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 제17호 - Summer, 2010
아시아 편집부 엮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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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Asia)'에서 계간지를 펴내고 있다는 소식을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올해 들어 나의 문학적 독서 체험을 넓혀준 제3세계의 소설 몇 편. 그 안에 흐르던 수많은 이미지들이 오래된 그림처럼 떠올랐다. 그들 역사와 문화, 전쟁의 상흔 같은 것들이 문장과 문장 사이를 팽팽하게 휘감고 있었다.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때 나는 '아시아(Asia)'라는 출판사를 처음 알게 되었다. 우연히 손에 잡은 몇 권의 작품들에서 보편적인 이국적 정취와는 조금 다른 매혹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원작을 잘 살려낸 엮은이의 역량이 클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인지 계간지 소식을 듣고 반가웠다. 몇 종류의 문학잡지를 구독하고 있지만 엮어진 내용은 국내문학 위주였다. 아시아의 작가와 문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정기간행물은 아직까지 접해보지 못했다.

 


   계간《아시아》는 서로 다른 창조적 상상력이 모여 이루어내는 정신의 숲입니다. 단순히 공간으로서의 특정지역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미학적인 지역자치제를 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보자는 것입니다.

 

   Asia aspires to be a forest of various creative minds. Asia does not mean a specific geographical region. We do not aim for an aesthetic self-governance. We do not propose a cultural separatist movement. We simply want to look at ourselves with our own eyes.

 

 


   《아시아》는 출간 의도를 위와 같이 밝히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만난 계간 '아시아'는 17호. 2010년 여름호이다. 이번 여름호는 '팔레스타인 문학 특집'으로 꾸며졌다. 권두 에세이(우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다 - We Are Palestinians)에서 소설가 오수연 씨는 대담「팔레스타인 문학을 빛낸 별들」에 인용되었던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말 - "당신은 팔레스타인인일 수 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이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을 빌려 "이런 의미에서, 나는 팔레스타인인이다. 내가 살아야 할 곳에서 배제되었다고 느끼지만 달리 갈 곳은 없다. 그리고 내 위에 쌓인 문제들이 첩첩이고 지구 끝까지 얽히고설켜, 내 문제가 해결되려면 세계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지경이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다. 어디에 살건 나처럼 느끼는 많은 이들도 같은 의미로 팔레스타인인일 것이다."라는 감명적인 문장으로 팔레스타인 문학 특집의 첫머리를 열고 있다.《아시아》의 출간 의도와 일맥상통하는 오수연 씨의 권두 에세이를 읽으면서 내 가슴은 저릿한 감동과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올리브나무 몸통 위에

 

 

 

내 이야기 내 비극의 장막들을 새길 것이다,

내 한숨을 새길 것이다

내 숲과 우리 죽은 자들의 묘지 위에,

...우리 빼앗긴 땅 모든 등기권리증의 번호를

새길 것이다

우리 마을의 위치와 경계를 새길 것이다.

궤멸된 집들과 사람들을,

내 뿌리 뽑힌 나무들을,

그 모든 것을 기억하기 위해

...계속 새길 것이다

내 비극의 장면들을,

모든 참사의 국면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집

마당

올리브나무 몸통 위에.


 

 


