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탱고 - 파리지앵보다 매혹적인 파리 다이어리
칼라 컬슨 지음, 하윤숙 옮김 / 넥서스BOOKS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아무튼 사진의 힘이란! 우스갯소리로 동네에 “파리△△△” 빵집 한 곳 없는, 대신 떡집과 방앗간은 있는, 시골 동네에 살면서 <파리탱고>를 읽는 내내 사뭇 파리지앵이 된 듯한 기분을 즐겼으니, 참 대단하달밖에.

‘낯선 사람에게 “어디서 오셨어요?” “무슨 일을 하세요?” 같은 질문을 던지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리지앵의 도도함처럼 혹은 바게트 빵처럼 딱딱하고 각이 딱 잡힌 양장본 <파리탱고>의 두꺼운 표지를 착 열면, 막 무대를 향해 바쁘게 종종걸음을 치며 계단을 올라가는 물랭루즈의 화려한 무희의 뒷태가 보인다.

호주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사랑에 빠진 후, 심장의 1/4조각은 파리에 있다는 사진작가이자 칼럼니스트 칼리 컬슨이 살짝 와인에 취한듯 찍고 써내려간 <파리탱고>를 물랭루즈의 화려하고 환상적인 무대처럼 즐기라는 권고이다. 

초연 당시 낯 뜨거운 춤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온 무희들의 캉캉춤이 대표적인 댄스클럽 물랭 루즈(붉은 풍차)는 그 길고 긴 역사 동안 전소가 되거나 파산 위기에 몰리는 등 위기를 겪었지만 에디트 피아프, 이브 몽탕, 조세핀 베이커 등 프랑스가 자랑하는 가수들이 무대를 빛낸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클럽이다. 물랭 루즈는 단순히 여흥을 즐기는 클럽을 넘어서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처럼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파리지앵이 즐겨 찾은 천국 같은 곳이다. 바게트 빵의 부드러운 속살 같은 곳이라고나 할까. (물랭 루즈 무희들은 ±2kg가 넘으면 해고일 정도로 엄격하다. 자유로운 듯하지만 완고한 파리지앵의 특성이랄까, 바게트 빵의 겉면이랄까.)

<파리탱고>는 물랭 루즈의 화려한 무대보다 이면의 무희들을 사진에 많이 담았는데, ‘10센티미터 하이힐을 신고 15킬로그램짜리 머리장식’을 머리에 얹은 채로 가슴을 드러내고 춤을 춘다는 정도만 보면 신문 사회면이 떠오를 법하지만 천만에, 자부심과 자긍심이 무희들은 ‘천박하기는커녕 우아하고 유쾌’하기만 하다.

예의와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새로운 변화와 변혁에 관대한 파리지앵의 사례로 물랭 루즈가 가장 인상 깊었던 이유는, 늘 새로운 쇼를 고민하는 기획팀 멤버의 나이가 81세, 79세, 77세라는 점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 계속 있는 건 열정 때문이지요. 단지 늙었다는 이유로 팀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비록 우리는 늙었지만 이 쇼는 결코 늙은 쇼가 아니니까요. 중요한 것은 젊은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파리지앵들을 취재한 이 책에 실린 글이 대부분 약간 들뜬 기분에 써내려간 것은 맞지만(읽다 보면 덩달아 붕 떠오른다), 낯선 이들에게 파리가 그리 만만한 곳만은 아니고,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의 종종 파리의 변화에 대한 애잔함이나 아쉬움을 토로하는 부분도 놓치지 않았다. 낭만적인 생각으로 찾아온 예술가들에게 파리는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도시이고, 런던이나 뉴욕처럼 기업후원금이 후한 곳도 아니다. (커피 한 잔에 4유로, 현재 환율로 대략 6800원 꼴이다.)

그러다보니 파리 외곽의 버려진 건물이 예술 불법 점거 세력의 본거지가 되었고, 이들은 이른바 ‘문화적 목적’으로 사용할 경우 국가에서 사용 권한을 받아서 사용했다. 그러나 이런 풍토도 바뀌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설치예술가 카를로스 레가소니는 10년 동안 사용했던 철도국 창고를 재개발 목적을 앞세운 파리시청에게 내줘야 할 판이다.

