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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 벌레 이야기
이청준 지음, 최규석 그림 / 열림원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i guess that she thinks like this...

평온한 얼굴을 하고 나를 맞이한 유괴범의 얼굴에서 내 사랑하는 아이를 죽였던 그런 살인적인 눈빛이 아니다. 그는 이미 딴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어딘가 잘못되어졌다. 내가 기대했던 모습으로 그는 앉아 있지 않았다. 

나는 가까스로 평온을 되찾았다. 아니 평온을 되찾은 것처럼 보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여전히 왜 내 아들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집사님도 그랬다. 모든것은 주님의 뜻이 있다고.  내가 용서를 해야지. 누가 용서 할 수가 있었어. 하느님은 날 이리도 많이 사랑하시는데 말이다. 용서를 구하러 가야 겠다. 그넘한테.

이건 내가 그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시혜이기 때문이다. 불쌍한 넘. 좀 있으면 사형장 이슬로 사라져 버릴- 아들을 죽인 당연한 댓가이다. 그런넘은 죽어도 싸다!- 내가 베풀 용서를 그는 분명 거절할 것이다. 왜? 그는 내 아들을 죽인 짐승만도 못한 넘이므로. 그런 넘이 신의 사랑이 신의 용서가 가당키나 해. 그런 넘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말한다는 것이 어찌보면 우스울 지도 모르겠다. 그런 악마같은 넘에게 하느님의 사랑은 불필요한 것이기에. 

면회날.
내가 생각했던 그는 살인를 저질렀던 눈빛도 아니다. 그는 발광하지도 내게 복수를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나를 저주하지도 않았다.
그는, 나에게 용서를 말했다. 그가 감히 그가. 나에게 용서를.
이 혼란을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지?
어떻게 저런 넘에게 신의 사랑이 가당키나 하고, 신의 용서가 가당키나 하는지 그를 만나고 온 지금 나는 미쳐 버릴 것 같다. 내가 얼마나 아팠는데, 내가 얼마나 죽을 만큼 미칠 것 같았는데, 신은 내 마음을 요만큼도 생각해 주지 않았다.

난 그를 용서할 수 없다. 아니 난 하느님을 용서할 수 없다. 하느님은 날 배신했다. 난 그 살인범보다 신에게서 배신감을 지을 수 없다.
그의 사형집행 날짜다. 라디오를 통해 그의 마지막 음성이 들려온다.
"나는 하느님의 품에 안겨 평화로운 마음으로 떠나가며, 그 자비가 희생자와 그 가족에게도 베풀어지기를 빌겠다."

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라디오를 집어 던졌다. 아니 주변에 있는 손에 잡히는 모든것은 다 던져 버렸다. 네가 뭔대! 감히 자비와 희생을 운운해! 이런 악마같은 새끼! 넌 그럴 자격이 없어. 넌 평생 저주와 욕을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구! 넌 내 아들을 죽인 살인마야!!
마지막 손에 잡힌 성경책을 찢어 던져 버린다. 그리고 소리쳤다. 확실히 존재하지 않은 무능력한 신에게!

"당신은 개나 소나 아무나 다 용서해 주는, 막 되쳐먹은,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한 아주 후진 신이군요. 당신은 내 아들을 죽인 그 유괴범과 마찬가지로 공범이군요. 그에게 용서를 줄 권리가 당신에게는 없다구요!"

i guess that he thinks like this..

감옥에서 만난 김목사는 내게 성경책을 건넜다. 사형 집행을 언도받고, 난 이제 죽음의 날짜만을 세고 있다. 목사는 내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용서해 준다고 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것 마음이나 좀 편해야 하는것 아닌가.. 내가 죽인 남자아이의 엄마가 면회를 온다고 한다. 흠 그 사람이 왜 여기까지 올까? 내가 어떤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줘야 하지?
그래, 난 이미 하느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었다. 아들을 죽인 건 분명 잘못이지만, 이미 하느님은 날 용서했다고 했다. 목사도 그랬다.
그래서 그녀가 찾아온다고 하도, 별로 할 말이 없을 것 같다.하느님이 이미 나를 용서해 주었는데 말이다. 그녀가 날 찾아와서 멱살을 잡고 욕을 해도 난 이미 용서 받았잖아. 어차피 난 죽는 몸인데. 오늘밤 읽은 구절은 십자가에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신 그 부분이다. 신을 믿는다는 것이 참 편안하군. 천국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있다면  이제 천국에 가겠군.

