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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창문에 한두 방울씩 빗물이 맺혀 흘렀다. 아침부터 하늘이 흐리더니 장맛비가 내리는구나 싶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 속에는 늘 한 그루 정자나무가 서 있다. 나무 아래 벤치에 할머니 두 분 부채질을 하고 계신 모습이 보였다. 아름드리 정자나무 아래는 늘 할머니들의 쉼터이다.
창을 타고 길게 긋는 빗방울이 점점 길어지자 할머니 옆에 같이 앉아 있던 청년이 우산을 펴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정자나무 아래에서 이 정도 비가 들이치는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 여유만만이시다. 빗방울이 점점 거세지니 할머니들도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정자나무가 우거졌다고 한들 잎사귀 하나하나가 어른 손바닥 크기 이상이라고 한들, 거세게 내리는 비를 막아줄 수는 없을 것이다. 따가운 햇살도 틈틈이 새를 비집고 파고들 것이다. 그래도 오랜 세월 가슴 먹먹할 때마다, 쉬고 싶을 때마다, 정자나무가 늘 같은 자리에 있으니 할머니들은 하루에 한 번씩은 모인다. 관절염을 앓는 할머니에게 집 근처 정자나무는 자식같은 존재이다.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인 한비야는 꼭 정자나무 같다. 그녀의 일곱 번째 저서인 <그건, 사랑이었네>에서 그녀는 꿈을 이야기한다. “굶주리는 아이가 없는 세상, 모두가 공평한 기회를 갖는 세상.” 하지만 가능할까? 자신도 “청춘과 인생을 바치고 목숨까지 바친다고 한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허나 그녀가 지금까지 펴낸 7권의 책이 그녀의 행보를 잘 말해주듯이, 국제홍보회사 직원에서 오지여행가로, 이어서 국제구호기구인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으로 그녀는 꿈꾸는 세상을 위해 한발 한발 내딛는 내내, 매순간 나이테가 굵어져서 어느새 벤치가 놓일 정도로 그늘을 드리운 저 정자나무 같은 사람이 되었다. 불가능한 꿈? 그러나 그래서 더욱 찬란한 꿈, 그리고 한걸음씩 다가갈 수 있는 꿈이다. 마치 뻗은 가지에서 잎사귀가 한 잎 더 돋듯이.
바람이 거세게 분다.
벤치는 흠뻑 젖었고, 정자나무 주변에는 이제 아무도 없다. 구호팀으로 갔던 한비야가 재해 현장에서의 한 일이란 게 어쩌면 한계가 분명한 일일 것이다. 그녀는 저 나무처럼 재해 현장에서 혹독하게 외로웠을 것이다.
“자기처럼 에이즈에 걸린 두 살짜리 딸을 꼭 껴안고 정성껏 밥을 먹여주는 모습이 짠했는데, 이틀 후 다시 찾았을 때는 그 엄마를 볼 수 없었다. (…) 돌보던 사람을 눈앞에서 허무하게 떠나보내는 일, 이런 일은 아무리 여러 번 겪어도 가슴 아프고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불가능한 꿈을 꾸고 늘 절망의 순간을 맞이하는 내내, 그녀는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소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녀 자신의 종교적 신앙을 기반으로 한 이 고백은 자칫 보는 이로 하여금 힘이 빠지는 말일 수도, 피상적, 심지어 상투적 수사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한비야는, 이 책에서 스스로에게 고백하길, 멈추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녀는 지금 막 9년 동안 몸담았던 월드비전 구호팀장 직을 떠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참이다.
2009년 7월, 책 출간으로부터 두 달 후인 오는 9월부터 보스턴에 있는 대학에서 인도적 지원 석사 과정을 밟는다. 공부 이후의 계획은 없단다. “‘가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라’고 하셨으니 앞으로 10년간은 어떤 형태로든 인도적 지원 분야에서 일하겠”다는 각오를 밝힌 상태이다.
<그건, 사랑이었네>의 절반 즈음은 40대의 소소한 일상을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채웠다. 그 이야기들이 구호 현장과 대비가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역시 눈여겨서 읽게 된다. 그녀가 아름드리로 성장할 수 있는 자양분들이기 때문이다.
비를 막아주지 못해 원망스러운 게 아니라 어깨를 감싸듯이 같이 비를 맞아주어서 고마운 정자나무 소중함도 같이 배운다.***
<밑줄긋기>
당신은 끝까지 두드렸는가? 일단 벽이 아니라 문이라는 것만 확인하면 끝까지 두드려야 뭐가 되어도 되는 것이다. 문이라면 열리게 되어 있다. (…) 단언컨대 나도 끝까지 두드린 문만 열 수 있었다. 내가 두드렸던 모든 문이 다 열리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열렸던 문 중에 끝까지 두드리지 않았던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105쪽
기억은 지나고 나면 사건의 골자, 즉 뼈대만 남기지만 기록은 감정까지 고스란히 남긴다. 통통한 살도 붙어 있고 향기와 온기도 남아 있는 거다. 111쪽
뭘 할 때 제일 재미있나? 무슨 얘길 들을 때 귀가 솔깃한가? 뭘 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지막 힘까지 쏟아 부을 수 있나? 어떨 때 자신이 자랑스러웠나? 148쪽
나는 여행이란 길 위의 학교라고 굳게 믿는다. 그 학교에서는 다른 과목들도 그렇지만 단순하게 사는 삶, 돈이 없어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삶에 대한 과목을 최고로 잘 가르친다. 1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