하고자 갔던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런 살인범의 얼굴에서 분노와 미움과 살인적 광기를 다시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유괴범은 자신이 생각했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힘들었고, 아팠고, 괴로웠다.
자신이 원했던 대로 그는 되어있지 않았고, 그는 너무 뻔뻔스러웠다. 너무 잘 지내고 있었다. 그건 그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피해자 입장에서 가해자가 너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우리는 너무나 많이 봤다. 그가 용서를 구했을 때, 그녀는 그 용서를 아들에 대한 용서까지도 하느님이 용서했다고 착각했다. 그녀가 만약 그의 용서가 원죄에 대한 용서만이었다라고 생각했다면 그녀를 자살까지 몰고 가지는 않았으리라.
내가 용서하지도 않은 사람을 신이 먼저 용서했다고 지껄이는 인간이 있다면 밀양의 여자가 그랬던 것  처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인간의 본질적인 이기적인 내면인 것이다. 여자가 집사한테 말한 부분에 그래서 상당부분 공감이 갔다. 그러나 그녀 역시 유괴범과  마찬가지로 신의 영역까지 침범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용서를 하지 못했다. 현실은 그가 이미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는 뒤 였는데, 그녀는 너무 성급하게 신의 용서를 꺼내 버렸다. 그래서 막상 현실적인 상황에 맞닥트렸을 때, 그녀는 어설픈 용서와 냉정한 현실에서의 갭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치기에 충분한 상황이 되어진 것이다.
그녀는 먼저 자신의 미움과 자신의 분노를 떠내 보냈어야 했다. 그를 어설프게 껴안고자 했던, 용서하고자 했던 그녀의 우월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 시킨 것이다. 


 

 자신 에게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삶의 짐을 진 사람을 용서하는것이 쉬운 일인가? 가슴 속 깊이 까지 타들어가는 절망을 느낀 적이 있는가?   그 사람은 자비와 평화의 얼굴로 신 앞에 나가 미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린다. 예전에 서로에게 준 상처와 모진 마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렇게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것이 해결 되어질 것이고, 예전일은 아물테니 말이다. 흉터와 상처는 남겠지만 더 이상 그 상처와 흉터는 아프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 할 수 없는 상황에 용서를 구해야 상황이 온다면? 
덜 아팠던 사람이 용서를 구해야 하는것인가? 더 많이 미안했던 사람이 용서를 먼저 말해야 하는가? 아님 더 죄책감과 자괴감을 가진 사람이 용서를 구해야 하는가? 셋다 아닐 것이다.
용서란, 나를 위한 것이기에.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과거의 아픈 기억으로부터, 분노로부터, 상처로부터 나아갈 수 없으므로.  분노와 상처와 아픈 기억만을 안고 살아가기에는 삶이 너무 짧고 찰라와 같으므로..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영역은 따로있다. 인간의 영역이 따로 있듯이. 그 영역을 혼동하다 보면 유괴범과 여자 같은 용서의 본질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벌레이야기에 여자는 자살을 택한다. 밀양에서 여자는 다시금 살아간다. 꾸역꾸역... 
용서를 거절한 인간도, 용서를 구한 인간도 꾸역꾸역 살아가야 하니깐.
그 사람이 용서를 거부한들, 그 사람 인생이 절딴 나는것도 아니니깐. 다들 꾸역꾸역 살아갈 테니깐. 그 사람은 먹고, 자구, 또 살아갈테니깐. 그리고 잊을테니깐..

용서를 안 받는다고 해서, 미안함을 거절했다고 해서 내 인생이 예전의 평범했던 그것으로 다시 돌아오지도 않을텐데 말이다. 아파서 가슴을 쥐어뜯고,  굵은 눈물줄기를 뚝뚝 떨어트려도, 하늘을 바라보며 당신이 맘에 안든다고! 당신은 내 삶을 이렇게 해주면 안되었다고 대들고 따져도 모든것을 예전으로 돌려 놓으라고 소리쳐도 잘못은 내게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내가 후회할 행동에 영향을 끼친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분께 할 수 있는 일은 내 삶을 그전으로 돌려놓으라고 땡깡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날 받아주신 그것에 대해서 고마워 해야 하는 것이다.

나야 말로 그분 앞에 용서 받을 수 없는 사람이지 않은가?!
나의 한계를 나의 현실를 받아들이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은 내려놓는 것이다.  그것이 내 삶을 이해하는 일이되어지며, 내 삶을 내 스스로 용서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사람을 용서해 주는 일이 될테니깐.
그게 인생이니깐 말이다. 

사람하나 제대로 용서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신의 구원을 말하고, 신의 자비를 말하고, 주일마다 미사 혹은 예배를 드리고 어려운 이웃을 향해 봉사활동을 하는 행위들..  이럴때 인간이란 본질이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흔번씩 일곱번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겐 너무 어려운 가르침 처럼 보여진다. 예수그리스도를 올곳이 믿는 것은 그래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할련다.
그게 삶이니깐. 상대방이 용서를 거부한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내 영역이 아니므로. 그러나 용서를 구했다고 끝낼일은 아니다.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용서는 상대방의 화해가 있을 때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용서란 있을 수 없기에..
그러나 용서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다 할때까지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머리를 망친 머리를 자신이 다시 거울을 보며 짜른 전도연 처럼 말이다....


"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가야 하고 사람으로서 갈 수 밖에 없는 길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람에겐 사람으로서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page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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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10-26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님 잘 읽었습니다. 전 영화를 본 후 이 책을 읽었는데
섬뜩한 감동이 있었어요. 사람이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 할 수 없는 일.
신에 대한 도전장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로 들리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