그녀가 왔다.
그녀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말했다. " 전 이미 주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어요."
그녀는 침묵한다. 그녀와 나와의 면회는 짧았다.
난 그녀의 아들을 죽였지만, 그건 내 실수였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그러나 지금은 그것 조차도 모두 하느님이 용서했다.  나의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 말을 남기라고 한다. 무슨말을 해야 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비난 없이 갈 수 있지? 그래 예수가 말했던 것 처럼 사랑과 자비를 말해야 겠다.   "나는 하느님의 품에 안겨 평화로운 마음으로 떠나가며, 그 자비가 희생자와 가족에게도 베풀어지기를 희망하겠다. " 
유괴범의 용서에는 진정한 용서의 행위가 깃들여 있지 않았다.
용서란 자신의 행한 일이 없어지는 일이 아니다. 용서란 덮는 행위가 아니다. 용서란 우월자의 입장에서 서는 건 더더욱 아니다.
특히 살인범의 신의 용서의 개념은 아주 잘 못 되어진 것이다. 그가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은 원죄에 대한 용서이지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용서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살인까지도 용서받았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그는 여자에게 비수를 한번 더 꽂는다. 그의 입장에서 신의 자비란 자신의 원죄를 용서받은 것에 대한 개인적인 구원의 자비일 뿐이다. 그는 오버했다. 그는 용서를 오도했다. 그는 자신이 신의 입장이 될려고 했다. 그는 그녀에게 용서를 구할 입장은 맞았어도, 그녀에게 자비와 용서의 시혜를 베풀 입장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그녀에 대한 진정한 용서구함은 눈물이 되었어야 했다. 그가 그저 그녀 앞에 울기만 했다면 그녀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지 않았으리라. 그가 신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녀에게 용서를 말했던 것은 몰염치 했으며, 뻔뻔스럽기 까지 했다.

여자의 용서는 안타깝지만 벌레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그를 용서하고자 갔던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런 살인범의 얼굴에서 분노와 미움과 살인적 광기를 다시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유괴범은 자신이 생각했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힘들었고, 아팠고, 괴로웠다.
자신이 원했던 대로 그는 되어있지 않았고, 그는 너무 뻔뻔스러웠다. 너무 잘 지내고 있었다. 그건 그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피해자 입장에서 가해자가 너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우리는 너무나 많이 봤다. 그가 용서를 구했을 때, 그녀는 그 용서를 아들에 대한 용서까지도 하느님이 용서했다고 착각했다. 그녀가 만약 그의 용서가 원죄에 대한 용서만이었다라고 생각했다면 그녀를 자살까지 몰고 가지는 않았으리라.
내가 용서하지도 않은 사람을 신이 먼저 용서했다고 지껄이는 인간이 있다면 밀양의 여자가 그랬던 것  처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인간의 본질적인 이기적인 내면인 것이다. 여자가 집사한테 말한 부분에 그래서 상당부분 공감이 갔다. 그러나 그녀 역시 유괴범과  마찬가지로 신의 영역까지 침범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용서를 하지 못했다. 현실은 그가 이미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는 뒤 였는데, 그녀는 너무 성급하게 신의 용서를 꺼내 버렸다. 그래서 막상 현실적인 상황에 맞닥트렸을 때, 그녀는 어설픈 용서와 냉정한 현실에서의 갭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치기에 충분한 상황이 되어진 것이다.
그녀는 먼저 자신의 미움과 자신의 분노를 떠내 보냈어야 했다. 그를 어설프게 껴안고자 했던, 용서하고자 했던 그녀의 우월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 시킨 것이다. 


 

 자신 에게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삶의 짐을 진 사람을 용서하는것이 쉬운 일인가? 가슴 속 깊이 까지 타들어가는 절망을 느낀 적이 있는가?   그 사람은 자비와 평화의 얼굴로 신 앞에 나가 미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린다. 예전에 서로에게 준 상처와 모진 마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렇게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것이 해결 되어질 것이고, 예전일은 아물테니 말이다. 흉터와 상처는 남겠지만 더 이상 그 상처와 흉터는 아프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 할 수 없는 상황에 용서를 구해야 상황이 온다면? 
덜 아팠던 사람이 용서를 구해야 하는것인가? 더 많이 미안했던 사람이 용서를 먼저 말해야 하는가? 아님 더 죄책감과 자괴감을 가진 사람이 용서를 구해야 하는가? 셋다 아닐 것이다.
용서란, 나를 위한 것이기에.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과거의 아픈 기억으로부터, 분노로부터, 상처로부터 나아갈 수 없으므로.  분노와 상처와 아픈 기억만을 안고 살아가기에는 삶이 너무 짧고 찰라와 같으므로..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영역은 따로있다. 인간의 영역이 따로 있듯이. 그 영역을 혼동하다 보면 유괴범과 여자 같은 용서의 본질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벌레이야기에 여자는 자살을 택한다. 밀양에서 여자는 다시금 살아간다. 꾸역꾸역... 
용서를 거절한 인간도, 용서를 구한 인간도 꾸역꾸역 살아가야 하니깐.
그 사람이 용서를 거부한들, 그 사람 인생이 절딴 나는것도 아니니깐. 다들 꾸역꾸역 살아갈 테니깐. 그 사람은 먹고, 자구, 또 살아갈테니깐. 그리고 잊을테니깐..