   '팔레스타인 문학 특집'이라고 하여 나는 우선 팔레스타인의 역사부터 살펴야 했다. 부끄럽지만 내가 '팔레스타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가끔 뉴스를 통해 비춰지는 참상의 이미지와 단편적인 역사적 사건들이 전부였다. 팔레스타인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스라엘과의 오랜 분열과 충돌. 그들 역사를 살피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그들 반목의 역사가 반드시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굳이 세계 곳곳을 거론할 것도 없다. 우리나라의 정치적 분쟁, 남한과 북한의 오해와 충돌의 역사, 그 안타까운 분단의 현실은 여전히 우리의 상처이고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위에 소개한 글은 팔레스타인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타우픽 자야드(Tawfiq Zayyad)'의 시 전문이다. 나는 이 시가 정말 마음에 든다. 책갈피를 해두고 생각날 때마다 반복해서 읽고는 했다. 이 시의 무엇이 나의 마음을 이렇게 붙드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어느 밤, 홀로 등을 밝히고 자리에 앉은 밤에 나는 온 가슴으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바로 한()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젊은 작가들의 시선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판타지적인 상상력의 세계로 옮겨지고 있는 경향도 있지만, 그래도 문학의 역사는 한()의 역사이고, 그 시대적 배경이나 관심이 달라도 역시 인간의 한()은 문학을 탄생시키는 힘이며, 문학과 인간, 문학과 세계를 이어주는 끈이 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국내작가들, 음, 이를테면, 박경리 선생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 아릿하고 묵직한 슬픔의 무게를 나는 먼 이국의 시인이 쓴 문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느꼈던 것이다. 이것이 문학의 힘이고, 인간을 이어주는  정() 아닐까.

 

 


   내 위에 떠 있는 것 위에 떠 있기 위해

  무()를 보고 전체를 쓰기〔〕위해

                           액체 형태로 있는

         대리석을 해독(解讀)하기 위해

                     물()을 쓰기〔

 

(...)

 

 

   물()을 쓰기()란 그 시원(始原)을 찾으려 하며 강() 상류로 가는 여행에서 피 흘릴 용의가 있는 자아 안의 우주적 꿈의 잔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징조들을 기다리고, 그들에게 살며, 숨 쉴 수 있는 목소리와 이야기들을 부여하는 것이다.(...) 영혼의 심연에 가라앉는 물()을 열고 그 표면을 진동시키는 것, 감정의 강()과 미풍에도 울리는 작은 종()들만큼이나 가벼운 양쪽 기슭을 쓰기() 위해서 물을 책처럼 펼쳐서 읽는 것. 창조의 평형, 또는 기도 속의 방향에서 지금 여기에 태어날 예정이며, 빛이 비추지 않았고 아직 아무도 발설하지 않은 언설(言說)에서 다른 모든 방향의 이름을 찾을 의무가 있는 "가슴 위 깃털의 무게" 속에서 자신을 가늠해보는 것.

 

 


   '키파 판니(Kifah Fanni)'의 에세이 '액체적 글쓰기'는 상당히 독특하고 매혹적인 방식으로 그 한() - "가슴 위 깃털의 무게" -을 표현해내고 있다. 액체적 글쓰기라니. 얼마나 매혹적인 표현인가. 글쓰기를 물()에 빗대어 "강() 상류로 가는 여행에서 피 흘릴 용의가 있는 자아 안의 우주적 꿈의 잔재를 인식하는 것"이라는 '키파 판니'의 문장은 "과거가 되지 않을 시간과 폐허가 되지 않을 장소"가 '글쓰기' 곧 '문학'임을 각성시키고 있다. '우리'가 소속된 곳이 어디이건 그 '강()'의 상류에서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위안이 된다.

 

 

    《아시아》는 이미 그 출간 의도에서도 밝혔듯이 지구상의 불특정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계간지이다. 한글과 영어로 동시에 소개되고 있는 글들이 이색적이다. 국내작가의 작품도 영역(英易)해서 소개하고 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건데, 이번에《아시아》를 통해 등단한 국내작가 이호빈의 소설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젊은 작가가 선택하기엔 상당히 진부한 소재임에도 능청스러운 듯 섬세하고 리듬감 빠른 그의 문장력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도 오랜만이어서 즐거움이 컸다. 팔레스타인 작가들의 에세이나 시, 소설이 이번 여름호의 대부분을 장식하고 있지만, 앞서 언급한 우리나라의 신예작가 이호빈 씨나 중국 작가 주티엔원(Chu Tien-wen)의 단편소설 등은《아시아》의 다채로움을 더한다.

