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드>를 리뷰해주세요
피드 feed
M. T. 앤더슨 지음, 조현업 옮김 / 지양어린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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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ed : 1 <동물 등에> 먹이[모이]를 주다; <어린이·환자 등에게> 음식을 먹이다; <아기에게> 젖을 주다; 양육하다, 2 <연료를> 공급하다(supply); <램프에> 기름을 넣다; <연료·원료를> 보급하다; <보일러에> 급수하다; 3 <귀나 눈 등을> 즐겁게 하다, <허영심 등을> 만족시키다(gratify) 《with》;<화 등을> 돋우다 《with》[영어사전]

 

feed : 인간의 뇌 속에 직접 이식한 컴퓨터 시스템. 텔레파시 형태로 채팅이 가능하고, 온갖 지식과 정보를 피드넷을 통해 직접 공급받는다. 교육, 소비, 문화 등 모든 사회생활을 피드로 수행한다. 또한 신체의 기본적인 조절 능력인 뇌기능을 대행하는 피드에 이상이 생길 경우, 기억 상실, 근육 마비 증세가 올 수 있으며, 싱크로율이 제로에 이르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M.T. 앤더슨의 소설 <피드feed>]  


M.T. 앤더슨의 소설 <피드feed>의 의미는 피드의 사전적 의미를 사회정치인 코드로 재해석한 단어이다. 1. ‘먹이를 주다’는 주인공 타일러스의 어린 ‘냄새쟁이’ 동생이 하루 종일 어린이 방송 채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대목을, 2. ‘(연료를) 공급하다’는 개인 의사 선택과 상관없이 스펨 메일처럼 폭주하는 배너 광고를, 3. ‘<귀나 눈 등을> 즐겁게 하다’는 환각제와 유사한 효과를 내는 가상 체험 ‘멜’과 의미가 상통한다. 

 

한마디로 피드는 ‘욕망의 충족’이다. 소설 속에서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 상태(허기, 더위)나 보는 시선(쇼핑, 게임장)에 따라 정보가 피드를 타고 머릿속으로 직접 들어온다. 자본주의의 극단이라는 설정이니만큼 경쟁업체의 각종 정보가 물밀 듯이 들어온다. 그러나 정보의 통제권은 ‘개인’에게 있지 않다. 다만 무시를 할 뿐이다. 선택권 또한 마찬가지다. 그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선별된 정보를 두고 선택을 한다고 착각을 할 뿐이다.  

 

작가는 <피드>가 미래소설이 아니고, 지금 직면한 문제를 논하기 위해 가상의 미래 이미지를 비유적으로 차용했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아도 미디어 통제와 장악 문제는 당장 우리에게도 꽤 익숙하다. 지난 7월 22일, 언론법 개정을 두고 “언론법 날치기, 민주주의 파괴 폭거”라는 과격한 말들이 오간다.  

 

“우리 생활을, 영화와 노래와 광고에서 온 이미지들을 빼 버리고선 생각할 수 없어요. 그 이미지들이 모두 우리에게 요구하는 건 더 나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더 나은 소비자가 되라는 거예요” 329쪽 ‘작가와의 대화’  

 

 

우주여행이 가능한 시대, 피드로 모든 생활이 편리해진 ‘접속’의 시대,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달 합병 문제로 미국과 지구 동맹(주로 제3제국이 소속)의 갈등이 있고, 끔찍한 환경 파괴와 이에 따른 부작용이 있다.   

 

 

사회 제도의 적응 산실이라고들 하는 학교대신 재택교육을 받는 바이올렛, 아버지는 내부 칩 형태가 아닌 몸에 짊어 매는 구형 피드 등짐을 사용하면서 한물간 ‘문자’에 매달리는 가난한 대학교수이고, 이혼한 어머니는 피드 시스템 자체를 혐오한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바이올렛은 사회가 요구하는 ‘더 나은 소비자’의 요건과 맞지 않는다. 남자친구인 타일러스가 보기에는 오락, 드라마, 쇼, 쇼핑, 유행을 따라가기에도 바쁜 친구들과 달리 ‘골치 아픈 남의 일일뿐’인 정치, 사회,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는 바이올렛이 별종으로 분류된다.   