용서를 안 받는다고 해서, 미안함을 거절했다고 해서 내 인생이 예전의 평범했던 그것으로 다시 돌아오지도 않을텐데 말이다. 아파서 가슴을 쥐어뜯고,  굵은 눈물줄기를 뚝뚝 떨어트려도, 하늘을 바라보며 당신이 맘에 안든다고! 당신은 내 삶을 이렇게 해주면 안되었다고 대들고 따져도 모든것을 예전으로 돌려 놓으라고 소리쳐도 잘못은 내게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내가 후회할 행동에 영향을 끼친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분께 할 수 있는 일은 내 삶을 그전으로 돌려놓으라고 땡깡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날 받아주신 그것에 대해서 고마워 해야 하는 것이다.

나야 말로 그분 앞에 용서 받을 수 없는 사람이지 않은가?!
나의 한계를 나의 현실를 받아들이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은 내려놓는 것이다.  그것이 내 삶을 이해하는 일이되어지며, 내 삶을 내 스스로 용서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사람을 용서해 주는 일이 될테니깐.
그게 인생이니깐 말이다. 

사람하나 제대로 용서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신의 구원을 말하고, 신의 자비를 말하고, 주일마다 미사 혹은 예배를 드리고 어려운 이웃을 향해 봉사활동을 하는 행위들..  이럴때 인간이란 본질이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흔번씩 일곱번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겐 너무 어려운 가르침 처럼 보여진다. 예수그리스도를 올곳이 믿는 것은 그래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할련다.
그게 삶이니깐. 상대방이 용서를 거부한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내 영역이 아니므로. 그러나 용서를 구했다고 끝낼일은 아니다.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용서는 상대방의 화해가 있을 때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용서란 있을 수 없기에..
그러나 용서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다 할때까지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머리를 망친 머리를 자신이 다시 거울을 보며 짜른 전도연 처럼 말이다....


"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가야 하고 사람으로서 갈 수 밖에 없는 길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람에겐 사람으로서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page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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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10-26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님 잘 읽었습니다. 전 영화를 본 후 이 책을 읽었는데
섬뜩한 감동이 있었어요. 사람이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 할 수 없는 일.
신에 대한 도전장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로 들리기도 해요.^^
 
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 타산지석 1
이식.전원경 지음 / 리수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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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You...

 

널 떠나보낸지도 어언 횟수로 10개월이 다 되어 가는구나.
널 첨에 봤을 때, 넌 내 기분 모를꺼야.
fuck off 를 외치고 싶었어. 아 이건 아니야라고..
히드로에 첫발을 내딘 순간 울고 싶었지. 아니 진짜로 울었어.
전화 거는 법을 몰라, 그 자리에서 거금 5파운드를 날려 버리고, 전화걸기를 도와준 영국 사람에게 난 흔한 "thank you"도 못 해더랬지.

 그뿐인지 아니?

상상속 나래에 있었던 동화같은 이쁜 중세풍의 집들은 온데 간데 없고, 워터루 스테이션은 서울역 뒷골목보다 음산하기 이를데 없었어.

또 춥기는 얼마나 추웠던지. 템즈와의 첫 만남은 나에게 황홀했던 기억이 아닌, 정말로 지랄맞은 기억이었단다.

길도 잃어버려 난 수업 첫날 학교를 못 찾아 다시 집으로 되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단다. 얼마나 지랄 같은 너였던지. 그때부터 시작되었지. 넌 내 인생에 도움이 안되는구나.

넌 참 쌀쌀맞았더랬지.
맛없는 빵을 한달동안 먹으면서, 얼마나 밥이 먹고 싶었던지. 좋아하는 커피도 1파운드가 무서워 쉽사리 마시지 못해더랬지.

네가 첨에는 싫고 미웠어. 내가 먼저 다가섰는데 넌 너무 냉정했으니깐.
그렇지만 널 알아 가면 갈수록 너의 매력에 얼마나 빠져들었는지 넌 모른단다. 그 매력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어.

그래 너하고 함께 참 많은 추억이 있었단다.
정말로 잊지 못할 워터루 스테이션. 난 너랑 있으면서 한번도 워터루를 떠난적이 없었어. 내가 좋아하는 템즈강이 바로 옆에 있었기에.


당신은 참 많은 사람들을 그곳에서 만나게 해줬어.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스쳐갔던 많은 사람들.
그리고 여전히 나랑 풋풋한 관계를 맺고 있는 영국의 지인들.

