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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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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편의 단편을 모은 작품의 영어판 표제는 `길들지 않은 땅Unaccustomed Earth‘이다. <그저 좋은 사람>은 옮긴이 혹은 편집자가 국내 판으로 옮기면서 바꾼 제목이다. 인도 벵갈 출신 부모를 두었지만 이주민인 부모를 따라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지금껏 줄곤 살면서 글을 쓰는 줌마 라히리의 소설집은, 스스로가 겪었고 또 겪고 있을, 미국 혹은 다른 나라를 떠도는 인도 이주민들의 삶을 자분자분하게 다룬다.

그러니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에서 따온 단편소설 ‘길들지 않는 땅’이 표제로 내세우기에 더 맞지 싶지만, 내 정서에는 ’길들지 않은 땅‘보다는 역시 ’그저 좋은 사람‘이 잘 맞았다.

조금 있으면 엄마를 찾으며 소리를 치고 아침을 달라고 할 것이다. 아이는 아직 어렸고, 수드하는 아이에게 그저 좋은 사람일 뿐 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녀는 부엌으로 가서 찬장을 열어 위타빅스 한 봉지를 꺼내고 우유를 냄비에 데웠다. ‘그저 좋은 사람’ 209~210쪽

돌이 갓 지난 아이에게 엄마의 존재는 그저 좋은 사람일 뿐이지 않은가. 우유를 먹여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누구라도 상관없는 일이다. 사실이지만 애써 외면하려고 드는 냉혹한 인식은 주인공 수드하와 남동생 라훌과의 관계 확장이다.

인도인 부모를 두었으나 이민한 부모를 따라 미국에서 나고 자란 남매의 삶이란 사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자국어를 모르는 이주민 아이들과, 순혈주의를 강조하는 한국이고 보면 다문화가정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소설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도인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는 게, 한국의 이주민 아이들,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처지와 절대 상반되지만 말이다.

‘성공한 이주민 자녀들의 삶’을 다른 이 소설은 당장 쫓겨날 처지에 있거나 경제적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상황조차 풀지 못하는 우리 처지에서 보면, 먼 얘기이나 아이들의 성장 이후 정체성 문제가 그 못지않은 중요한 갈등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수드하는 ‘어린 시절은 주목받지 못하고 지나갔지만, 남동생만은 미국의 어린아이로 제대로 된 기억을 남겨주겠다고 마음먹’는다. 미국 사회에서는 인도인 부모(부모는 은퇴한 이후에 다시 인도로 돌아간다. 이런 회귀는 소설집 곳곳에서도 비슷하게 등장한다.  

부모 세대는 어쩔 수 없이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는 암시이다.)보다 여섯 살 많은 수드하가 부모에 가깝다. 그 역할을 자진해서 맡았던 ‘그저 좋은 사람’인 수드하에게 전도유망했던 라훌의 방황과 보잘것없는 미국하층민으로 전락한 모습이 마지막 꽤나 실망스러운 것이다.

‘유전자가 부모에게서 바로 온 게 아니라 더 멀리, 잊혀진 근원에서 온 듯’한 라울의 생김새는 코시안이 그렇듯이 벗지 못할 굴레다. 그렇다고 생김새에 따른 인도식 삶이 맞지도 않는다. 속내는 피자와 커피를 즐기는 미국인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은 이제 자신의 아이에게로 전염된다. 인도인 유전자를 타고 태어나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영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엄마, 나이 차가 많이 지는 이복 누나를 데리고 결혼한 나이 많은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한국과 다문화사회인 미국, 인도인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영국에서의 삶이 똑같이 변주될 수는 없지만 수드하를 비롯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갈등과 방황이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연작소설 <헤마와 코쉭>의 두 주인공 헤마와 코쉭은 먼 옛날 유목민이었던 인도유럽어족 선조들처럼 세계를 떠돈다. 이들에게 미국은 각기 미국 이주민 부모의 여정에 따랐을 뿐인  중간 경유지에 지나지 않는다. 

