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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뜨는 봄 (반양장) ㅣ 지만지 고전선집 157
프랑크 베데킨트 지음, 김미란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무대와 객석으로 갈렸다고는 하지만 밀폐된 극장 안에서 배우와 관객이 동일한 시간을 동일한 목적으로 호흡을 하는 내내, 연극 내 상황은 현실로 흘러 들어온다. 배우가 먼저 객석과 무대에서 서로 마주보면서 보이지 않는 가상의 막을 허물고 관객을 끌어들이면 이제 관객이 반대로 무대를 지배한다.
극장에서 내가 관객으로 배우들과 만나는 순간, 내 인생과 배우의 인생이 서로 또 한편의 연극을 올리는 셈이다. 극장을 가고 오는 와중에 나와 배우들이 피할 길 없이 맞으면서 감내했던 비는 우리를 동일한 무대 위에 올려놓고 누군가가 조망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일 것이다. 적어도 연극을 보는 과정은 우리가 무대 위에 있다는 의식을 또 다시 상기시킨다.
그래서 극장은 카페의 달콤한 여유나 술집의 떠들썩한 흥분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무대와 객석은 이질적인 그들과 내가 전혀 다른 의견을 가지고 팽팽하게 밀고 당기는 공간이다. 그래서 옆 사람의 땀내와 기침과 성가신 움직임을 참으면서 두 눈과 두 귀를 확실히 열어서 머릿속에 우겨 넣어야 하는 곳이다.
사건 현장에 도착한 사회부 기자가 그렇듯 ‘연극 보기’는 이성과 야성을 동시에 요구하는 긴장의 연속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무대 위에서 낯설고 생경하며 불편한 새로운 탈주가 시작되면 우리는 배우들이 보여주는 ‘경험’을 실제 ‘경험’처럼 받아들인다. 그래서 극장에서 나오는 나는 들어가기 전의 나와는 다르다. 다만 그 조율은 주로 나보다는 연극을 올리는 배우와 그 뒤의 감독과 태초의 극작가의 몫인 경우가 많다.
하여 19세기말 독일 표현주의 희곡작가 프랑크 베데킨트의 <눈뜨는 봄>(1981년 작)은, 연극이 왜 가장 오래된 장르이면서도 가상 체험의 시대인 지금껏 왜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희곡 중 한 편이다.
비스마르크의 철혈 정책과 빌헬름 2세의 통치 등 봉건적 절대주의 시기였던 19세기 말 독일의 상황을 감안하면 당시 청소년의 임신, 자위, 동성애 등 금기시 되었던 성(性) 문제를 가감 없이 드러낸 <눈뜨는 봄>은 엄청난 사회적 스캔들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무려 15년 뒤인 1906년이 되어서야 무대에 올라갈 수 있었다.
학교, 가정, 종교라는 획일적 통제 아래 학생들의 좌절과 저항을 다룬 <눈뜨는 봄>은 청소년의 권리와 인권에 대한 분출과 막 자유로운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시민사회(봄)와 통제와 관리를 하려는 지배 계급(겨울)의 간의 갈등 구조로 읽을 수 있다.
작품에서 2차 성징을 겪는 호기심 많은 딸 벤들라에게 고심 끝에 “아기를 학이 물어다 준다”는 식의 설명을 하는 어머니 베르크만 부인의 태도는 100년 지난 지금 보면 웃지 못 할 코미디처럼 들린다. 하지만 당시에 비해 성이 자유롭게 개방된 지금도 청소년의 성 문제는, 어느 국가와 사회를 막론하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골칫거리이다.
학 배달부 따위의 금욕적인 성교육을 받은 순진한 벤들라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임신을 하는 대목은 지금 와서 보면 희극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허름한 병원에서 낙태 수술을 받다가 목숨을 잃은 벤들라나 진급 시험에서 낙제하자 부모님을 실망시킬 일이 두려워 자살을 선택한 모리츠는 쉬지 않고 반복되는 15살짜리 사건사고이다.
결혼 제도를 통해 성을 통제하면서 사회가 성립되었다는 역사를 돌아볼 때, 청소년의 성 문제는 단순히 나이 또래의 성적 미숙함과 욕구 불만으로 인한 성 문란으로 치부될 성격이 아니다. 사회의 기반인 결혼을 유지할 만한 능력과 자질도 갖추기 전인데다, 학교를 통해서 사회에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청소년들의 성적 충동은 자칫 사회 기반을 흔드는 위험 요소라는 식이다. 그래서 사회 기준으로 볼 때, 준비할 자질이 없는 모리츠의 죽음과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아기를 가진 벤틀라의 죽음은 동일 선상으로 묶인다.