고마워. 정말로.
고맙다는 말로 설명 안되는거 아는데.

넌 날 돈이 없어도 행복하게 만들어 줬어.
투머치 걸었어도 너무나 행복했고, 한끼는 라면이었더라도 괜찮았어.
왜냐면, 너와 함께 있었으므로.
당신은 나에게 삶에 대한 여유로움을 알려줬어.
당신은 나에게 천천히 가도 된다는 걸 말해줬어.
당신은 나에게 당당해도 된다는걸 가르쳐 주었지.
그래 너였기에 가능했는지도 몰라. 당신이었기에 말이지..
당신의 맑은 미소, 풋풋한 싱그러움. 그게 바로 너의 하늘이야.
너의 하늘은 항상 맑았고, 풋풋했어. 가슴 설레였어.

 
너는 나에게 여전한 그리움이야.
너는 나에게 여전한 아름다움이며, 넌 여전히 나에게 완벽해.
널 만난건 내 인생에 행운이야. 백만번에 한번 찾아온다는 행운을 내가 가졌구나. 
널 만난걸 후회안해. 사람들은 그러더라.

그 돈이였으면, 그 시간이었으면 한국에서 충분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을거라구.
그래 어쩜 사람들 말대로, 난 그 돈이었으면, 그 시간이었으면 한국에서 분명 여유롭고, 편안한 삶을 누렸을거야. 늘 그랬듯이 말이지.
그러나 내가 너에게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할지라도, 널 만난게 내 인생에 있어 시간 낭비였는지 아니었는지 몰랐어도..

널 만난걸 단 한번도 후회한 적 없어.
너는 돈 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그런 존재였으니깐. 너와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은 돈으로 환산 할 수 조차 없는 퍼팩트한 시간이었으니깐.

만약 하느님이 다시 내게 그 시간을 주신다면, 그때와는 전혀 다르게 널 대할 수 있을 듯 해.
널 아프지 않게 만들었을테고, 널 힘들지 않게 만들었을테니깐. 흘러가 버린 시간을 붙잡을 수 없기에 그게 가장 후회가 된다.


널 떠나왔으면서도, 난 여전히 네가 그립고 보고프다.
잘 지내고 있는거지?
넌 잘 지낼것 같아.
왜냐면 사람들이 널 좋아하니깐.
나 말고도 널 좋아하는 사람들이 네 주변에는 많으니깐.
넌 실제하기에는 너무 아름답고, 완벽해.
그런 널 못 본다는게 얼마나 안타까운지 넌 알까?
넌 정말로 모를꺼야.

 

보고싶다.

아주 많이.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는게 가장 마음이 아파.

 

 

널 다시 볼 수 있을까? 내가 널 정말로 한번만이라도 볼 수 있을까?

내 추억이 깨지도 않도록, 내가 널 잊지 않도록. 널 더 알고 싶었는데, 이제 그럴 기회가 없음이 아쉽다. 너에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서고 싶은데 힘드네.
그래. 그런것 같아.
다 뜻대로 안되는것 같아. 뜻대로만 되면 얼마가 좋겠어? 그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더라고. 행복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건, 오직 너 때문이라는 것을. 너는 알까? 나에게 좋은 기억과 아름다운 추억 만들어줘서 너무나도 고마워.
비록 아픈 기억도 있었고, 잊고 싶은 기억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것만 기억할려고.
나는 이미 그러고 있어.
삶이 너무 짧고 찰라와도 같아서, 아픈 기억들만을 떠올리기에는, 잊고 싶은 기억만을 떠올리기에는 너무 억울 한 것 같아.
너는 잠시 내 곁에 머물렀다가 같지만,  살아있는 동안 널 오래도록 추억하고 기억할 듯 해.
많이 사랑 했어. 많이 사랑한 자는 많이 용서함을 받는데..
너하고의 마지막 날  울면서 널 떠나왔지만,

웃을꺼야. 널 보면.
다시 널 보면. 쿨하고 호탕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널 내 심장으로 안으며, 고마웠다고 말할꺼야. 큰 소리로..

정말로 고마웠어. 이쁜 추억 만들어줘서....

thank for making good memories in my heart.
                                                                                   from min.....

 
 

"영국 사람들은 미국이나 일본 사람들처럼 부자는 아니다. 대신 영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처럼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하지 않는다.미국 사람들처럼 부자들만이 멋진 인생을 누리지도 않는다.
영국 사람들은 최고급 스포츠카 보다 예쁜 정원과 오후의 차 한잔에 더 가치를 둔다. 꽃 한 송이를 가꾸는 데에 정성을 다하고 하루에 두번은 차를 마시는 티타임을 갖는다." page 306.


