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철학자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김모세.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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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 때문에 예수가 스스로 글을 남기지 않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근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했으며, 아무리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는 텍스트라 할지라도 특정한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어떤 텍스트도 그 자체로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242쪽
 

“신을 매몰시키는 파괴자들의 소란함이 들리지 않는가? 신의 부패가 느껴지지 않는가? 신은 죽었다! 신은 여전히 죽어 있다! 그리고 신을 죽인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이다!”

신의 죽음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쓴 유명한 단상이다. 니체는 기독교에 절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적대적인 사상에서도 계몽주의 유럽의 비판적 이성이 기독교에서 기원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니체는 수도원 등 엄격한 방식의 진실에 대한 탐구, 종교 교육을 통한 의식의 명료함, 신의 법칙을 찾기 위한 과학적 의식의 발전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적인 명료함’에 이르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의식의 명석함은 비판적 이성으로 ‘날이 서게’ 되어 결국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본래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길, 신을 죽인 것은 그 누구도 아닌, 기독교인들이었다.

니체의 말은 기독교에 대한 적대이기 이전에, 기독교에 대한 반성-매우 도발적이고 극단적이며 반성의 여부를 개의치 않았으나-을 촉구하는 글이기도 했다. 니체와 같은 신에 대한 강한 반발은 콩트,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 계몽주의 후기의 철학자들에게서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되었다.

철학자이자 종교사학자인 프레데릭 르누아르는 <그리스도 철학자>에서 그들의 이런 반발은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말한다. ‘서구의 여정을 살펴보면 종교적 제도의 압제로 인해 이성과 법에의 의지가 필연적인 것이 되었음을 볼 수 있’으며 ‘근대성은 고유한 종교적 모태, 즉 기독교라는 모태 내에서 오랜 기간 동안 성숙의 시기를 지나고 난 뒤에야 발전’했고 ‘그 단계가 지난 이후에야 종교적 모태로부터의 돌아섬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모태에 대한 반발, 부정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 혈연관계는 끊으려야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다.

20세기 중, 후반까지 ‘개인과 인간 사회의 필연적 진보’라는 개념은 유럽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원동력‘이다. 그런데 과학, 제도, 국가 등 눈부신 발전을 이끈 이 같은 개념이 중국이나 인도나 아프리카가 아닌 유럽에서 그것도 18세기에 도드라진 이유는 왜일까?

순환이 아닌 무한한 발전을 의미하는 선(線)적 세계관인 진보는 재림과 종말이라는 기독교 종말론에서 기인했으며, 18세기가 진보의 시대가 된 이유 또한 기독교라는 자궁을 막 뚫고 나온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 철학자>는 복음서에 기록된 ‘있는 그대로’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라, 고 역설하고자 하는 책이다.

진보는 ‘사실상 종교적 신화에 대한 극단적 대립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근대의 신화는 스스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종교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유럽의 철학사를 통해서 기독교의 우위를 내세우거나 변명을 하려는 의도를 내비치는 건 아니다.

저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유럽 기독교 역사를 냉정하게 구분한다. 유럽의 뿌리는 기독교가 아니라 ‘그리스, 로마, 켈트를 비롯해 거슬러 올라가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적인 것’이며 기독교가 고대 유산을 흡수하여 유럽의 모태가 되었다고 진술한다. 더욱이 초기 기독교 이후 유럽에서의 기독교 역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리고 왜곡하였으며, 종교전쟁, 면죄부 판매 등 정치적인 사건으로 점철되었고 냉정하게 지적한다.

‘저자는 결국 ’사랑‘에 대한 메시지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사랑이란 가장 평범하고 진부해 보이면서도, 가장 강력하고 궁극적인 가치이며, 인류의 미래가 걸려 있는 가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옮긴이가 말처럼 결국 그의 얘기는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인권 선언으로 대표되는 ‘자유, 평등, 박애’ 등 인류의 보편 가치는 혁명가들에게 있어 이성에 기초를 둔 규범으로 여겼을 뿐,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영감을 받은 가치들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예수님 천당, 불신 지옥’ 식의 밑도 끝도 없는 강요, 간증식의 카더라 식의 설교, 좀 더 나아가 개인의 성숙한 삶을 배경으로 한 ‘양과 양치기’ 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한국 기독교는 이미 포이어바흐가 1841년에 제기한 “종료란 인류의 유아적 본질”이라는 논제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한국의 다른 종교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이다.)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서 ‘유럽의 기독교는 이미 30여 년 전에 거의 빈사 상태’를 무조건 신앙심의 부족으로 치부하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가르침은 중세 민중을 무지로 몰아넣고 면죄부를 파는 짓이나 다를 바 없다. 혹은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알 사실을, 설령 몰랐다고 하면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라고 하신 2000년 전 예수님의 우려(마태 15장 14절)를 그대로 답습하는 꼴이다.

니체, 마르크스에 대한 일부 발췌 폄하를 비롯해 위의 사례는 한 때 교회에 다니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얘기들이다. 누구에게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일지 모르겠으나, 유럽의 철학사를 기독교의 관점에서 되짚은 이 책은 나에게는 복음과도 같은 책이다.

전에 교회에 다닐 때 품었던, 이후 내던져두고 그저 세상 살기에 바빴던, 몇 가지 의문들이 <그리스도 철학자>를 통해 풀렸다. 또한 보잘것없었던 유럽 철학사에 대한 이해 역시 기독교인의 눈으로 보매, 한층 높아졌다. 이제 눈을 맑게 씻어 예수님의 있는 그대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마음에 담고 새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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