인도에서 태어나서 부모를 따라 미국에서 자라서 사진기자가 되어 남미로 중동으로 유럽을 떠도는 코쉭은 이탈리아에서 우연히 헤마를 만난다. 그는 떠돌이 생활을 접고 편집자로 홍콩으로 떠나기 직전이다. 10대 시절, 같은 벵갈 출신이라는 이유로 잠시 같이 기거했던 코쉬를 기억하는 헤마 역시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 전공으로 교수가 되었고, 관광 겸 이탈리아를 찾았다가 코쉭을 만난다. 그녀는 전통적인 인도 남자와 결혼을 하러 인도로 떠나기 전이다.

이들은 20년 만에 과거 흐릿한 인도식 가족의 보잘것없는 추억을 되새기며 뜨겁게 사랑을 나누지만, 정착과는 거리가 먼 두 ‘세계인’의 삶은, 각자 나라나 민족이나 공동체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거둔 성과를 포기하지 못한다. 각자의 삶의 반경에 따라 이들은 헤어진다.

이들은 서로 그저 좋은 사람, 이방인이다. 소설집은 내내 찐득하게 엉겨 붙지 못하는 그저 좋은 사람들인 채인 이들의 미약하고 흐릿한 흔적들을 세심하고 꼼꼼하게 되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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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철학자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김모세.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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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 때문에 예수가 스스로 글을 남기지 않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근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했으며, 아무리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는 텍스트라 할지라도 특정한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어떤 텍스트도 그 자체로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242쪽
 

“신을 매몰시키는 파괴자들의 소란함이 들리지 않는가? 신의 부패가 느껴지지 않는가? 신은 죽었다! 신은 여전히 죽어 있다! 그리고 신을 죽인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이다!”

신의 죽음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쓴 유명한 단상이다. 니체는 기독교에 절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적대적인 사상에서도 계몽주의 유럽의 비판적 이성이 기독교에서 기원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니체는 수도원 등 엄격한 방식의 진실에 대한 탐구, 종교 교육을 통한 의식의 명료함, 신의 법칙을 찾기 위한 과학적 의식의 발전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적인 명료함’에 이르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의식의 명석함은 비판적 이성으로 ‘날이 서게’ 되어 결국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본래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길, 신을 죽인 것은 그 누구도 아닌, 기독교인들이었다.

니체의 말은 기독교에 대한 적대이기 이전에, 기독교에 대한 반성-매우 도발적이고 극단적이며 반성의 여부를 개의치 않았으나-을 촉구하는 글이기도 했다. 니체와 같은 신에 대한 강한 반발은 콩트,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 계몽주의 후기의 철학자들에게서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되었다.

철학자이자 종교사학자인 프레데릭 르누아르는 <그리스도 철학자>에서 그들의 이런 반발은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말한다. ‘서구의 여정을 살펴보면 종교적 제도의 압제로 인해 이성과 법에의 의지가 필연적인 것이 되었음을 볼 수 있’으며 ‘근대성은 고유한 종교적 모태, 즉 기독교라는 모태 내에서 오랜 기간 동안 성숙의 시기를 지나고 난 뒤에야 발전’했고 ‘그 단계가 지난 이후에야 종교적 모태로부터의 돌아섬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모태에 대한 반발, 부정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 혈연관계는 끊으려야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다.

20세기 중, 후반까지 ‘개인과 인간 사회의 필연적 진보’라는 개념은 유럽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원동력‘이다. 그런데 과학, 제도, 국가 등 눈부신 발전을 이끈 이 같은 개념이 중국이나 인도나 아프리카가 아닌 유럽에서 그것도 18세기에 도드라진 이유는 왜일까?

순환이 아닌 무한한 발전을 의미하는 선(線)적 세계관인 진보는 재림과 종말이라는 기독교 종말론에서 기인했으며, 18세기가 진보의 시대가 된 이유 또한 기독교라는 자궁을 막 뚫고 나온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 철학자>는 복음서에 기록된 ‘있는 그대로’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라, 고 역설하고자 하는 책이다.

진보는 ‘사실상 종교적 신화에 대한 극단적 대립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근대의 신화는 스스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종교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유럽의 철학사를 통해서 기독교의 우위를 내세우거나 변명을 하려는 의도를 내비치는 건 아니다.