"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영국 사람들의 삶은 어리석기 짝이 없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영국 사람들은 지금 이순간의 여유를 누리며 느긋하게 살아갑니다. 그들의 삶에는 소박하지만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을 다만 '가난하다' 라든가 '게으르다'라만 판단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판단일 것입니다." page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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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현재의 식량생산은 전세계 인구의 두배에 달하는 사람이 먹을 정도인데 말이다. 이 책은 전세계 전역에 걸쳐있는 굶주는 아이들을 위해 적선하듯 돈 몇푼 하라는 호소가 아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정말로 중요한 문제다. 이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절대적인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내가 말하는것은 절대적 빈곤을 얘기하는 것이다.

어느 한쪽에서는 식량이 남아돌아 버리고, 비만은 병으로 치부되어 다이어트 열병이 불고 있는데 어느 한쪽은 먹지도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 미국이 생산할 수 있는 곡물 잠재량만으로도 전세계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고, 프랑스의 곡물 생산으로 유럽 전체가 먹고 살 수 있는데 도데체 수 많은 어린이 무덤이 생겨나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될 성질일까? 

그는 빈곤의 문제를 가져온 절대적인 이유를 신자유주의로 설명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신자유주의가 없어지지 않으면 빈곤의 문제도 해결이 불가능하는것을 의미한다. 현재 신자유주의는 맹신에 가까운 믿음이기에 쉽사리 깨질 것 같지 않고, 설령 깨진다 하더라도 신자유주의는 이름만 바뀔뿐 또 다른 신자유주의는 다른 무언가로 대체 될 것이다. -갤브레이스의 "경제의 진실"은 빈곤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없는 우울함을 말해준다-

 

<2005년을 기준으로 10세미만의 아동이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 가고 있으며, 비타민 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이 3분에 1명 꼴이다. 그리고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 5천명이 심각한 만성적 영양 상태에 놓여있다> page 18

 

< 브라질의 조슈에 데 카스트로(전 FAO의장) 는 1952년에 자신의 유명한 저서 "기아의 지리학"에서 이 "금기시되는 기아"를 언급했지. 그의 설명은 무척 흥미로워. 사람들이 기아 사태를 아는 것을 대단히 부끄럽게 여긴다는 거야. 그래서 그 지식 위에 침묵의 외투를 걸친다는 거야. >page 82

<금융자본은 결코 가치를 창조 하지 않는다> page 160

<소수가 누리는 자유와 복지의 대가로 다수가 절망하고 배고픈 세계는 희망과 의미가 없는 폭력적이고 불합리한 세계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와 정의를 누리고 배고픔을 달랠 수 있기 전에 지상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 서로 책임져 주지 않은 한 인간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p. 171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 파블로 네루다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들은 모든 꽃을 꺽어버릴 수는 있지만, 결코 봄을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page 171

 

<인도적인 도움은 절대적인 중립, 보편성, 독립성을 요구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통 받는 인간의 필요를 겨냥한 것이어야지, 결코 한 국가의 필요에 따른 것이어서는 안된다> p. 180

 

난 내 삶을 송두리채 바칠 만큼, 이 세계의 평화와 안정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투철한 의식을 가지고 투쟁하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내가 실천 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작다. 모든걸 다 청산하고, 기근과 가난이 있는 지역으로 갈 수도 없고( 거기 가는 사람들은 전문가 집단만이 간다. 나는 가고 싶어도 못간다.) 내 수입의 모두를 다 국제기아대책기구에 쏟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돈 몇십만원이 무슨 도움이 되겠어? 라고 반문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냥 돕자. 이는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무겁고 불편하지만 그래서 피하고 싶지만 사실인 얘기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적어도 세끼 밥은 먹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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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18 21:32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2007년 11월 도서목록에 있는 책으로 2007년 11월 8일 읽은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들 위주로 읽다가 알라딘 리뷰 선발 대회 때문에 선택하게 된 책인데, 이런 책을 읽을 수록 점점 내 관심분야가 달라져감을 느낀다. 총평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 책에서 언급하는 "기아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막연하게 못 사..
 
 
 
경제의 진실 - 갤브레이스에게 듣는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지음, 이해준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1. 

대학교 1학년 시절 내가 빠져버린 책은 신학책도 아니고 신앙책도 아닌 마르크스가 집필한 자본론이었다.

전두환 5공시절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의 노랫말 가사중에 "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흐르고 저마다의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다네.. 아, 아, 우리 대한민국" (당시 이 노래가 국민노래였으니, 전두환이 맹글고 싶은 나라였나 보다. 대한민국 나라가 아닌 두환이 개인과 그 가족들의 나라. 원하는 것을 졸라 실컷 지들끼리 호형호제 하고 나누며 뜻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다던.)