같이 사랑을 나눴다는 이유로, 벤틀라가 집안의 명예를 위해 비밀리에 낙태 수술을 받다가 죽음에 이른 책임을 추궁당하는 멜히모어는 모리츠의 자살마저도 성교육에 관한 글 <동침>을 써줬다는 이유까지 더해 학교와 집에서 낙인이 찍힌다.
자유정신의 표상격으로 그려지는 멜히모어는 김나지움 퇴학에다 획일적인 사고로 뜯어고치기 위해 감화시설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그가 꿈꾸었던 사상(아기)은 밖으로 나와 보지도 못하고 사살(낙태)되거나, 통째(권총 자살로 날아간 모리츠의 머리)로 떨어져 버렸다.
이후 무덤가에서 만난 유령이 된 모리츠의 유혹은 멜히모어를 자살에의 충동으로 이끈다. 이때, 멜히모어 앞에 생뚱맞지만 복면의 신사가 등장한다.
멜히모어 : 당신은 누구예요? 누구예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날 맡길 수는 없어요.
복면의 신사 : 널 나한테 맡기지 않고는 날 알 수 없어.
복면의 신사의 정체는 누구인가? 어른이라는 점에서 멜히모어는 강한 반발심을 품는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그가 누군지는 모른다. 누군지 모른다는 얘기는 그가 존재로써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앞으로 얼굴을 채워나가 할 미지의 존재라는 의미이다. 적어도 얼굴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반사회적인 선동가 혹은 범죄자 등 획일화 사회에서 탈주를 감행하는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멜히모어가 신사를 따라 나서면서 희곡을 끝이 난다. 앞으로의 미래는 김나지움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인정을 받았던 멜히모어의 과거는 전혀 쓸모가 없는 미지의 길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날 어디로 끌고 갈지 모르지만, 어쨌든지 인간”의 길이다.
‘인간의 길’이라는 멜히모어의 고백은 희곡에 등장하는 기성세대를 양성하는 선생들의 이름이 아펜슈말츠(원숭이 비계), 홍거구르트(몽둥이), 조넨슈티히(일사병) 교장 등 비인간적이라는 것 말고는 공통점조차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전복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다만 ‘당위성’과 ‘의지’의 두 가지 상상력이 도덕, 즉 현실 체제를 만든다는 신사의 가르침을 멜히모어가 수긍한다는 점에서 어른(기존 체제)을 완전히 뒤엎는 세상을 꿈꾼다기 보다는, 변화와 개혁에 좀 더 비중을 두지 않았나 싶다. 예술가는 새로운 도발을 하는 자이지 기성 질문에 해답을 찾는 자는 아니다. 다만 작가가 당시 격동의 시기에서 뭔가 변화 발전의 실마리를 보았다고 유추해 볼뿐이다.
1918년 54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등진 프랑크 베데킨트의 꿈꾼 세상이 도래했는지 묻는다면, 이후 독일의 히틀러의 파시스트 정권을 비롯해, 아직까지도 그가 던진 질문에서 자유로운 세상은 아닌 듯하다.
<눈뜨는 봄>은 2009년 7월 현재 <스프링 어웨이크닝>이라는 제목의 뮤지컬로 한국에서 상영 중이다. 희곡이 책에서 튀어 나와 피와 살을 얻어서 무대 위에서 살아났다고 하니,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다. 다만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토니상 8개 부문을 수상하고, 영국과 일본을 거쳐 흥행성을 보장받은 뮤지컬로 한국에 입성한 화려한 외모의 <스프링 어웨이크닝>이 그 안의 본 뼈대인 희곡을 읽었을 때만큼의 파괴력을 보여줄 지는 의문이다.
14살 소녀 벤들라로 분한 여배우가 가슴 드러내고, 그런 이유로 공연장 내 카메라가 일체 반입 금지라는 얘기가 먼저 들린다. 백 년 전의 청소년 성 문제와 갈등에만 초점을 맞추면 <눈뜨는 봄>은 고루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다. 자칫 미국 흥행 공식에 꿰맞춰지면서 죽은 모리츠의 한숨 소리만 더 커지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생각이 노파심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