저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유럽 기독교 역사를 냉정하게 구분한다. 유럽의 뿌리는 기독교가 아니라 ‘그리스, 로마, 켈트를 비롯해 거슬러 올라가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적인 것’이며 기독교가 고대 유산을 흡수하여 유럽의 모태가 되었다고 진술한다. 더욱이 초기 기독교 이후 유럽에서의 기독교 역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리고 왜곡하였으며, 종교전쟁, 면죄부 판매 등 정치적인 사건으로 점철되었고 냉정하게 지적한다.

‘저자는 결국 ’사랑‘에 대한 메시지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사랑이란 가장 평범하고 진부해 보이면서도, 가장 강력하고 궁극적인 가치이며, 인류의 미래가 걸려 있는 가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옮긴이가 말처럼 결국 그의 얘기는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인권 선언으로 대표되는 ‘자유, 평등, 박애’ 등 인류의 보편 가치는 혁명가들에게 있어 이성에 기초를 둔 규범으로 여겼을 뿐,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영감을 받은 가치들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예수님 천당, 불신 지옥’ 식의 밑도 끝도 없는 강요, 간증식의 카더라 식의 설교, 좀 더 나아가 개인의 성숙한 삶을 배경으로 한 ‘양과 양치기’ 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한국 기독교는 이미 포이어바흐가 1841년에 제기한 “종료란 인류의 유아적 본질”이라는 논제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한국의 다른 종교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이다.)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서 ‘유럽의 기독교는 이미 30여 년 전에 거의 빈사 상태’를 무조건 신앙심의 부족으로 치부하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가르침은 중세 민중을 무지로 몰아넣고 면죄부를 파는 짓이나 다를 바 없다. 혹은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알 사실을, 설령 몰랐다고 하면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라고 하신 2000년 전 예수님의 우려(마태 15장 14절)를 그대로 답습하는 꼴이다.

니체, 마르크스에 대한 일부 발췌 폄하를 비롯해 위의 사례는 한 때 교회에 다니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얘기들이다. 누구에게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일지 모르겠으나, 유럽의 철학사를 기독교의 관점에서 되짚은 이 책은 나에게는 복음과도 같은 책이다.

전에 교회에 다닐 때 품었던, 이후 내던져두고 그저 세상 살기에 바빴던, 몇 가지 의문들이 <그리스도 철학자>를 통해 풀렸다. 또한 보잘것없었던 유럽 철학사에 대한 이해 역시 기독교인의 눈으로 보매, 한층 높아졌다. 이제 눈을 맑게 씻어 예수님의 있는 그대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마음에 담고 새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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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빛>을 리뷰해주세요.
검은 빛 매드 픽션 클럽
미우라 시온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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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해일을 두고 선과 악을 물을 수 있는가, 늙음은 누군들 피하고 싶으나, 그 운명을 두고 악이라고 하지 않듯이 지진해일, 쓰나미는 자연의 섭리이다. 쓰나미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란 고작 바다에서 최대한 경계하고 멀리하는 길 뿐이다. 쓰나미를 피하려고 바다를 찾지 않는다? 늙지 않겠다고 불로초를 찾아 나선 당태종의 헛된 욕망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짓이다.  

도쿄 근처의 작은 섬 미하바 주민 271명 중 266명의 생명을 앗아간 쓰나미. 노부유키, 미카, 다스쿠는 2%의 확률로 살아남은 마을 아이들이다. 말 그대로 천운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살아난 이유가 있다.  

13살 동갑내기인 노부유키와 미카는 밀회를 즐기기 위해 산사를 찾았다가 목숨을 건졌다. 다스쿠는 노부유키를 늘 따라다닌다. 아버지 요시키에게 잠시도 쉬지 않고 얻어맞는 10살 다스쿠는 먼 친척뻘 형인 노부유키가 유일한 피난처다. 이미 비굴함이 몸에 밴 다스쿠는 노부유키의 냉대에도 늘 따라다닌다.  

하지만 노부유키도 다스쿠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한다.  등대할아버지에게 콘돔을 사서 미카와 섹스를 한다는 사실을 다스쿠가 아는 까닭이다. 다스쿠는 입을 다무는 조건이 암묵적인 약속이 된 셈이다.