 

 

타일러스 일행이 피드에 대항하는 급진적 해커의 습격으로 피드가 망가졌을 때, 부유한 집 아이들과 달리 가난(하다기보다는 시스템을 거부하는)한 바이올렛은 피드 수리에 곤혹을 겪는다. 그리고 기업의 치료 지원 요청도 바이올렛이 ‘더 나은 소비자’의 행태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를 당한다.  

 

 

타일러스는 자신과 전혀 다른 시선을 가진, 다시 말해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바이올렛에게 점점 흥미를 잃는다. 심지어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바이올렛의 채팅을 무시하거나, 뇌 기능을 잃기 전에 애써 전송한 그녀의 소중한 기억을 바탕 화면 휴지통 비우듯 지워버린다.   

 

 

하지만 타일러스도 점점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선택한 시스템이라는 게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를.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이식 받은 피드의 세계를 무시할 수 있을까. 바이올렛의 주검을 앞에 두고도 피드에서는 “울적한가요? 그럼 청바지를 입어요!”라는 광고를 보낸다. 싱크로율 0%, 피드에서 밀려나 비참하게 죽은 바이올렛 앞에서 타일러스는 이야기한다. 


“이건 피드에 대한 거야. 이건 아주 보통 아이에 대한 거야. 아무것도 생각할 줄 모르던 아이가 어느 이상스러운 날, 순수한 마음을 지닌 여자애를 만났지. (…) 그 마지막 날에 미국의 배경에 다연 저항하게 되는데, 그건 아주 정신적인 그들의 사랑 이야기야.”

피드가 알려주지 않는 이야기, 타일러스 안에서 발현된 사고 능력이 피드의 광고 장막을 뚫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죽은 바이올렛이라는 존재는 피드 시스템에서는 그저 삭제한 프로그램 뒤에 남은 불필요한 ‘레지스트리’ 정도의 존재일 뿐이다.  

 

 

허나 타일러스의 이야기를 통해서 바이올렛은 이제 피드에 저항한 소녀,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찾아 떠난 선도자가 된다. 어쩌면 ‘새로운 세상을 여는 신화 속 주인공’으로 등극할 지도 모른다.   

 

 

바이올렛을 통해 싹을 틔운 타일러스의 사고가 소설 <피드>로 폭발하기 시작했을 때(그의 후일담이 소설<피드>라고 유추할 수 있다) 창문 너머로 바이올렛의 아버지는 묵묵히 정원에 엎드려 풀을 뽑는 모습이 보인다. 피드 클릭을 통해 쇼핑으로 대리 노등을 하는 피드인에게는 볼 수 없는 직접 노동이다. 피드에 저항하는 ‘생각’과 ‘실천’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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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 수집가>를 리뷰해주세요
기담 수집가
오타 다다시 지음, 김해용 옮김 / 레드박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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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기이한 경험이라면 이런 정도다. 지금 글을 쓰는 내 모습을 과거에 본 듯한 기시감이 들 때. 종종 이럴 때가 있는데 이 정도라면 솔직히 어깨를 으쓱하면 그만이다. 어쩌다가 무턱대고 쫓기다가 옥상에서 떨어지거나, 지진이 나서 사방이 다 무너지거나 하는 꿈이 생생하게 기억이 날 때가 있다. 혹시 이 꿈이 기심감과 겹쳐서 내 미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 잠이 확 달아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꿈이 정말 현실이 되더라도 그때가 되어서야 알 수 있는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지 싶은 생각에 미치면 이번에도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베개에 머리를 처박고 만다. 공포 영화를 싫어하는 친구는 영화를 볼 때는 무섭지 않은데, 혼자 사는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잘 때, 비로소 영화 속 공포가 현실이 되어 덮칠 것만 같아서 밤을 지새우기 일쑤라고 한다. 뭐, 그렇다고 그 친구가 신경쇠약 같지는 않고, 귀신 말고는 두려운 게 없다고 하니 오히려 강심장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렇다.   