 

 

    슬픔과 상처의 역사는 단연 '아시아'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 사는 곳 어디나 크고 작은 분열과 충돌, 오해와 미움이 있기 마련이다. 오래되어도 썩지 않고 고여 있는 응어리진 감정들, 달아나고 싶어도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과거와 눈앞의 답답한 현실을 얼마나 현명하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인간이 풀어야 할 숙제일 것이다. 그 숙제를 푸는 하나의 방편으로서 '문학'이 있다. '문학'이 점점 힘을 잃어가는 있는 오늘날, 그래도 나는 믿어보련다. "빛과 함께 퍼지며 어둠과 함께 움츠러드는 지평선에 대한 지도의 '열쇠'(키파 판니 Kifah Fanni - '액체적 글쓰기')"로서 문학은 우리 '피흘림의 역사' '한()의 역사'를 풀어낼 것이다.《아시아》가 그 든든한 일환이 되어 기쁘기 그지없다. 앞으로도 꾸준히 응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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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오브 워터 - 흑인 아들이 백인 어머니에게 바치는 글
제임스 맥브라이드 지음, 황정아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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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모르겠느냐? 너희가 왜 그렇게 핍박과 고통을 받는지, 진정 모르겠느냐? 너희는 다르다. 너와 네 새끼는 인간과 다르다. 그게 이유야."

 

   "고작 그 이유로, 인간과 다르다는 이유로 나와 내 새끼한테 그리한 것이냐? 인간이란 그런 것이냐?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찢고 찌르고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족속이냐?"

 

                                               - 구미호: 여우누이뎐 중에서

 

 

   그렇다. 인간은 그런 족속이다. 고대의 한 철학자는 인간을 가리켜 사회적 동물이라 했다. 나는 그 말을 약간 비틀어서 '편견의 동물'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실로 우리 사회는 수많은 편견이 공존하고 충돌하는 곳 아닌가. 종교와 인종, 성별, 국가와 지역 간의 대립은 아마도 인간 사회가 존재하는 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무리를 이루어 소속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무리 안에서 느끼는 연대감은 개인의 정체성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인간은 자신과 같거나 닮은 것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그 안에서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 한마디로 사회라는 커다란 집단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끼리끼리 이룬 작은 집단들의 결정체이다. 각기 다른 가치관과 신념, 삶의 방식이 공존하는 곳이다. 누구나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이 공격당하거나 손상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뒤흔들리는 것과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의식이 자기와 다른 것,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작용한다.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차별과 편견이 생긴다.

 

 

"난 흑인이에요, 백인이에요?"

"넌 인간이야." 엄마는 잘라 말했다.

 

 

  앞서 나는 편견과 차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내가 소개하려는 책에 '인종차별' 문제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폴란드계 유대인 어머니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제임스 맥브라이드가 자신의 백인 어머니에게 바치는 이 책에는 백인어머니와  자신의 외모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흑인 소년(제임스 맥브라이드)과 냉혹하고 이기적인 아버지와 신체불구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갈등하는 유대인 소녀(그의 어머니)의 삶이 교차한다. 1930년대 말에서 40년대, 70년대와 80년대 미국의 역사가 그들 삶과 함께 흐른다.

 

 

   폴란드계 유대인 어머니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와 결혼할 당시 백인과 흑인의 결혼은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아프리카 어느 곳에서는 죽임을 당할 만큼 큰일이었다. 그 정도로 인종차별은 노골적이었으며 곪을 대로 곪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려도 폭발하듯 터지는 종기 같은 문제였다. 그러나 실스키 혹은 루스(제임스의 어머니. 유대인 이름을 미국식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인종차별 문제에 당당히 맞섰다. 그녀가 대응한 방식은 '무시'였다.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과 경멸의 말을 무시했다. 제 갈 길만 갔다. 교회를 설립하고 열두 명의 자녀를 길러냈다. 흑과 백의 대립이 팽팽했던 1980년대 미국에서 흑인 자녀를 길러낸 백인 여성, 어머니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루스, 아니 그녀가 결혼하기 전 실스키 레이철의 삶을 보면 또 다른 편견과 차별의 문제도 드러난다. 신체적으로 불구가 있었던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냉대와 멸시, 자매들의 홀대이다. 힘들고 외롭게 살다 죽은 장애인 어머니의 삶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어서 놀랍기보다는 안타깝다.

