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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오브 워터 - 흑인 아들이 백인 어머니에게 바치는 글
제임스 맥브라이드 지음, 황정아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아직도 모르겠느냐? 너희가 왜 그렇게 핍박과 고통을 받는지, 진정 모르겠느냐? 너희는 다르다. 너와 네 새끼는 인간과 다르다. 그게 이유야."
"고작 그 이유로, 인간과 다르다는 이유로 나와 내 새끼한테 그리한 것이냐? 인간이란 그런 것이냐?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찢고 찌르고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족속이냐?"
- 구미호: 여우누이뎐 중에서
그렇다. 인간은 그런 족속이다. 고대의 한 철학자는 인간을 가리켜 사회적 동물이라 했다. 나는 그 말을 약간 비틀어서 '편견의 동물'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실로 우리 사회는 수많은 편견이 공존하고 충돌하는 곳 아닌가. 종교와 인종, 성별, 국가와 지역 간의 대립은 아마도 인간 사회가 존재하는 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무리를 이루어 소속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무리 안에서 느끼는 연대감은 개인의 정체성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인간은 자신과 같거나 닮은 것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그 안에서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 한마디로 사회라는 커다란 집단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끼리끼리 이룬 작은 집단들의 결정체이다. 각기 다른 가치관과 신념, 삶의 방식이 공존하는 곳이다. 누구나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이 공격당하거나 손상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뒤흔들리는 것과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의식이 자기와 다른 것,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작용한다.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차별과 편견이 생긴다.
"난 흑인이에요, 백인이에요?"
"넌 인간이야." 엄마는 잘라 말했다.
앞서 나는 편견과 차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내가 소개하려는 책에 '인종차별' 문제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폴란드계 유대인 어머니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제임스 맥브라이드가 자신의 백인 어머니에게 바치는 이 책에는 백인어머니와 자신의 외모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흑인 소년(제임스 맥브라이드)과 냉혹하고 이기적인 아버지와 신체불구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갈등하는 유대인 소녀(그의 어머니)의 삶이 교차한다. 1930년대 말에서 40년대, 70년대와 80년대 미국의 역사가 그들 삶과 함께 흐른다.
폴란드계 유대인 어머니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와 결혼할 당시 백인과 흑인의 결혼은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아프리카 어느 곳에서는 죽임을 당할 만큼 큰일이었다. 그 정도로 인종차별은 노골적이었으며 곪을 대로 곪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려도 폭발하듯 터지는 종기 같은 문제였다. 그러나 실스키 혹은 루스(제임스의 어머니. 유대인 이름을 미국식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인종차별 문제에 당당히 맞섰다. 그녀가 대응한 방식은 '무시'였다.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과 경멸의 말을 무시했다. 제 갈 길만 갔다. 교회를 설립하고 열두 명의 자녀를 길러냈다. 흑과 백의 대립이 팽팽했던 1980년대 미국에서 흑인 자녀를 길러낸 백인 여성, 어머니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루스, 아니 그녀가 결혼하기 전 실스키 레이철의 삶을 보면 또 다른 편견과 차별의 문제도 드러난다. 신체적으로 불구가 있었던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냉대와 멸시, 자매들의 홀대이다. 힘들고 외롭게 살다 죽은 장애인 어머니의 삶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어서 놀랍기보다는 안타깝다.
드물긴 했지만 흑인과 백인 사이에 끼었다고 느껴지는 불운한 순간이 닥칠 때면 난 엄마가 그랬듯이 흑인들의 편에 섰지만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면 나서지 않았다. 혼혈로 살아간다는 건 마치 재채기가 나오기 전에 코에서 느껴지는 따끔따끔한 느낌, 얼른 나오기를 기다리지만 절대 나오지 않는 느낌과도 같았다. 얼굴과 성장환경으로 보면 흑인이라는 익명성으로 도피하는 것이 내겐 쉬웠지만 좋든 싫든 피부색을 즉각적인 정치적 진술로 간주하는 세상에 산다는 것에 좌절감이 느껴졌다.
'흑인 아들이 백인 어머니에게 바치는 글'이라는 부제는 책을 다 읽은 직후에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1980년대 미국에서 백인 어머니에게 길러진 흑인 아들이 자신의 뿌리,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놀랍도록 진솔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그리고 불구인 외할머니와 이모들의 삶을 추적해나가는 흑인 남성의 마음이 절절히 전해진다. 담담하면서도 잔잔한 유머를 섞어 질곡의 세월을 들려주는 유대인 여성의 목소리는 흑과 백의 대립, 사회의 수많은 편견과 차별을 녹이는 힘이 있다. 그것을 딛고 이겨낸 세월을 거쳐온 자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느 날인가는 교회에서 돌아오다가 하느님이 흑인인지 백인인지 물어보았다.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오, 얘야...... 하느님은 흑인이 아니시란다. 백인도 아니셔. 하느님은 영(靈)이시지." "흑인을 더 좋아하세요 아니면 백인을 더 좋아하세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지. 하느님은 영이시니까." "영이 뭔데요?" "영은 영이지." "하느님의 영은 무슨 색이에요?" "아무 색도 아니야." 엄마가 말했다. "하느님은 물빛이시지. 물은 아무 색도 없잖아."
<컬러 오브 워터>라는 제목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제임스의 어머니 루스는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는 신의 속성을 가리켜 물빛, 무색이라고 했다. 그 어떤 색도 포용하는 투명한 물빛에 대한 은유는 '차이'를 받아들이는 우리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해 공격하고 배척하지 않으면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나'에 대한 확신, 그리고 다양성에 대한 수용적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확신이 아집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아집 또한 불안의 배설물 같은 것 아닌가. 수많은 패러다임이 공존하는 이 세계에서 그 불안을 떨쳐내는 것은 쉽지 않다. 사회의 불합리함 속에서 모호함과 불안이라는 안개를 헤치고 자신의 삶을 확립한 흑인 아들과 백인 어머니가 감동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