그럼에도 파리는 여전히 흥겹다. 제목에서도 드러나지만 작가가 바라본 파리의 모습은 순혈주의에 속박당한 파리지앵들의 모습이 아니다. 파리에서 도착한 그날부터 파리 아프리카인의 아름다움에 매료당한 저자는 몇 블록 지나서는 남미의 탱고와 살사의 매력에 또 흠뻑 빠진다. 

전통과 변혁이 절묘하게 맞서면서 뒤서거니 앞서거니 하는 파리에서 사는 그들은 과연 누굴까? 작가가 물어본 파리지앵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놓는다. 그중 가장 그럴듯하게 들리는 정의를 옮기자면 이렇다. “벨르빌에만 140개나 되는 인종이 함께 뒤섞여 사는 도시에서는 여러 세기에 걸쳐 다양한 층의 이주자가 뒤섞여왔지. 모든 파리지앵의 몸속에는 이주민의 피가 흐르고 있어. 이게 바로 파리야.”

그러니 책 옆에 바게트 빵 대신 떡을 놓고도 얼마든지 파리지앵의 기분에 취한 내 자신이 부끄러울 게 없다는 것이지.***

 <밑줄긋기> 

어느 비오는 날 퐁피투센터 바깥에 서 있을 때의 일이다. 나이 든 여자가 리처드 로저스에게 자기 우산 밑으로 들어와 비를 피하라고 했다. 리처드는 여자에게 자신이 이 앞에 있는 건물을 지은 건축가라고 소개했다. 여자는 로저스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우산으로 로저스의 머리를 내리쳤다고 한다. 161P 

“지난 5~6년 사이에 뭐랄까 자긍심 같은 게 생겼어요. 파리지앵에게 딱 어울리는, 사치스러우면서 별난 구석이 있는 것을 지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가서 퐁피두센터를 한 번 보고 스스로에게 물어봐요. 대체 어떻게 저런 걸 짓도록 허용했을까? 그곳에 갈 때마다 잠시 멈춰 서서 내게 묻지요. 저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저런 걸 짓도록 허용했을까?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에요! 건축가가 저렇게 와일드한 건물을 설계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지요. 하지만 진짜 광기는 저런 걸 짓도록 허용해 준 사람들 속에 들어 있어요. 이것이 파리지앵만이 갖는 특별함이지요. 그들에게 커다란 비전이 있어요.” 162P

“영감은 우연히 찾아와요. 그러므로 깨어 있는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봐야 해요. 향기도, 유리창에 비치는 햇빛도, 겨울 낙엽도 그냥 무심히 봐 넘겨서는 안 돼요. 모든 것 속에는 기회가 숨어 있고 그것을 잘 이용하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죠.” (파리 오트쿠튀르 수석재단사 스테판 마에아의 말 중에서) 253P

4년이 흐른 지금 내 심장의 나머지 조각은 파리라는 특별한 세계에 깊이 박혀 있다. 아주 소소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파리지앵의 마법 같은 생활 방식 속에 빠져 있다. 3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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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가 온다
백가흠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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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등지느러미를 슬쩍 디미니 수면에 ‘틈’이 스윽 부드럽게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자의로든 타의로든 그 ‘틈’으로 몸 전체를 내밀어서는 안 된다. 이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을 찢고 나오면서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는 첫 번째 룰이다. 그렇게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배를 깔고 눕는다.

“나는 물 밖으로 광어를 꺼내어 부엌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얌전하고 묵직했던 광어는 부엌 바닥에서 펄떡거린다.” (소설집 중 <광어>일부분)

밖에서 요동치는 모습에서 죽음에 대한 강한 거부는 한 순간 사그라진다. 수족관 유리창 너머는 아직 ‘남의 일’일 뿐이다. 물론 두렵고 불안하기는 하다. 그러나 수면의 낮은 떨림은 곧 가라앉고 잔잔해지지 않던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 불안은 또 다시 무뎌진다. 아늑한 공간이 있을 뿐이다. 수족관은 이내 조용해진다.