한가롭고 평화롭게 보이는 작은 섬. 하지만 그 속내는 아이들에게 담배, 포르노 잡지, 콘돔을 팔아 생계를 근근히 유지하는 전직 등대지기, 가정 폭력을 일삼는 요시키, 그리고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마을 주민들의 비열한 세계이다. 그리고 그 영향은 유전병처럼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갑작스런 쓰나미가 지나간 자리에는 평소 모습 그대로 죽은 마을 주민들이 썩어간다. 죽는 순간까지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은 사람들, 시체가 썩는 악취가 진동하는 세상에서 아이들은 비로소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인간의 추악함을 깨닫는다. 게다가 마치 짠듯(?) 살아난 인물은 요시키의 아버지와 미카의 어린 몸을 탐내는 관광객 야마나카와 아이들의 비밀을 아는 등대 할아버지다.

섹스에 눈을 떠서 오로지 미카 생각에 몰두하는 노부유키, 자신의 외모에 끌리는 동급생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미카, 아버지의 매를 피해 도망친 다스쿠. 이 아이들의 은밀한 비밀은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천운이 아니라 저주받은 섬의 운명을 고스란히 질어진 채로, 폐허가 된 섬에서 도시로 나온다.

이제 기존의 이중적인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어른들의 세계다. 노부유키는 미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가정을 꾸리지만 가식으로 사랑하고 일할 뿐이다. 미카는 노부유키를 통해서, 또 야마나카를 유인할 때 체득한 방식으로  가장의 세계인 연예계에 진출한다. 공장을 전전하는 다스쿠는 여전히 아버지가 두렵고, 노부유키에 대해 집착을 한다.

일본 소설의 추세인지 모르겠으나, 극단적인 살인마 대신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은근한 불로 데우듯이 일상을 깨지 않는 숨은 폭력의 속성을 잡아내는 소설류가 눈에 띤다. 잔잔한  웅덩이 밑을 근접카메라로 들여다보면 잔혹하게 먹고 먹히는 야생이 보이듯이 일본 사회를 망원렌즈가 아닌 접사렌즈로 들여다본다.

다스쿠의 노부유키에 대한 오랜 애증을 과연 “오리새끼가 처음 본 뭔가를 어미로 여기듯”한다는 식의 정리, 다스쿠와 노부유키의 아내 나미코가 불륜에 빠지는 계기, 그리고 위에서도 지적했듯 하필 섬에서 살아난 딱 3명인 어른들이 하나같이 이후 사건 전개에 필수불가결한 존재이고, 노부유키가 자신을 이용대상 이외로 보지 않는 미카의 속셈을 뒤늦게 알아차린다는 점 등 몇몇 무리한 설정이 눈에 띤다.

그러나 남편 노부유키와 아내 나미코의 이중적인 관계를 묘사하는 대목마다, 사건 전개와 관계없이 꽤 치밀하고 사실적이라 직격을 날린다. 노부유키의 은밀한 비밀을 모두 알아버린 나미코, 그리고 나미코를 사랑하지도 않고 다스쿠와의 불륜을 뻔히 알면서도 행복한 가정 흉내를 내는 노부유키의 관계가 쓰나미까지 끌고 와서 트라우마를 뒤집어씌우지 않아도 오히려 섬뜩하고 오싹하다. 

이들 부부는 이제 서로의 추악한 약점을 알고 있다. 등가의 추악함은 은밀한 거래를 통해 평온으로 이어지고, 이들 부부는 소설 마지막까지 평범한 공무원과 가정주부로 남는다. 현실은 우리가 소설에서 바라듯 권선징악도 아니고, 길에서 만나는 평범한 누구라도 그런 존재일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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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를 리뷰해주세요.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김주영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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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잡았나 싶게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스릴러 소설이다,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는. 씨네21북스에서 나온 소설답다고 해야 할지, 빠른 전개와 장면 전환 등 한 편의 영화를 본 기분이다.