기담이란 현실에서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아니 거의 없는 진기한 이야기를 말한다. 다만 간혹 드물게 아주 미세한 실현 가능성이 기억에 뇌관처럼 박히다 보니, 새록새록 반복되어서 자꾸만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래저래 바쁘게 살다보면 다 잊기 마련이라, 살면서 망각이 굳이 나쁜 증세만은 아니지 싶다.  

사실, 닥치는 매 순간순간이 전혀 예기치 못한 미래의 연속이고 보면 기이한 이야기 따위야 머지않아 머릿속에서 휘발하기 마련이다. 교통사고만 해도 누군들 자신이 그 장본인이 될 줄 누가 알았던가 말이다.  

흔치도 않고, 지어낸 가짜가 대부분이며, 게다가 개인적인 경험이라 밝히기도 꺼려하는 특이한 경험담인 기담을 수집하는 남자가 있다.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술집 ‘딸기 언덕(strawberry hill)’에서 고급 시가릴로 담배를 피우며, 기담만큼 희귀한 고급 위스키를 즐기는 까다로운 신사 에비스 하지메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는 조수 히사카는 그 자체로 기담이나 다름없는 존재들, <기담 수집가>의 주인공들이다. 

기담 수집 광고를 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골동품 감정하듯 평가해서 진짜일 경우 사례를 하는 게 이들의 일이다. 하지만 정작 일곱 명 중 여섯 명의 얘기는 기담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조수 히사카의 냉정한 판단에 의해 그들의 이야기 이면에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범죄의 흔적이 파헤쳐진다. 

증거도 물증도 공소시효도 지나 지금은 누구도 진실을 밝혀 낼 수 없지만 히사카가 유추한 추리는 꽤 그럴듯해서 기담에 취해 살았던 이들의 이면을 일깨운다. 

예를 들어 자신의 그림자에게 습격을 받았다는 공무원 니토 하루키의 사건은 이 남자의 과대망상을 파고든 후배의 짓이었고, 소년 탐정단 시절에 겪은 신출귀몰한 유괴살인범 물빛 망토의 정체가 궁금해서 찾아온 구사마 쓰토무의 기담은 친구들의 장난에 우연까지 겹친 음모였던 걸로 판명이 난다. 

어이없고 허탈하게 풀리는 기담 수수께끼의 진실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그림자에 빠져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는 니토 하루키는 남의 감정에 둔감해서 일이 서툰 후배에게 불평을 하고 화를 내는 내내, 후배가 자신을 원망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현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구사마 쓰토무도 마찬가지, 어린 시절, 소년 탐정단의 멤버였던 닷지를 뚱뚱하고 느리다고 우습게 봤던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이 일은 오히려 마음에 한이 맺힌 닷지가 구사마를 엿 먹이는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 일곱 번째 기담에 약간의 반전을 둔 <기담 수집가>는 가볍게 읽을 만한 장르 소설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우연치 않게 겪은 기이한 경험이 알고 보니, 그 원인이 바로 내 자신이었다는 나름의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한다. 

매순간, 한 가지 일에 몰두해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이 의미가 없지는 않겠으나 한 가지에 몰두한 나머지 나 때문에 혹은 나를 둘러싸고 주위에서 다른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지는 않는지 세심하게 관찰하고 볼 일이다. 내가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혹은 가족이 누구보다 나를 원망하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 세상에! 그 보다 더 끔찍한 기담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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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3 - 상, 하>을 리뷰해주세요
밀레니엄 3 - 상 - 바람치는 궁전의 여왕 밀레니엄 (아르테) 3
스티그 라르손 지음, 박현용 옮김 / 아르테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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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제는 고인이 된 현실이 안타까운 소설가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작가의 마지막 작품. 50세, 작가가 세상에서 살다간 세월, 그 나이가 될 때까지 나는 과연 뭘 해낼 수 있을까? 그리 멀지 않은 강박의 나이. 