마감뉴스를 보고 있다. TV도 전등도 끄고 누우면 방금 전까지 화면 너머로 보이는 사건, 사고, 전쟁에서 잘린 팔다리와 매캐한 탄내와 신음소리는 홀연 휘발하고 만다. 그런데 백가흠의 첫 소설집 <귀뚜라미가 온다>에서는 이 모든 게 현실로 끈적끈적 엉겨 붙는다. 이때의 당혹스러움은 석유란 게 편리하기만한 휘발유, 경유 정도려니 했으나 사실은 냄새만 맡아도 쓰러질 지경인, 독성물질이 가득한 타르덩어리임을 알린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사태의 트라우마와 비슷하다.

백가흠의 신춘문예 당선작이기도 한 <광어>는 “자신이 회쳐지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살을 살짝, 아주 살짝 남겨놓”는 주인공의 능숙한 칼질에 대한 독백으로 시작한다. 상식, 윤리, 도덕 등 우리가 뭐라고 부르던지 간에 질기고 두꺼우리라 믿었던 경계를 사정없이 저민다. 알고 보면 그 경계란 게 나약하고 연약하기가 그지없다.

자칫 칼이 내장을 건드리고 만다. “살짝이지만 그래도 그놈들은 곧 죽는다. 나에게 있어 살짝은 그놈들에게는 치명적인 것이다.” 허나 “무채를 수북이, 깊숙이 쌓아주”면 그만이다. 가두리에서 수족관으로, 이어 도마 위에서 헐떡이는 순간까지 지탱해준 경계가 죽음의 첫째 이유인 두꺼운 속살이라는 아이러니를 불러일으킨다. 현실에 거칠게 대입하자면 전쟁, 기아, 종교 대립 등 부조리한 현실을 비켜나게끔 해주리라 믿었던 정치, 언론, 법 등 합리적 이성이 추구한 결과물에 대한 탁월한 조롱으로 읽힌다.

“이곳 춘천 말고는 익숙한 곳이 없”는 횟집 종업원인 남자는 손님의 애를 밴 룸살롱 여급을 위해 자신의 경계를 허문다. 통장을 허물고, 사장 몰래 손님을 협박해 술 외상값을 받아낸다. 술집에 얽매인 몸값을 마련해서 여자를 찾아갔지만 아침에 “여자와 함께 잠이 깼으나” 여자가 돈과 통장을 들고 몰래 도망칠 때까지 남자는 죽은 듯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여자가 떠난 후 남자가 고스란히 휴지통에 버려진 광어회를 우적우적 씹는 장면은 카니발리즘을 연상케 한다.

태안 앞바다에 기름을 쏟은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의 ‘SPIRIT’은 마치 석유에 기반을 둔 물질문명에 대한 경고처럼 보인다. 이번 사태가 단순히 ‘부주의’ 때문이 아님을 경계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소설에서 광어를 씹는 마지막 대목이 자꾸만 겹쳐지는 부분이다.

 
<귀뚜라미가 온다>에는 이처럼 경계의 속살 안에 감추어진 무뎌진 신경을 건드리는 찌릿찌릿한 소설이 여덟 편이 더 있다. 찌릿한 이유가 작가가 차용한 피학적 헌신, 가학적 폭행, 강간, 신성모독 등 리비도로 해석되는 광폭성 때문이 아님을 작가의 등단작이기도 한 이 작품에서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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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자본주의에 도전하라 - 영악한 자본주의 뒤집기
전병길.고영 지음 / 꿈꾸는터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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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무역은 중도다. 그래서 좌파와 우파의 공격을 모두 받는다. 우파로부터는 시장 질서를 교란시킨다는 비판을 받지만, 좌파로부터는 현재의 잘못된 구조들을 바꾸지 못하고 제국주의의 잘못을 고착화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120P