 

 

   드물긴 했지만 흑인과 백인 사이에 끼었다고 느껴지는 불운한 순간이 닥칠 때면 난 엄마가 그랬듯이 흑인들의 편에 섰지만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면 나서지 않았다. 혼혈로 살아간다는 건 마치 재채기가 나오기 전에 코에서 느껴지는 따끔따끔한 느낌, 얼른 나오기를 기다리지만 절대 나오지 않는 느낌과도 같았다. 얼굴과 성장환경으로 보면 흑인이라는 익명성으로 도피하는 것이 내겐 쉬웠지만 좋든 싫든 피부색을 즉각적인 정치적 진술로 간주하는 세상에 산다는 것에 좌절감이 느껴졌다.

 

 

   '흑인 아들이 백인 어머니에게 바치는 글'이라는 부제는 책을 다 읽은 직후에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1980년대 미국에서 백인 어머니에게 길러진 흑인 아들이 자신의 뿌리,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놀랍도록 진솔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그리고 불구인 외할머니와 이모들의 삶을 추적해나가는 흑인 남성의 마음이 절절히 전해진다. 담담하면서도 잔잔한 유머를 섞어 질곡의 세월을 들려주는 유대인 여성의 목소리는 흑과 백의 대립, 사회의 수많은 편견과 차별을 녹이는 힘이 있다. 그것을 딛고 이겨낸 세월을 거쳐온 자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느 날인가는 교회에서 돌아오다가 하느님이 흑인인지 백인인지 물어보았다.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오, 얘야...... 하느님은 흑인이 아니시란다. 백인도 아니셔. 하느님은 영()이시지." "흑인을 더 좋아하세요 아니면 백인을 더 좋아하세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지. 하느님은 영이시니까." "영이 뭔데요?" "영은 영이지." "하느님의 영은 무슨 색이에요?" "아무 색도 아니야." 엄마가 말했다. "하느님은 물빛이시지. 물은 아무 색도 없잖아."

 

 

 <컬러 오브 워터>라는 제목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제임스의 어머니 루스는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는 신의 속성을 가리켜 물빛, 무색이라고 했다. 그 어떤 색도 포용하는 투명한 물빛에 대한 은유는 '차이'를 받아들이는 우리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해 공격하고 배척하지 않으면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나'에 대한 확신, 그리고 다양성에 대한 수용적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확신이 아집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아집 또한 불안의 배설물 같은 것 아닌가. 수많은 패러다임이 공존하는 이 세계에서 그 불안을 떨쳐내는 것은 쉽지 않다. 사회의 불합리함 속에서 모호함과 불안이라는 안개를 헤치고 자신의 삶을 확립한 흑인 아들과 백인 어머니가 감동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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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토닌하라! - 사람은 감정에 따라 움직이고, 감정은 뇌에 따라 움직인다 세로토닌하라!
이시형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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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참 좋아졌다. 어른들이 곧잘 하는 말이다. 다양한 먹을거리, 편리하게 지어진 집, 좋은 옷. 잠깐 눈 붙이면 원하는 장소에 데려다주는 자동차와 비행기. 다양한 편의시설과 오락거리. 그런데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 스트레스가 심하다. 생활의 질과 행복지수가 비례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자살자 수도 매년 증가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뇌과학에서는 그 원인을 뇌내 물질에서 찾는다. 우리 마음을 결정짓는 것은 뇌 속의 신경 전달 물질이라는 것. 문제는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었다.