스웨던의 작가 故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를 읽기 전, 수첩에 적어 놓은 짤막한 메모이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진즉에 버렸지만, 50세의 나이에 늦깎이 나이에 소설가로 이 정도의 파장을 불러온 작가를 보면 불현듯 욕심이 나다가도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은 제풀에 꺾이고 말았다.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읽힌 책(2008년)이이면서, 1부가 영화화 되어 유럽 북구에서 흥행 신기록을 달리고 있는 작품으로 적어도 앞으로 영화를 통해서라도 작가가 계획했던 10부작 중에서 유작으로 남은 3부작에 대한 반응은 갈수록 커질 것임에는 분명하다.  

스웨덴의 대기업, 언론사, 병원, 비밀첩보기관에 이르기까지 사회 구조의 안팎으로 엮인 거대한 ‘빅 브러더’들의 살인, 협박, 사기, 갈취 등 기득권 유지를 위한 추악한 이면을 딱딱한 사회인문서적이 아닌 “한 번 잡으면 놓을 수 없는 숨 막히는 스릴러 소설, 차라리 마약”이라는 평가를 받는 소설로 풀어냈다.  

주인공 이름도 그렇지만 예오리 뉘스트림 등 곱씹어 읽어 봐도 당최 입에 붙지 않는 스웨덴 식 등장인물 이름을 비롯해 각종 냉전 시대의 북유럽 내 갈등, 스웨덴 정치사, 기업 스캔들 등은 밀레니엄 소설이 아니었다면, 고작 뮤지션 아바(ABBA)나 자동차 기업 볼보(Volvo) 정도나 겨우 아는 내가 평생 가야(!) 관심을 가질 사안이 아니다.  

“언론 보도의 진실 판단 여부“는 부차적 문제가 된 지 오래, “누가 어떻게 전할 것인가”하는 언론 포장과 유통 문제가 언론 관련 최대 쟁점이라는 건 미디어법을 놓고 직권상정을 강행하는 한국만 봐도 뻔한 일이다. (민생문제와 관련이 없는 이 문제를 두고 직권상정 강행, 의원직 사퇴 등의 초강수가 나오는 이유는, 다 아는 얘기지만, 언론 장악이 정권 창출의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역시 다 아는 얘기인데, 장악한 언론의 방향성을 사회가 따라간다는 것이다.)  

스티그 라르손의 작품은 워낙 복선이 치밀하고 흥미진진한 추리소설 구조를 따와서 그렇지, 실제 사건과 인물 이름을 거론하는(이 역시 내 눈에는 낯설기만 하지만) 소재와 다루는 내용은 꽤 무겁다. 이 소설 한 편으로 사회의 이면과 권력의 속성을 보는 시각을 뒤바꿀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정치, 사회에 별 관심이 없는 세대와 계층의 눈길을 돌리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문화 컨텐츠의 기본인 텍스트의 높은 완성도는 비슷한 소재와 주제를 두룬 소설 출간뿐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의 제작으로 이어지면서 더 큰 파장을 낳을 것이다.  

사회의 비리를 파헤치는 문제를 다룬 스릴러물이나 첩보영화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소설 <밀레니엄> 시리즈의 실질적 주인공은 잡지사 ‘밀레니엄’ 주변 인물들로 이들은 직원이 열 명도 되지 않는 소규모 잡지사의 일개 직원들이다.  

사회를 보는 일차적인 눈 역할을 하는 이들의 역할은 3부 마지막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백미! 법정에서 제대로 드러난다. 보통의 비슷한 정치, 군사, 기업을 다룬 소설과 영화가 스릴 넘치는 대결 구도 이후 악당의 물리적 패배 이후 경찰 수갑으로 마무리를 했다면, <밀레니엄>은 잡지사 ‘밀레니엄’을 중심으로 합법적인 재판 과정에서 빠져나갈 여지를 완벽하게 틀어막기 위한 증인 모색, 증거의 수집, 더불어 언론 공조와 사건 관련 책 출간을 통한 여론 형성 등 법정 대결을 위한 수순이었다고 봐야 한다.  