새로운 자본주의 위코노미란 ‘WE’(우리)와 'Economy'(경제)의 합성어인데, 파편화된 ‘개인’이 아니라 협력․참여․공생하는 ‘우리(We)'가 주인공인 자본주의를 말한다. 양극화와 같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우리의 힘으로 극복하려는 일종의 새로운 자본주의 실험이다. 전통적 자본주의가 무시해온 약자 배려, 환경보호 같은 사회적 가치를 자본주의 체제 안에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형태로 구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238P

대기업 토목공구장이었다가 지난달에 희망퇴직을 한 선배 K는 새 직장을 알아보는 와중에도 곧 있을 기술사 자격증 시험 준비에 하루 10시간 이상을 쏟았다. 적지 않은 나이에 대입 수험생마냥 치열하고 진지한 자세가 대단하다 싶어 그 이유를 물었다.

“내 하루 일당이 얼만 줄 알아? 알면 허투루 못 보낸다.” 짐짓 자랑스레 늘어놓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K가 구직활동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전화기를 그렇게 초조해하며 바라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난 5월 1일자 신문에 ‘곡우에 4천600억 원짜리 단비 내렸다’는 기사가 실렸다. 4월 20일 경에 내린 비의 경제적 가치를 분석해서 발표한 것이다. 오랜 봄 가뭄을 해갈한 단비이니 반가운 마음이야 더할 나위 없지만, 한편으로 돈 가치로 환산하지 않으면 실감하지 못하는 세태를 반영한 듯하여 씁쓸했다. 자연 현상을 상호 관계가 아니라 물적 가치로 해석한 이 기사는, 정작 환경 위기에 대한 경각심보다는 자연스럽게 가뭄 해소를 위한 댐 건설의, 특히 그 막대한 건설비용의 당위성으로 연결되겠구나 싶었다.

약육강식의 자본주의라는 잣대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면 말 그대로 돈독이 올라서 돈 가치가 없는 것들을 무색무취무미하게 대하거나 일부러 돈으로 탈바꿈시킨다. 이기적인 자본주의는 사람을 단순히 탐욕에 젖는 정도가 아니라 어느 순간 사고를 정지시킨다. 눈가리개를 쓴 경주마처럼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게 되면, 다른 논리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리고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경주마는 폐기처분된다. (K선배는 자칭 ‘4대강 정비사업’을 맡을만한 기업에 가고 싶어했는데, 관련한 대운하 논쟁에는 관심이 없었다. 또 그가 경력으로 말하는 몇몇 도로는 중복투자 문제, 환경 평가 미비 등의 문제가 제기된 곳이었다. 하지만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에게는 열심히 일할 만한 곳 혹은 일한 증거일 뿐, 전혀 논의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물 경제가 아닌 데이터 상의 자료만 오고가는 ‘가상의 돈 잔치’인 미국식 금융정책이 세계를 공황 상태로 몰아넣은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의 실체를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다. 승자독식, 그러니까 ‘나만 위한 자본주의 사회’의 완성은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 1999)’의 은유처럼 착각이고 허상이다. 일개 인터넷 논객의 입바른 소리조차 용납 못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강한 수면제를 찾아서 여전히 꿈을 찾아 헤매는 중이다.

좌파는 여전히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우파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지지한다. 그렇다면 이제 사회주의가 해답인가? 실제 삶은 영화와 달라서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 중 하나를 선택하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실패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아닌 선한 자본에 기초한 경제가 조금씩 기반을 다져가고 있음을 발견”했다고 선언한다.  

이들이 말하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키워드는 ‘우리(We)'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움직이며, 동시에 자본주의는 우리를 위해 공헌하는 공생․협력의 패러다임인 위코노미(‘WE’와 'Economy'의 합성어)를 주장한다.

위코노미라는 조잡하게 들리는 이 단어 조합을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는 공동저자인 전병길과 고영이 구호만 외치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실증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실제 현장에서 위코노미에서 적용, 배양하고 있는 30대 젊은 활동가들이다.