평범한 목요일 저녁 7시 55분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하여 새벽 1시 30분경까지, 6시간 동안 6명이 죽음을 당한다. 전화가 오기 전, 아카네에게 죽음을 당한 유코까지 포함하면 7명의 연쇄살인이 벌어진 것이다. ‘피의 목요일’이라고 불릴 만한 날이다. 그 7명은 살인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어쩌면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이다.

사건의 중심에 있는 나미키가 죽이기로 결심한 인물은 셋. 10대 후반에서 20대까지, 그녀들과는 원죄(억울하게 뒤집어쓴 죄) 피해자 지원 단체를 통해 알게 되었다. 경찰의 무성의한 수사 태도, 사생활을 까발리는 언론, 가족의 파탄과 범죄자의 자식이라는 사회의 굴레와 차별로부터 가족을 지키는 사명을 띤 단체이다.

그중 마리에, 유키, 히토미 셋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이후, 이어진 어머니의 죽음 이후 고아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이들에게는 세상은 명확하게 이분법적으로 갈린다. 자신들을 지켜주는 원죄 피해자 지원 단체 사람들과 그 외의 사람들. 지원 단체의 젊은 남자들과 사귀면서 그녀들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은 점차 위험한 방식으로 굳어진다.

“그 아이들은 ‘이쪽 편’ 사람한테는 철저하게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할 거야. 예쁘고 똑똑하고 씩씩한 데다 헌신적이니 남자한테는 최고의 여자잖아? 그런 여자를 갖고 싶지 않아?” 나마키가 그녀들 가운데 한 명을 옆에서 보듬어주기를 바란 의사 유코의 냉정한 판단이다.

나마키와 의사 유코는 그녀들이 자칫 이분법적인 세계관에 따라 ‘살인기계’로 ‘각성’을 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이들의 염려와는 달리, 카운슬러 아카네는 이 아이들의 ‘각성’을 기다린 인물이다. 아이들이 충분히 겪은 세상의 비열함에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각성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7명의 살인의 시작은 각성을 막으려고 살인을 계획한 나마키를 먼저 죽이려고 나타난 아카네로부터 시작한다. 한때 연인이었던 아카네의 살인 미수는 섹스를 하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개미인척 개미를 잡아먹는 개미사마귀애벌레처럼 속을 숨기고 접근한 것이다. 이는 이후 나마키의 살인 전략이 된다. 방심한 순간을 노려서 살인을 저지르는 행각은 이어진다. 그리고 살인을 하는 순간, 발기를 통해 내면에 꿈틀거리는 욕망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새, 정의의 심판자에서 살인기계로 전락한 나마키. 옮긴이가 전하듯, 괴물과 싸우는 동안 괴물이 될 수도 있다는 니체의 말처럼 각성을 먼저 한 쪽은 원죄와는 상관이 없는 나마키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아직 각성을 하기 전인 그녀들 가운데 한 명을 각성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고 만다.

가장 친한 사이가 가장 위험한 상대가 될 수 있다는 점은 꽤 그럴듯하다. 하지만 ‘각성’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각성’의 결과로 살인마가 될 것이라는 짐작으로 살인을 하는 나마키의 논리는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나마키가 개미사마귀애벌레처럼 그녀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애초 가식이 아닌 몇 년에 걸쳐 성심껏 그녀들을 세심하게 보살폈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인데, 너무 쉬운 포기에 따른 무리한 선택이다.

물론, 각성을 하기 전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계획하고 저지르는 아카네도 마찬가지, 각성을 이끄는 논리도 그렇지만, 애초 인간을 이쪽과 저쪽으로 쪼개듯 나뉠 수 있는 존재로 구분한다는 게 현실성이 떨어진다. 적어도 ‘사랑’ 혹은 ‘내 사람’을 지키기 위해 남을 죽일 수 있다는 ‘알라우네’식의 논리가 ‘돈’을 위해 살인이건 뭐건 저지르는 현실보다는 나을 수도 있겠다. 그래봐야 결국 각성한 그녀가 깨달은 사실은 ‘내 편’은 오로지 자신밖에 없다는 식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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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세계의 몬스터
정승원 지음, 이창윤 그림 / 삼양미디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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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클라크 원작, 스탠리 큐브릭 감독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는 인류 최초로 도구를 사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에게 강한 힘을 선사한 동물의 허벅지 뼈는 우주로 날아올라 우주선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인류의 진보를 함축적, 상징적으로 표현한 멋진 장면이다.