‘빅 브러더’들을 절망으로 몰아붙인 종목은 죽음이 아니다. 자신들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검찰, 법정, 언론이라는 세 가지 경기에서 완패를 당했을 떼라야 비로소 고개를 떨군다.  

이 책의 가치는 “신데렐라는 왕자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며 키스로 마무리하는 방식을 뛰어 넘어 “신데렐라와 왕자는 평민과 왕족 간의 계급 차를 극복하기 최선을 다 했습니다”라는 식으로 현실 적용 가능한 무대로 대중 소설의 패러다임을 확정했다는 데에 있다. 상투적으로 말하면 재미와 작품성을 고루 갖춘 건 물론이다. 

<밀레니엄> 시리즈의 단점이라면 작가가 장르소설 독자들의 눈높이를 한껏 높여놓고는 그만 고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앞으로 이만한 작품이 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절망감을 벗어나게 해줄 작품을 찾기 위해 고심해야 할 것 같다. 또, 워낙 빠르게 읽히는 바람에 눈에 덜 띠기는 하지만 3부 한국 초판본에는 이름이 뒤바뀌거나 오자와 띄어쓰기 등 맞춤법 오류가 간간히 눈에 띤다는 점도 살짝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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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를 리뷰해주세요
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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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에 한두 방울씩 빗물이 맺혀 흘렀다. 아침부터 하늘이 흐리더니 장맛비가 내리는구나 싶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 속에는 늘 한 그루 정자나무가 서 있다. 나무 아래 벤치에 할머니 두 분 부채질을 하고 계신 모습이 보였다. 아름드리 정자나무 아래는 늘 할머니들의 쉼터이다. 

창을 타고 길게 긋는 빗방울이 점점 길어지자 할머니 옆에 같이 앉아 있던 청년이 우산을 펴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정자나무 아래에서 이 정도 비가 들이치는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 여유만만이시다. 빗방울이 점점 거세지니 할머니들도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정자나무가 우거졌다고 한들 잎사귀 하나하나가 어른 손바닥 크기 이상이라고 한들, 거세게 내리는 비를 막아줄 수는 없을 것이다. 따가운 햇살도 틈틈이 새를 비집고 파고들 것이다. 그래도 오랜 세월 가슴 먹먹할 때마다, 쉬고 싶을 때마다, 정자나무가 늘 같은 자리에 있으니 할머니들은 하루에 한 번씩은 모인다. 관절염을 앓는 할머니에게 집 근처 정자나무는 자식같은 존재이다.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인 한비야는 꼭 정자나무 같다. 그녀의 일곱 번째 저서인 <그건, 사랑이었네>에서 그녀는 꿈을 이야기한다. “굶주리는 아이가 없는 세상, 모두가 공평한 기회를 갖는 세상.” 하지만 가능할까? 자신도 “청춘과 인생을 바치고 목숨까지 바친다고 한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허나 그녀가 지금까지 펴낸 7권의 책이 그녀의 행보를 잘 말해주듯이, 국제홍보회사 직원에서 오지여행가로, 이어서 국제구호기구인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으로 그녀는 꿈꾸는 세상을 위해 한발 한발 내딛는 내내, 매순간 나이테가 굵어져서 어느새 벤치가 놓일 정도로 그늘을 드리운 저 정자나무 같은 사람이 되었다. 불가능한 꿈? 그러나 그래서 더욱 찬란한 꿈, 그리고 한걸음씩 다가갈 수 있는 꿈이다. 마치 뻗은 가지에서 잎사귀가 한 잎 더 돋듯이.  

바람이 거세게 분다.  