이게 바로 겔브레이스가 말한 자본주의의 사기치기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얻을 수 있는 것은 자본을 가진 자본가들만의 전유물이다.  노동자들이, 무산계급이 얻을 수 있는 것은 한강의 5천원짜리 유람선을 타는 일과 흘러가는 조각구름을 보면서 위안을 얻는 일일뿐.  정수라의 노래는 이렇듯 교묘하게 우리도 마치 다 얻을 수 있을 것 처럼 개구라를 친다.

사회주의 소련(소련식 사회주의/ 엄밀한 의미에서 막스의 사회주의를 계승했다고 볼 수 없음)이 붕괴된 후, 세계는 급속도로 자본주의의 체제로 전환한다. 무너질것 같지 않던 중국도 경제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며 고속도 경제성장을 지속한다.  중국에 굶는 인구가 1억명이상이라고 한다.  이게 졸라리 그래도 완벽하다고 개구라를 치는 시장경제의 사기치기의 전형적인 물타기인 것이다.

 
2. 

얼마전 현대의 정몽헌 회장이 사회봉사 활동을 선고받았다. 유전무전 무전유전이다. 돈 없는 게 죄다. 서러운거다. 돈만 있으면 장땡인게 바로 시장경제 체제다.
법원의 판결이 그런데 가관도 아니다. " 경제가 위험해 질 수 있다."는 논리였다. 차라리 솔직히 "너희들도 돈 있으면 돼. 억울하면 돈 많이 벌어.!" 그게 더 솔직한 판결일 듯 하다.
그들이 내세우는 것이 마치 국익인 듯 보여지나, 이는 국익이 아니다. 진정한 국익은 옳바른 판단을 통해서 일반 보통 사람들에게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무시와 박탈감을 최소화 시켜 주는 것이다. 하기사 대한민국 저 위대한 위정자들이 소시민들의 삶에 요만큼의 관심이라도 있었던가?!
이게 두번째 자본주의의 사기치기다. 그들의 짜고 치는 고스톱의 판세는 이미 정해진 일이다. 땡값은 자본가들이 선심하 듯 던져주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재화이다. 관료자들은 그 땡값에 고개를 조아리며 고마워 하며 인마이 포켓 하면 에브리띵 이즈 오케이다. 관료와 제벌이 손 발이 맞았을 때 어떠한 진실이 밝혀지는에 대한.
아담스미스의 보이진 않는 손은 고전 경제학 이론이다.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 하고, 경제를 물  흘러가는 대로 납두자는 논리다.
쌍수 들고 환영한 분들이 바로 쟤네같은 돈 많으신 분들이다.
자본가들의 국가통제는 이제 어제의 일이 아니다. 이라크 전은 무식하고 용감한 관료자인  조지부시와, 미국 군수업자와 석유업자들에 의해서 자행된 일이 명백해졌으니 말이다.
기업의 파워는 날로 커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금융, 에너지, 군사를 비롯한 거의 모든 분야를 기업이 좌우한다. 기업에 요구에 의해 전세계의 평화를 깨는 전쟁을 일으키고, 중동전을 긴장상태로 몰아넣는다. 기업이 무기를 판 돈으로, 중동의 배고픈 어린이들에게 빵을 주는 이 기가막힌 현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사기치기에 속고 있는가?

그들이 무기를 판 돈으로 어린이들에게 빵을 주고 있는 이 아니러니한 현실을.

3. 

현재의 신자유주의 체제는 20:80의 세상을 더욱더 공고히 하고 있다. 개천에서 용나온다는 말은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여러분들의 이웃이 되겠습니다는 각종 금융권의 대출은 서민들을 향한 사기치기다. 언제 당신들이 어려운 자들의 이웃이었던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대출금을 갚지 못해 지금도 어디 한구석에서는 또 다른 대출로 대출을 막을 막고 있으며 혹은 자신의 목숨 끊기로 자신들의 삶의 고리를 끊는 사람들이 있다.
가난은 어느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가난을 어느 한 개인의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돌린다면 이것이말로 대표적인 경제체제의 울투라 매가톤급 사기치기가 될 것이다. 

 3-1 

 독재정권 하에 이루어진 경제성장은 어디까지나 하위계층인 노동자와 민중들의 고역으로 짜낸 착취였다. 내가 박정희의 경제발전을 인정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정희가 만들어 놓은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 개인의 몫이 아닌, 하루 16시간씩 청계천 지하 빛도 안 들어오는 8평도 안되는 곳에서 하루종일 어깨도 제대로 못 펴고 일했던 전태일 같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빚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에 죽어갔던 수 많은 노동자와 민중들의 피와 땀이 없었다면 현재의 족벌식 제벌들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그들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벌어들인 자본을 자신들의 가족과 기업을 위해 부지런히 쌓아놓고 있는 중이다. 