 

 

   노르아드레날린(Nor-Adrenalin), 도파민(Dopamine), 세로토닌(Serotonin).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대표적인 세 가지 신경 전달 물질이다. 도파민은 엔도르핀으로도 불리는 흥분 전달 물질이다. '즐거움과 보수'가 커질수록 흥분도 커진다. 전국민이 엔돌핀에 흥분하던 시절이 있었다. 무엇이든 넘치면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 엔도르핀의 문제는 '의존성'이라는 부작용이다. 다양한 중독현상을 부를 수 있다. 노르아드레날린은 비상시 자극을 보내는 역할을 담당한다. 위험상황에서 신호를 보내주거나 적절한 긴장감으로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돕는다. 그런데 과잉 분비되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역기능이 문제이다. 뇌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세로토닌 신경은 좌우 균형을 조율하는 기능을 한다.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바로 세로토닌이다. 이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이 바로 '세로토닌'이다. 세로토닌 결핍은 심각한 사회현상을 낳고 있다. 날로 심각해지는 흉악한 범죄나 안타까운 자살 소식.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세로토닌, 감정 조절 능력이 아닌가.

 

 

   마음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하다는 것은 정설로 굳어진 지 오래이다. 우리는 매일 크고 작은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스트레스를 피할 길 없다. 피할 수 없다면 털어내야 한다. 고인 물은 흘려보내야 한다. 우리 몸에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제때 흘려보내지 못하면 병이 생긴다. 몸과 마음의 균형이 깨진다. 이시형 박사가 아리타 교수의 조언을 받아 우리에게 들려주는 세로토닌 건강법은 간단하다. 긍정적인 마음자세와 규칙적인 생활습관, 그리고 매일 일정 시간 걷는 것. 특히 '걷기'를 강조하고 있다. 걷는 것만큼 뇌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걷기'의 중요성은 널리 알려져 있다. 아침 저녁으로 걷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건강이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이를 악물고 걷지는 말라는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즐거운 기분으로 걸으라는 것. 책에는 자연과 하나되는 세로토닌 워킹이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실천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막상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뇌는 습관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주만 눈 딱 감고 실천하면  습관의 틀이 잡히고 백일이면 온전히 습관으로 굳어진다고 한다. 내 몸과 마음을 위해 조금 힘들지만 실천해 보면 좋겠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몸이 편해질수록 건강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이다. 마음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하고 아름다워진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이너 뷰티(Inner beauty), 내적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생각했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 진정 안에서 우러난 좋은 기운을 뿜어내는 사람이 되려면 세로토닌 분비를 활성화시켜주는 생활습관을 실천해야겠다. 우선 내일 아침 스트레칭과 함께 일어나 물 한 컵 들이키고 잠깐이라도 걸어야겠다. 세로토닌형 인간으로 거듭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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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 먼로의 죽음
닉 케이브 지음, 임정재 옮김 / 시아출판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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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끼'라는 이름을 가진 버니는 섹스중독자이다. 거의 매순간 여자 성기를 상상한다. 낡은 TV의 지직거림과도 같은 버니의 작고 난잡한 세계에는 수많은 여인들의 다양한 성기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상상에만 그치지 않고 버니는 실제로 여자만 보면 섹스할 궁리만 한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여자들은 버니의 유혹에 곧잘 넘어온다. 원하면 언제든 자신의 성욕을 충족시킬 수 있는 버니는 그것도 자신의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버니의 삶을 급제동시키는 사건이 벌어진다. 무책임하고 문란한 버니에게 상처받은 아내의 자살. 버니에게 남은 것은 아내의 흔적으로 가득한 커다란 집과 아홉 살 난 아들, 그리고 사람들의 비난이다. 충격과 죄책감에 빠진 버니는 아내의 환영이 자신을 쫓아다닌다고 믿는다. 그 환영으로부터 달아나려는 듯 버니는 낡고 오래된 미니카에 아들을 태우고 길을 떠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내의 죽음은 버니에게 삶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상기시킨다. 그런데 잘나가던 버니의  삶은 아내의 죽음 이후 자꾸 꼬인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쉽고 간편하게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온 버니로부터 세상이 완전히 등을 돌린 것만 같다. 화장품 외판원인 그가 아들에게 처세술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면서 겪어내는 좌절과 수모는 눈물겹다. 섹스와 알콜에 중독된 혼란스러운 그가 대체 아들에게 무엇을 가르친다는 것일까. 나는 아버지처럼 살면 안 되겠구나. 이런 씁쓸한 교훈 정도일까. 아내를 자살에 이르게 하고도 정신 못 차리고 여자 밑구멍이나 찾아다니는 버니.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도 않고, 아들의 말에 귀기울이지도 않는 버니는 천하에 나쁜 놈이다. 명백한 아동학대죄를 적용할 수도 있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나. 기가 찬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버니가 아니다. 암에 걸려 죽어가는 버니의 아버지와 버니의 관계, 버니와 버니 주니어의 관계. 대물림되는 증오와 상처의 가정사에 주목해야 한다.