기독교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청교도 나눔 정신부터 현재 박원순의 희망제작소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자본주의와 관련된 사례를 끌어 모은 백과사전이자, 현재 사회적 기업가와 SCG(전문가 재능기부 단체, Social Consulting Group)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실험 적용 중인 중간 보고서이기도 하다.

사회적 기업, 공정무역, 마이크로크레딧, 사회책임투자,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 현재 활발하게 번지고 있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사례를 한 데 모아 큰 틀로 묶어내어 위코노미의 개론서 역할도 충분히 해낸다.

다만 이들의 말하는 변혁이 공정무역의 중도적 입장에 대한 좌우파의 논란에서 보듯이 한계를 드러낸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한정지었다는 점, 저자들이 세세하게 모은 사례들이 호혜 정신에 바탕을 둔 나눔으로 이를 자본주의로만 규정할 수 있는가, 라는 점, 그라민 뱅크 등 몇몇을 제외하면 아직은 지엽적인 효과에 그쳤다는 점(이 역시도 도리어 자본주의의 고착화 비판이 유효한 지점이다)은 역으로 위코노미의 순항을 낙관하지 못하는 이유로도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열거한 사례들은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조짐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5년 동안 자료를 모아 3년 간 집필한 책 내용에는 출판되기 직전(2009년 4월 1일 초판)까지의 진행 사례는 물론, 저자 이전에 운동가인 이들이 참여하는 SCG의 올해와 내년의 목표가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다. 다시 말해 대안과 희망을 얘기하는 이 책의 1년 후 가치가 저자들의 노력과 성과 여부에 따라 판가름 난다는 것이다.


단순히 성과를 냈느냐를 가지고 이 책을 가치를 논할 수 있을까? 하지만 공산주의를 노동자를 선동한 이상주의라고 치부할 정도로 현실주의자인 그들의 결의에 일말 기대를 걸게 된다. 그나마 세계에서 경제 위기의 여파가 덜 하다는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배수진을 칠 정도로 다급하고 악화된 상황 탓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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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기술 - 심리학자 가브리엘 뤼뱅의 미움과 용서의 올바른 사용법
가브리엘 뤼뱅 지음, 권지현 옮김 / 알마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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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례21에서는 매년 화두를 정해서 인터뷰 특강을 진행한다. 강연을 풀어서 책으로도 출간하는 꽤 유명한 특강의 올 해 주제가 ‘화’이다. 작년을 돌이켜볼 새도 없이, 초반부터 힘겹고 숨 가쁜 일들이 옥죄고 들어오는 2009년이고 보면, 시의적절한 주제이지 싶다.  

지난 3월 14일, 일명 ‘화이트 데이’ 때 신문 기사를 보면 선물을 하려고 절도를 저지르거나, 선물이 주고받는 와중에 큰 싸움을 벌인 사례가 적지 않게 실렸다. 상술이네 아니네를 따지기 전에 적어도 이날만큼은 평소보다 좀 너그러워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렇지도 않은 빛 바랜 기념일이었다. 

이날 일들을 가십 정도라고 넘기기에는 요즘 주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화가 쌓일 대로 쌓인 게 눈에 보일 지경이다. 그 원인이나 대상을 가리지 않고 하나같이 독이 바짝 올라있다. 계절은 부드러운 봄인데 벌겋게 달아오른 세상은 8월처럼 뜨겁다. 

무엇이 우리를 자꾸만 달구는 걸까. 한겨례21에서 진행하는 인터뷰 특강이 보는 관점도 그렇지만 그 정도가 화를 참아 넘길 수 있는 수준은 넘어선 듯하다. 관련하여 요즘 출판, 강연, 언론의 초점은 화를 어떻게 풀 것인가, 다시 말해 화를 '잘' 내는 방법에 맞춰져 있다. 