벤치는 흠뻑 젖었고, 정자나무 주변에는 이제 아무도 없다. 구호팀으로 갔던 한비야가 재해 현장에서의 한 일이란 게 어쩌면 한계가 분명한 일일 것이다. 그녀는 저 나무처럼 재해 현장에서 혹독하게 외로웠을 것이다.  

“자기처럼 에이즈에 걸린 두 살짜리 딸을 꼭 껴안고 정성껏 밥을 먹여주는 모습이 짠했는데, 이틀 후 다시 찾았을 때는 그 엄마를 볼 수 없었다. (…) 돌보던 사람을 눈앞에서 허무하게 떠나보내는 일, 이런 일은 아무리 여러 번 겪어도 가슴 아프고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불가능한 꿈을 꾸고 늘 절망의 순간을 맞이하는 내내, 그녀는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소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녀 자신의 종교적 신앙을 기반으로 한 이 고백은 자칫 보는 이로 하여금 힘이 빠지는 말일 수도, 피상적, 심지어 상투적 수사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한비야는, 이 책에서 스스로에게 고백하길, 멈추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녀는 지금 막 9년 동안 몸담았던 월드비전 구호팀장 직을 떠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참이다.

2009년 7월, 책 출간으로부터 두 달 후인 오는 9월부터 보스턴에 있는 대학에서 인도적 지원 석사 과정을 밟는다. 공부 이후의 계획은 없단다. “‘가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라’고 하셨으니 앞으로 10년간은 어떤 형태로든 인도적 지원 분야에서 일하겠”다는 각오를 밝힌 상태이다.

<그건, 사랑이었네>의 절반 즈음은 40대의 소소한 일상을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채웠다. 그 이야기들이 구호 현장과 대비가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역시 눈여겨서 읽게 된다. 그녀가 아름드리로 성장할 수 있는 자양분들이기 때문이다.

비를 막아주지 못해 원망스러운 게 아니라 어깨를 감싸듯이 같이 비를 맞아주어서 고마운 정자나무 소중함도 같이 배운다.*** 

<밑줄긋기>  

당신은 끝까지 두드렸는가? 일단 벽이 아니라 문이라는 것만 확인하면 끝까지 두드려야 뭐가 되어도 되는 것이다. 문이라면 열리게 되어 있다. (…) 단언컨대 나도 끝까지 두드린 문만 열 수 있었다. 내가 두드렸던 모든 문이 다 열리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열렸던 문 중에 끝까지 두드리지 않았던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105쪽 

기억은 지나고 나면 사건의 골자, 즉 뼈대만 남기지만 기록은 감정까지 고스란히 남긴다. 통통한 살도 붙어 있고 향기와 온기도 남아 있는 거다. 111쪽 

뭘 할 때 제일 재미있나? 무슨 얘길 들을 때 귀가 솔깃한가? 뭘 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지막 힘까지 쏟아 부을 수 있나? 어떨 때 자신이 자랑스러웠나? 148쪽
 

나는 여행이란 길 위의 학교라고 굳게 믿는다. 그 학교에서는 다른 과목들도 그렇지만 단순하게 사는 삶, 돈이 없어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삶에 대한 과목을 최고로 잘 가르친다. 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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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뜨는 봄 (반양장) 지만지 고전선집 157
프랑크 베데킨트 지음, 김미란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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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대와 객석으로 갈렸다고는 하지만 밀폐된 극장 안에서 배우와 관객이 동일한 시간을 동일한 목적으로 호흡을 하는 내내, 연극 내 상황은 현실로 흘러 들어온다. 배우가 먼저 객석과 무대에서 서로 마주보면서 보이지 않는 가상의 막을 허물고 관객을 끌어들이면 이제 관객이 반대로 무대를 지배한다.  

극장에서 내가 관객으로 배우들과 만나는 순간, 내 인생과 배우의 인생이 서로 또 한편의 연극을 올리는 셈이다. 극장을 가고 오는 와중에 나와 배우들이 피할 길 없이 맞으면서 감내했던 비는 우리를 동일한 무대 위에 올려놓고 누군가가 조망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일 것이다. 적어도 연극을 보는 과정은 우리가 무대 위에 있다는 의식을 또 다시 상기시킨다. 