현대나 삼성이 망하면 국가가 망한다?  현대나 삼성이 망해서 국가가 망한다면 대한민국은 망해도 되는 국가다. 한 기업의 영향력에 의해 국가가 좌지우지 된다면 그게 국가인가? 삼성공화국이나 현대 공화국이지. 그럼 국가가 있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모두 이건희나 정몽헌 앞으로 해체모여 하면 된다. 대한민국 국가가 뭐할라고 성가시게 존재하느냐 말이다.

4. 

나 역시 시장체제(자본주의)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다국적 기업인 맥스웰이 만든 커피를 마시며, 삼성이 만든 모바일폰로 필요한 통화를 하며, 아디다스가 만든 운동화를 신는다. HP가 만든 랩탑을 쓴다. 이런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을 일절부분 포기하는 것이 사실상 어렵지만, 반 봉순이 언니의 세력들에 동조하는 일 따위는 없어야 겠다.
이런 여유로운 생활에서 여전히 착취당하고 고통받는 타국들과 사람들에 대한 도움의 손길을 뻗어야 한다. 장 지글러가 지적한 소수가 누리는 자유와 복지의 대가로 다수가 절망하고 배고픈 세계는 희망과 의미가 없는 폭력적이고 불합리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5.

시장경제 체제가 현 상황의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의 희망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소수의 가진자만의 배부르기를 위해서 다수가 절대적으로 희생하고 착취당하는  이 세계가 유지되는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자본주의가 가진자들의 전유물 전략하고 그 체제를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지렛대로 이용된다면 희망은 어디에도 없다.
한강에 유람선이 흐르는 이 시장주의 체제가 행복하다는 지랄에 쌈싸먹는 얘기에 더이상 동조하지 않는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시장체제란 더불어 나누는 삶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자본보다 소중히 여기며, 없는 자들에 대한 있는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필요한 시점이다.  공룡은 자신의 크기를 지탱못해 이 지구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인류는 영원하지 않다.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구와 욕망을 위해 나아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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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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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전에 신학대를 다닐때 내가 좋아했던 강사님이 신학생이라면 한번정도는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의 책을 읽으라는 권유를 받았다. 당시에 나는 나 나름대로 믿음이 holy 스럽다고 믿었던 사람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실상 내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아닌, 내가 세운 나름대로의 신념체계다는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 믿음은 마치 모래성과도 같이 한번에 무너져 내렸다.
내 신념이라는 것이 그렇게 가볍고, 바람같았던지. 내 신념을 포기하는 일이 그토록 쉬운일인지는 몰랐다.

나는 신학대를 떠남과 동시에 교회도 홀가분(?) 하게 떠났다. 그러나  가끔 내 삶이 어렵거나 지칠때면 난 참 뻔뻔스럽게도 하나님을 찾았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될 그 즈음에는 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다시 하나님을 찾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나에게 마치 지니의 요술램프 같은 그런 존재였으므로.

2.

누구나 한번정도는 살아가면서 의문을 품었을 만한 "신은 존재하는가?" 란 물음.
이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한번정도는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정도는 신의 존재의 유무 때문에 친구들과 혹은 사람들과 싸워본 경험정도는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결론은 늘상 나지 않는다. 신을 본 사람이 없으므로.
10년이 흐른 지금에 나는 왜 러셀의 이 책을 사서 읽게 되었을까? 그건 지금 내가 "신은 존재하는가?"란 물음을 심각하게 던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물음은 존재론적인 것이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상황은 겪게 된다.  테레사 수녀 역시 믿음을 부정한것이 아닌, 존재론적 고백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신의 존재 유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고자 애쓰는 과정이 아닌,- 과학도 일종의 신념체계이다. 과학이 정확하다고 하는것은 극장의 우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들은 왜 신이 없다고를 말하는것일까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표적 무신론자 두 명인 러셀과 도킨스 책을 주저없이 산 이유가 되기도 한다.

3.