프랑스의 심리학자 가브리엘 뤼뱅이 쓴 <증오의 기술>은 요즘 세태를 딱 대변하는 제목을 달고 나온 책이다. 그래서 ‘당당히 미워하라. 당신의 증오는 정당하다. 부당한 죄책감에서 벗어나 마음껏 미워하라’는 책날개에 붙은 문구가 매혹적이다.

<증오의 기술>은 대중을 위한 쉽게 쓴 책이지만 학회보고서를 풀어 쓴 듯한 인상이 짙다. 책에서 다루는 사례가 근친상간의 피해자 등 주로 증오의 대상을 가족 관계(가장 뛰어넘기 힘든)로 한정을 지은 데다, 이들은 정신과 의사인 저자와 상담을 했던 경우인 까닭이다.

특이한 점은 피해자들이 어느 정도 경제적 혹은 지적 능력을 갖추었거나, 그럴만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사회생활에서 아예 낙오를 하는 경우도 소개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어린 시절 미숙했을 때 입은 엄청난 트라우마에 비해, 아슬아슬하나 비교적 사회생활에 적응을 하여 성공한 이들이다. 

게다가 특정 사례이긴 하지만, 피해자들의 증오가 정당한 근거를 프로이트가 주창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두다보니, 특정 계층의 적개심을 품은 대상이 분명한 특정 상황을 특정한 근거로 풀어내는 식이다. 이런 점은 이 책의 미덕인 동시에 한계로 짚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2009년 한국 사회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저자가 사례를 든 피해자들은 감당하지 못할 증오를 아예 기억에서 소거를 하거나, 다른 식으로 포장을 하기도 하지만 트라우마를 이기기 위해 어려서부터 공부나 사업으로 에너지를 쏟아 부어 어느 정도 성공에 다다랐거나 혹은 가능성이 높은 경우이다. 이는 스트레스를 즐겨라, 혹은 즐겨야 이긴다는 식의 무한경쟁체제인 한국 사회 내의 암묵적 동의와 형식상 유사한 점을 보이는데, 일제와 6.25동란과 군사 정권을 거치는 동안 겪은 트라우마를 경제적 성장을 목을 매달아서 성공을 거둔 한국의 현대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확실히 겹치는 부분이 보인다.

문제는 그들은 높은 학력과 경제적 성공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이룬 사회적인 성공도 답보 상태이다. (사실 가장 뼈아프게 읽혔던 점이다. 내면의 불안이 인간관계, 즉 사회생활에서 문제를 일으킬 조짐을 보이는 지점에서 피해자들은 저자를 만나서 치료를 받았다. 만약 무한 경쟁에 보다 너그러운 한국이었다면 ‘경쟁 기계’인 그들이 여전히 성공에 도취된 상태이지 않았을까.)

자칫 증오를 이겨난 성공사례 수기를 쓸 뻔했던 이들인 만큼(한국인인 내가 보기에), 그 단단하게 쌓아올린 무의식의 벽을 허물고 다시 쌓는 작업이 만만할 리가 없다. ‘증오의 정당화’는 이 지점에서 나온 해결책이다. 아문 듯 보이는 상처를 헤집어서 도려내는 수술은 일정부분 내 살을 같이 도려내야할 용기가 필요하다. '아버지의 아이를 갖고 싶은 욕망이 조지안에게는 비극적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은 모든 아이가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한 오이디푸스적 환상의 해석일 뿐이다. 조지아의 불행은 아버지가 근친상간을 통해 ‘현실을 정상적인 환상으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환상은 강한 파괴력을 갖게 되었고 결국 정상적으로는 아무런 피해를 유발하지 않는 환상을 끔찍한 현실로 탈바꿈시켰다.' 85P 중에서

한때 화가 났을 때 남을 탓하거나 스스로 자책하기보다는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책들이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다. (물론 이 책에서 말하는 논지와도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문제는 화가 사그라졌다 한들 그 불씨를 완전히 끄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도리어 끌 수 없다고 단정을 내린다. 그리고 태울 부분과 태우지 말아야 할 부분을 경계를 짓는다. 정신과 의사이면서도 마치 외과의처럼 문제를 접근한다.    

