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빛>을 리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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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빛 ㅣ 매드 픽션 클럽
미우라 시온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지진해일을 두고 선과 악을 물을 수 있는가, 늙음은 누군들 피하고 싶으나, 그 운명을 두고 악이라고 하지 않듯이 지진해일, 쓰나미는 자연의 섭리이다. 쓰나미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란 고작 바다에서 최대한 경계하고 멀리하는 길 뿐이다. 쓰나미를 피하려고 바다를 찾지 않는다? 늙지 않겠다고 불로초를 찾아 나선 당태종의 헛된 욕망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짓이다.
도쿄 근처의 작은 섬 미하바 주민 271명 중 266명의 생명을 앗아간 쓰나미. 노부유키, 미카, 다스쿠는 2%의 확률로 살아남은 마을 아이들이다. 말 그대로 천운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살아난 이유가 있다.
13살 동갑내기인 노부유키와 미카는 밀회를 즐기기 위해 산사를 찾았다가 목숨을 건졌다. 다스쿠는 노부유키를 늘 따라다닌다. 아버지 요시키에게 잠시도 쉬지 않고 얻어맞는 10살 다스쿠는 먼 친척뻘 형인 노부유키가 유일한 피난처다. 이미 비굴함이 몸에 밴 다스쿠는 노부유키의 냉대에도 늘 따라다닌다.
하지만 노부유키도 다스쿠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한다. 등대할아버지에게 콘돔을 사서 미카와 섹스를 한다는 사실을 다스쿠가 아는 까닭이다. 다스쿠는 입을 다무는 조건이 암묵적인 약속이 된 셈이다.
한가롭고 평화롭게 보이는 작은 섬. 하지만 그 속내는 아이들에게 담배, 포르노 잡지, 콘돔을 팔아 생계를 근근히 유지하는 전직 등대지기, 가정 폭력을 일삼는 요시키, 그리고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마을 주민들의 비열한 세계이다. 그리고 그 영향은 유전병처럼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갑작스런 쓰나미가 지나간 자리에는 평소 모습 그대로 죽은 마을 주민들이 썩어간다. 죽는 순간까지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은 사람들, 시체가 썩는 악취가 진동하는 세상에서 아이들은 비로소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인간의 추악함을 깨닫는다. 게다가 마치 짠듯(?) 살아난 인물은 요시키의 아버지와 미카의 어린 몸을 탐내는 관광객 야마나카와 아이들의 비밀을 아는 등대 할아버지다.
섹스에 눈을 떠서 오로지 미카 생각에 몰두하는 노부유키, 자신의 외모에 끌리는 동급생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미카, 아버지의 매를 피해 도망친 다스쿠. 이 아이들의 은밀한 비밀은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천운이 아니라 저주받은 섬의 운명을 고스란히 질어진 채로, 폐허가 된 섬에서 도시로 나온다.
이제 기존의 이중적인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어른들의 세계다. 노부유키는 미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가정을 꾸리지만 가식으로 사랑하고 일할 뿐이다. 미카는 노부유키를 통해서, 또 야마나카를 유인할 때 체득한 방식으로 가장의 세계인 연예계에 진출한다. 공장을 전전하는 다스쿠는 여전히 아버지가 두렵고, 노부유키에 대해 집착을 한다.
일본 소설의 추세인지 모르겠으나, 극단적인 살인마 대신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은근한 불로 데우듯이 일상을 깨지 않는 숨은 폭력의 속성을 잡아내는 소설류가 눈에 띤다. 잔잔한 웅덩이 밑을 근접카메라로 들여다보면 잔혹하게 먹고 먹히는 야생이 보이듯이 일본 사회를 망원렌즈가 아닌 접사렌즈로 들여다본다.
다스쿠의 노부유키에 대한 오랜 애증을 과연 “오리새끼가 처음 본 뭔가를 어미로 여기듯”한다는 식의 정리, 다스쿠와 노부유키의 아내 나미코가 불륜에 빠지는 계기, 그리고 위에서도 지적했듯 하필 섬에서 살아난 딱 3명인 어른들이 하나같이 이후 사건 전개에 필수불가결한 존재이고, 노부유키가 자신을 이용대상 이외로 보지 않는 미카의 속셈을 뒤늦게 알아차린다는 점 등 몇몇 무리한 설정이 눈에 띤다.
그러나 남편 노부유키와 아내 나미코의 이중적인 관계를 묘사하는 대목마다, 사건 전개와 관계없이 꽤 치밀하고 사실적이라 직격을 날린다. 노부유키의 은밀한 비밀을 모두 알아버린 나미코, 그리고 나미코를 사랑하지도 않고 다스쿠와의 불륜을 뻔히 알면서도 행복한 가정 흉내를 내는 노부유키의 관계가 쓰나미까지 끌고 와서 트라우마를 뒤집어씌우지 않아도 오히려 섬뜩하고 오싹하다.
이들 부부는 이제 서로의 추악한 약점을 알고 있다. 등가의 추악함은 은밀한 거래를 통해 평온으로 이어지고, 이들 부부는 소설 마지막까지 평범한 공무원과 가정주부로 남는다. 현실은 우리가 소설에서 바라듯 권선징악도 아니고, 길에서 만나는 평범한 누구라도 그런 존재일 수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