그래서 극장은 카페의 달콤한 여유나 술집의 떠들썩한 흥분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무대와 객석은 이질적인 그들과 내가 전혀 다른 의견을 가지고 팽팽하게 밀고 당기는 공간이다. 그래서 옆 사람의 땀내와 기침과 성가신 움직임을 참으면서 두 눈과 두 귀를 확실히 열어서 머릿속에 우겨 넣어야 하는 곳이다.  

사건 현장에 도착한 사회부 기자가 그렇듯 ‘연극 보기’는 이성과 야성을 동시에 요구하는 긴장의 연속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무대 위에서 낯설고 생경하며 불편한 새로운 탈주가 시작되면 우리는 배우들이 보여주는 ‘경험’을 실제 ‘경험’처럼 받아들인다. 그래서 극장에서 나오는 나는 들어가기 전의 나와는 다르다. 다만 그 조율은 주로 나보다는 연극을 올리는 배우와 그 뒤의 감독과 태초의 극작가의 몫인 경우가 많다.  

하여 19세기말 독일 표현주의 희곡작가 프랑크 베데킨트의 <눈뜨는 봄>(1981년 작)은, 연극이 왜 가장 오래된 장르이면서도 가상 체험의 시대인 지금껏 왜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희곡 중 한 편이다.  

비스마르크의 철혈 정책과 빌헬름 2세의 통치 등 봉건적 절대주의 시기였던 19세기 말 독일의 상황을 감안하면 당시 청소년의 임신, 자위, 동성애 등 금기시 되었던 성(性) 문제를 가감 없이 드러낸 <눈뜨는 봄>은 엄청난 사회적 스캔들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무려 15년 뒤인 1906년이 되어서야 무대에 올라갈 수 있었다. 

학교, 가정, 종교라는 획일적 통제 아래 학생들의 좌절과 저항을 다룬 <눈뜨는 봄>은 청소년의 권리와 인권에 대한 분출과 막 자유로운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시민사회(봄)와 통제와 관리를 하려는 지배 계급(겨울)의 간의 갈등 구조로 읽을 수 있다.  

작품에서 2차 성징을 겪는 호기심 많은 딸 벤들라에게 고심 끝에 “아기를 학이 물어다 준다”는 식의 설명을 하는 어머니 베르크만 부인의 태도는 100년 지난 지금 보면 웃지 못 할 코미디처럼 들린다. 하지만 당시에 비해 성이 자유롭게 개방된 지금도 청소년의 성 문제는, 어느 국가와 사회를 막론하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골칫거리이다.   

학 배달부 따위의 금욕적인 성교육을 받은 순진한 벤들라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임신을 하는 대목은 지금 와서 보면 희극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허름한 병원에서 낙태 수술을 받다가 목숨을 잃은 벤들라나 진급 시험에서 낙제하자 부모님을 실망시킬 일이 두려워 자살을 선택한 모리츠는 쉬지 않고 반복되는 15살짜리 사건사고이다. 

결혼 제도를 통해 성을 통제하면서 사회가 성립되었다는 역사를 돌아볼 때, 청소년의 성 문제는 단순히 나이 또래의 성적 미숙함과 욕구 불만으로 인한 성 문란으로 치부될 성격이 아니다. 사회의 기반인 결혼을 유지할 만한 능력과 자질도 갖추기 전인데다, 학교를 통해서 사회에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청소년들의 성적 충동은 자칫 사회 기반을 흔드는 위험 요소라는 식이다. 그래서 사회 기준으로 볼 때, 준비할 자질이 없는 모리츠의 죽음과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아기를 가진 벤틀라의 죽음은 동일 선상으로 묶인다. 