저자는 ‘욕망의 지배를 받는 믿음과 환상이나 망상에는 아주 근소한 차이가 있을 뿐’이라면서도 ‘망상은 현실과 모순되고 환상은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다’라고 전제를 단다. 하지만 '모든 아이가 가질 법한 평범한 오이디푸스적 환상’이라는 진단은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어쨌건 논리의 정당성을 떠나 피해자가 꺼내길 두려워했던 자신의 욕망을 인정했을 때 치료가 가능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증오의 기술’이란 늑대의 이빨처럼 무턱대고 드러내라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매우 섬세하고 조심스러우며 높은 집중을 필요로 하는 고난이도 기술이다.

적어도 뒤를 돌아볼 여유 없이 빠른 속도를 요구하는 동안, 문제에 대한 접근조차 용납하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도리어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아울러서 모든 삶의 역역에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암묵적으로 강요 또는 인정하는 분위기에서 가브리엘 뤼뱅의 어렵고 까다로운 치료 사례가 한국 사회와 만나는 교집합에 주목한다면 최소한 마지막 거름막인 국가인권위원회 조직 축소와 지역사무소 폐지 논란이 왜 문제이고 앞으로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솔직히 그 만한 기술이 있지도 않고, 기술로 인정하지도 않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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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상상력 : 교사와 부모가 함께 그리는 행복한 교육 - 교육과 미래 1 아로리총서 11
김찬호 지음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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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상상력이란 화두는 경직을 지나 갈등의 골이 갈라지고 산산이 깨지기 직전의 한국 사회에서, 특히 일제고사 자율 선택 교사 해임 등 교육의 위기를 체감할 수밖에 없는 요즘에는 필요하다 못해 절실하다. 그러나 둘 사이의 연계가 새로운 개념인가 하면 또 그렇지 않다.

사회의 다양한 창구에서 누누이 강조를 해온 말이 또한 교육의 상상력이 아닌가. 심지어 1%를 위한 경쟁을 강조하는 입시 학원 홍보 문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사방에서 남발하다 보니 정확하게 그 본의가 무엇인지 실천에 앞서 개념조차 잡기 힘들다. 몇몇 유명 학원장이나 이에 동조하는 출판업계, 언론에 따라 교육의 상상력은 딱 ‘대입까지만을 위한’ 마취제 취급을 받아왔다. 절대 규격화할 수 없는 ‘상상력’을 이해관계가 얽힌 특정 틀에 짜맞추다보니 정반대의 개념이 상상력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돈다. ‘한 시간 덜 자고 공부하면 아내의 외모가, 남편의 능력이 달라진다’는 식이다.

딱 까놓고 말해, 대학서열에 따른 부익부빈익빈의 관계가 그대로 승계되는 독과점의 한국 사회에서 이보다 현실적으로 와 닿는 말이 있을까. 아이들의 머릿속은 돈, 외모에 필이 확 꽂힌다. 하지만 이건 줄 세우기에 대한 비판에 앞서, 아이들 자신의 삶을 위해서가 아닌 앞선 세대가 잡고 있는 기득권에 대한 두려움이 깔린 강요이자 답습이다. 
 

김찬호 교수의 <교육의 상상력>은 책 제목에서 교과서 외에도 성적을 효과적으로 올리고 싶은 부모를 위한 또 하나의 맞춤 전략서 뉘앙스를 풍긴다. 장담컨대 이 얇은 문고판 책은 아이의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될 만한 지침을 풍성하게 담고 있다. 허나 입시가 삶의 행복을 위한 필수담보조건이 아닌 충분조건임을 부모와 교사가 인정하고, 스스로가 먼저 ‘삶의 상상력 부재’ 극복해야 한다는 선행 과제를 같이 던진다. 그렇다고 전복적이거나 도발적인 흥미 위주의 튀는 주장을 담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책 내용 중 학교를 넘어선 교육, 가정교육의 강조, 예술 감수성 강화 등은 익숙한 논제이다. 허나 학교를 넘어선 교육이 학원이고, 가정교육의 강조가 아이 위주의 분위기 조성이며, 예술 감수성 강화가 피아노 학원 보내기로 귀결되는 학부모의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깨고나와 각성을 하라고 주장한다.
 