뼈와 우주선 그 사이, 인간은 그 복잡하고 지난하고 또 지루한 과정을 거쳐서야 겨우 우주로의 여행을 가능했으나, 그 이전에 인간의 상상력은 우주를 날아다녔다. 널리 알려진 봉황이나 인도의 가릉빈가 동아시아의 삼족오는 그 화려한 날개를 가지고 천상과 지상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존재였다.

새를 타고 다니거나 새의 날개를 갖거나 직접 새가 된다면 우주선을 타고 다니는 번거로움은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더욱이 그들이 땅에 속박을 당한 인간과 달리 우주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면서 신을 만나고, 또 신의 부름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면 더욱 안성맞춤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페가수스는 인류 최초의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 비행선 초기 모델인 셈이다. 인간이 타고 달릴 수 있는 말에 날개를 붙인 형상은 자동차에 날개를 단 비행기와 형태와 구조와 기능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그렇게 본다면 유니콘은 전차의 최초 모델이다.) 아무려나 페가수스 역시 포세이돈과 메두사 사이에 태어난 신적인 존재였다. 페가수스는 북유럽 신화로 옮겨 가서 유명한 여전사들인 발키리가 타고 다니는 전투마 역할을 담당한다. 다시 말해 전투기다!

그렇다고 날개를 가진 상상의 동물들이 무조건 추앙을 받는 신적인 대상은 아니었다. 가고일이나 저지데빌 등은 상반되는 존재들인데, 야행성에 익숙지 않은 생김새, 흡혈 방식 때문에 사람들에게 뜻하지 않게 미움과 오해를 받는 박쥐의 형태나 날개를 가진 그들은 악마의 심부꾼들로 분류되었다. 날개의 변주로 남미 칠례 민담에 등장하는 흡혈귀, 촌촌은 인간의 머리만 있는 형태인데, 펄럭이는 커다란 귀를 날개 삼아 하늘을 날아다닌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식의 풍자처럼 읽혀서 꽤 재치 넘치는 괴물(?)이지 싶다.

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시리즈 기획인 <세계의 몬스터>는 신화, 전설, 민담에 다양하게 등장하는 괴물들을 골고루 취합한 책이다. 날개를 가졌다고 무조건 선도 악도 아니고 귀가 때로는 날개가 되는 등 예에서 보듯 지역이나 종교인 이유로 한쪽으로 치우치기 쉬운 상상력의 산물들을 두루 볼 수 있는 재미가 있다.

페이지 배분을 한 페이지 내외로 균등하게 배분한 덕에 그리스 로마 신화로 대표되는 유럽세에 치우치지 않았다는 점은 나쁘지 않지만 같은 이유로 간략한 정보만 제공하는 탓에 몬스터를 소개하는 수준에 그치고 만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몬스터들이 130여 종에 그치는 점도 못내 아쉽다. 용, 스핑크스, 메두사 등 익히 알려진 대표적인 몬스터들은 모였지만, 몬스터가 인간의 상상력의 산실일 뿐 아니라 문둥이, 난장이, 마녀의 일화에서 보듯이 소수자들에 대한 철저한 타자화의 역사를 반증이라는 점에서 좀 더 세심한 배려와 관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일러스트로 대체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한편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만화 캐릭터화한 일러스트는 화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몬스터와, 자체의 수준과 성격에 상관없이, 또 다른 편견을 줄 수 있는 부분이다.

설화부터 신화를 거쳐 종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등장하는 미지의 몬스터에 대한 사전 격이다 보니, 기존 종교, 클래식, 과학자, 신화 등의 기존 상식 시리즈와는 달리 명확한 기준이나 사전 텍스트가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또 아는가? 언젠가 이들이 실제로 세상에 등장할지 말이다.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인간이 세운 생물 체계를 모방한 10가지 분류 기준도 그렇고, 몬스터에 대한 우리의 입장 정리는 분명 좀 더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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