러셀은 말하기를

" 종교의 일차적인 주요한 기반은 두려움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여러분이 온갖 곤경이나 반목에 처해있을 때 여러분 편이 되어줄 큰 형님이 있다고 느끼고 싶은 갈망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모든것이 기초다"
마르크스의 딸과 결혼한 러셀의 이와 같은 주장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마르크스 역시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말했으니까. 러셀의 주장은 마르크스의 종교 해악설과 그 맥을 같이 한다.
( 마르크스의 종교(기독교)의 비판의 토대는 종교는 현실을 옳바르게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는 민중의 아편과도 같다고 한다. 아편은 일시적인 쾌락이외에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오히려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든다. 막스는 종교가 이와 같다고 한다.  그래서 민중의 헛된 행복으로서의 종교를 억압하는 것은 곧 민중의 참 행복을 위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위안거리 없이 속되게 사슬을 차고 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사슬을 떨쳐 버리고 살아있는 꽃을 꺽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당시 민중(프로렐타리아/ 브르조아와는 반대 급무세력) 들의 삶은 피폐하고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노동자들은 살기 위해 마치 상품처럼 자신들을 팔았어야 했고, 그들이 받는 급료는 기계화가 그들의 노동가치를 저하시키는 만큼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소수(브르조아/ 유산계급) 가 절대 다수를 억압하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했어야 하는데 막스는 이때 프로렐타리아가 단합하고 노동자들이 당을 만들어 단합할 것을 주장한다.  막스의 살아온 행적과 그의 지적 사유과정, 당시의 시대상황들을  종합적으로 보면 왜 종교가 아편이었다고 말했는지 이해가 간다. )

내가 이 부분에 밑줄을 그은 이유는 두려움이라는 말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신을 믿던 안 믿던 어떤 대상에 두려움이 있다. 그 두려움은 내적으로 올 수도 있고, 외적으로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요즘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도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과거에 대한 두려웠던 기억부터 현실에 대한 현실적 문제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등.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그래서 종교와 두려움과 함께 가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내어쫒고자 종교를 믿을 수도 있고, 내가 지옥불로 가게 되는 건 아닌지 하는 두려움으로 인해 신을 믿을 수도 있으니까.
이럴때 종교는 사람들을 향한 두려움에 대한 협박이다. 두려움을 없애고자 신을 믿을 수도 있고, 두려움을 받지 않고자 신을 믿을 수도 있으므로.  믿던 안믿던 두려움은 동시에 존재한다. 

4.

종교-기독교/ 하나님을 배제시킴-의 기능이 순기능이었던 것만은 아니기에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십자군 전쟁이나 마녀 사냥 그리고 지금의 미국의 네오콘자들에 의해서 벌어진  전쟁까지. 지금도 분쟁중인 수 많은 국가들중에 -크고 작건- 종교의 이름을 가지고 벌어지는 전쟁은 무수히 많다. 서로들 자신들의 종교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들의 종교가 정의라고 부르짖는다. 이럴때 자신들의 믿는 신(종교)은 정의가 되는 것이며, 정의는 모든것을 정당화 시킨다. 이슬람의 성전이 그 좋은 예가 되며, 기독교의 우월적 승자주의식 선교형태(정확하게 말한다면 미국식의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 전쟁들이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 되어진다. 여기서 하나님의 역할은 구경꾼이나 이신론에 불과하며 단지 하나님을 배제시킨 종교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종교들은 말한다.   신의 정의를 위해!

러셀은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가 신을 부정했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그 역시 그는 자신이 무신론자 라기보다는 불가지론자라고 했으니까.
신이 속시원하게 우리 앞에 나타나 " 나 여기 있소"를 보여준다면 현재 무신론자, 유신론자 ,불가지론자 등의 논쟁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텐데 그분은 아마도 이 지구가 끝나는 날까지 그분의 존재를 쉽사리 들어낼 것 같지는 않으시다.

5.

이 책은 무신론자인 사람보다는 나 처럼 유신론자인 사람이 읽어야 더 유익한 책인듯 하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근저인 선과 악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분법적인 관점이 아닌- 기독교가 아니면 악-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은 근본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잣대만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하든 그렇지 않던 하나님 만큼 이 세상에서 관심의 대상이 또 어디있으며 인간의 각종 주제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아마 하나님에 대한 논쟁은 이 인류가 끝나는 그때까지 지속 될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논리와 이론을 만들어서 책을 내고- 팔아먹고-( 그렇게 본다면 그들도 하나님 이름을 팔아서 돈을 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강연을 하고 강의를 하고,  반대편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난 러셀처럼 나는 왜 기독교인가 라는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얘기하지는 못하겠다. 믿음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경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중에는 믿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놓은 책이 아주 많다. 그럼에도 왜 나는 기독교인이가를 얘기해야 한다면, 나는 내 존재와 실존에 대한 나 스스로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디서 부터 왔으며 나는 어디로 가는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내 이드, 에고, 수퍼에고는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믿을 수 밖에 없다. 이는 내 실존에 대한 긍정의 답변이 되기 때문이다.  

6.

내가 만약 신을 알지 못했다면- 혹 믿지 않았다면- 난 러셀보다 더한 지독한 무신론자가 되어졌을 듯 하다. 러셀의 이 말은 마치 하나님을 믿는 C.S 루이스가 한 말 같기도 하다.


"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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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9-01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갱지 2015-05-30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니 글 쓴 분께서 무신론자가 되셨을 확률은 0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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