예술을 통해 감수성과 창의성을 키운 위대한 과학자를 키운 예시가 ‘청소년의 예술 교육 기회의 확장’이라는 뻔한 수순이 이어지지 않는다. 아이들과 밀접하게 매개된 대중문화가 감수성을 키우는 대신 “대량 복제된 이미지와 자극에 매몰된 일상은 긴 안목으로 자기를 연마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능력을 감퇴”시키고 “청소년들에게 교육과 문화는 이율배반적인 영역으로 존재하는” 현실을 먼저 문제 제기한다. 
 

그렇다면 예술 관련 학원 교습이 대안일까? 성적에 집착해 요령만 배우고 근본 원리 터득에 소홀한 교육 방식이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우지만, 정작 피아노 연주회장은 대부분 썰렁”한 원인이라고 꼬집는다. 아이들이 비좁은 학교(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다양한 영역에서 벌어지는 창조적인 실험을 접하고 상상력과 감수성을 신선하게 일깨우는 만남을 지속적으로 제공할 것을 당부한다. 
 

또 교사(부모)의 역할이 단순 정보 창구에 그치는 게 아닌 자기 삶에 대한 애정을 가질 것 또한 요구한다. 이런 논의는 자연스럽게 아이들 교육을 위해 학교(학원)을 넘어서는 소통의 확대와, 이를 위한 기본 과제로 가정 내에서의 부모와 자식의 관계 회복을, 또 회복을 위해서는 부모 역시도 평생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으로 그 원류를 거슬러 올라간다. 결국 최우선 과제는 나 자신부터의 삶의 상상력 회복이 세대의 ‘지속가능한 삶’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다는 당부로 이어진다. 
 

<교육의 상상력>은 두 딸의 아버지이자 대학에서 교육학을 가르치는 저자의 전공이기도 하거니와, 한국 사회 거의 전반에 벌어진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글을 쓰는 팔색조 같은 사회학자이자 논객으로서의 능력이 발휘된 저서이다. (아로리 총서는 ‘교육과 미래’ 첫 시리즈로 이 책을 선택한 동시에 ‘문화와 트렌드’ 첫 시리즈로도 같은 저자의 <휴대폰이 말하다>를 출간했다.)  

가깝게는 대학 졸업 이후의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하는 20대 젊은 세대를, 멀게는 경쟁 체계에 내성이 생긴 빈곤한 기성세대를 역으로 짚고 올라오면서 ‘삶을 보다 행복하게 사는 법’에 대한 해결 실마리를 찾는다는 점에서 독자층이 사방팔방으로 확산된다. 

요즘 토목공사 현장에서도 남발되는 ‘녹색’, ‘친환경’을 보면 그 본의와 정반대로 홍보 카피로 전락한 아이러니를 본다. 여교사 성희롱으로 파문을 당한 교장은 복귀해도, 일제고사를 거부한 교장은 정직 처분을 받는 현실이다 보니, 신물이 올라올 판이다. 그래도 아이들 교육을 포기할 수는 없잖은가. 꼭 한 번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밑줄 긋기> 

우리는 구체적인 경험과 대상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다. 많은 정보를 두뇌에 입력했지만 구체적인 경험과 대상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지 못했다. 지식을 통합하고 재구성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박약하다. 38p

탁월한 비즈니스 마인드는 자기가 하는 이에 대한 애정과 꾸준한 학습, 삶에 대한 진중한 태도, 자아와 타자를 잇는 관계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에서 움틀 수 있다. 45p

어떤 목표를 스스로 정해 성취해 보는 경험은 인간의 성장에서 매우 중요하다. 62p

결국 핵심은 삶에 대한 애정이다. 자기의 창조성에 대한 믿음이다. 자기와 잘 사귀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다. 7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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