같이 사랑을 나눴다는 이유로, 벤틀라가 집안의 명예를 위해 비밀리에 낙태 수술을 받다가 죽음에 이른 책임을 추궁당하는 멜히모어는 모리츠의 자살마저도 성교육에 관한 글 <동침>을 써줬다는 이유까지 더해 학교와 집에서 낙인이 찍힌다.  

자유정신의 표상격으로 그려지는 멜히모어는 김나지움 퇴학에다 획일적인 사고로 뜯어고치기 위해 감화시설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그가 꿈꾸었던 사상(아기)은 밖으로 나와 보지도 못하고 사살(낙태)되거나, 통째(권총 자살로 날아간 모리츠의 머리)로 떨어져 버렸다. 

이후 무덤가에서 만난 유령이 된 모리츠의 유혹은 멜히모어를 자살에의 충동으로 이끈다. 이때, 멜히모어 앞에 생뚱맞지만 복면의 신사가 등장한다.  

멜히모어 : 당신은 누구예요? 누구예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날 맡길 수는 없어요.
복면의 신사 : 널 나한테 맡기지 않고는 날 알 수 없어.

복면의 신사의 정체는 누구인가? 어른이라는 점에서 멜히모어는 강한 반발심을 품는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그가 누군지는 모른다. 누군지 모른다는 얘기는 그가 존재로써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앞으로 얼굴을 채워나가 할 미지의 존재라는 의미이다. 적어도 얼굴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반사회적인 선동가 혹은 범죄자 등 획일화 사회에서 탈주를 감행하는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멜히모어가 신사를 따라 나서면서 희곡을 끝이 난다. 앞으로의 미래는 김나지움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인정을 받았던 멜히모어의 과거는 전혀 쓸모가 없는 미지의 길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날 어디로 끌고 갈지 모르지만, 어쨌든지 인간”의 길이다.  

‘인간의 길’이라는 멜히모어의 고백은 희곡에 등장하는 기성세대를 양성하는 선생들의 이름이 아펜슈말츠(원숭이 비계), 홍거구르트(몽둥이), 조넨슈티히(일사병) 교장 등 비인간적이라는 것 말고는 공통점조차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전복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다만 ‘당위성’과 ‘의지’의 두 가지 상상력이 도덕, 즉 현실 체제를 만든다는 신사의 가르침을 멜히모어가 수긍한다는 점에서 어른(기존 체제)을 완전히 뒤엎는 세상을 꿈꾼다기 보다는,  변화와 개혁에 좀 더 비중을 두지 않았나 싶다. 예술가는 새로운 도발을 하는 자이지 기성 질문에 해답을 찾는 자는 아니다. 다만 작가가 당시 격동의 시기에서 뭔가 변화 발전의 실마리를 보았다고 유추해 볼뿐이다.  

1918년 54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등진 프랑크 베데킨트의 꿈꾼 세상이 도래했는지 묻는다면, 이후 독일의 히틀러의 파시스트 정권을 비롯해, 아직까지도 그가 던진 질문에서 자유로운 세상은 아닌 듯하다.  

<눈뜨는 봄>은 2009년 7월 현재 <스프링 어웨이크닝>이라는 제목의 뮤지컬로 한국에서 상영 중이다. 희곡이 책에서 튀어 나와 피와 살을 얻어서 무대 위에서 살아났다고 하니,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다. 다만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토니상 8개 부문을 수상하고, 영국과 일본을 거쳐 흥행성을 보장받은 뮤지컬로 한국에 입성한 화려한 외모의 <스프링 어웨이크닝>이 그 안의 본 뼈대인 희곡을 읽었을 때만큼의 파괴력을 보여줄 지는 의문이다.  

14살 소녀 벤들라로 분한 여배우가 가슴 드러내고, 그런 이유로 공연장 내 카메라가 일체 반입 금지라는 얘기가 먼저 들린다. 백 년 전의 청소년 성 문제와 갈등에만 초점을 맞추면 <눈뜨는 봄>은 고루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다. 자칫 미국 흥행 공식에 꿰맞춰지면서 죽은 모리츠의 한숨 소리만 더 커지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생각이 노파심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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