 

 

   버니는 그녀에게 토끼 귀를 흔들어 보인 다음 아들에게 말한다. "이 아빠는 너도 알다시피 할아버지한테 길거리에서 비즈니스 기술을 배웠다. 아빠와 할아버지는 밴을 타고 황폐하고 오래된 지역을 돌아다녔지. 엄청나게 많은 고양이를 기르며 부유하게 사는 노파들이 많은 낡은 동네 말이다. 할아버지는 페인트가 벗겨지고 풀이 무성한 마당을 가로질러 하숙을 치는 집을 찾아다녔고 아빠가 샌드위치를 채 다 먹기도 전에 멋지고 작은 퀸 앤 드레싱 테이블을 가지고 나오셨다. 할아버지는 재능, 그래 할아버지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빠에게 사람을 대하는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얘야, 당장은 능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아빠는 그것을 네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란다. 알겠니?" (221쪽)

 

 

   버니는 "아버지만 생각하면 속상해 죽겠"다. 사기꾼이자 색정광이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거울에 반사된 것처럼 그 자신 이미 아버지의 모습과 꼭 닮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아버지를 혐오하면서도 아버지의 모습을 고스란히 닮아가는 아들의 비극. 버니에게 아버지의 세계, 아버지가 펼쳐보여준 세계의 경험은 절대적이다. 여자들과 문란한 성생활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사기를 치고, 가정에 무책임한 아버지. 그가 아는 아버지상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버니는 그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들에게 자신이 아는 세계를 보여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버니의 아들, 버니 주니어에게 시선을 옮겨야 할 때이다.

 

 

   버니 주니어의 아이다운 순수함은 버니의 난잡한 성적 상상과 수작, 혼란스러운 정신상태에 대비된다. 버니의 병적인 성적 집착과 아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죽어가는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감정 등은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읽는 이의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데, 흐트러진 것들을 가만히 쓸어담는 듯한 아이의 침착한 시선이 그 혼란을 상쇄하고 있다. 집을 나서기 전, 그러니까 버니가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자신이 아는 세상을 가르쳐주기 전에 아이는 아버지가 최고라고 믿었다. 그런데 집 밖, 세상 한가운데 서 있는 아버지는 홀로 바람을 맞고 있는 것처럼 비틀거리고 혼란스러우며 추악하다. 아이의 물음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돌려주지도 않는다. 아니, 아이의 말을 듣는 것 같지도 않다. 아버지가 펼쳐보이는 세상은 너무 흐릿하고 '환상적'이어서 아이는 아버지의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두 사람은 서로 소통이 불가능하다. 아이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백과사전으로 충족시킨다. 눈앞의 흐릿해지는 세상에서 아버지의 존재감은 점점 더 흐릿해져간다.

 

 

   아이는 소파에 누워 백과사전을 펴고, 망가진 페이지를 뜯어나가다가 '환상'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를 소리내어 읽는다. "환상이란 현실과 조응하지는 않지만 개인이 특정한 욕망이나 목표를 드러내기 위해 상상한 상황을 말한다. 환상은 보통 불가능하거나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아이는 곧바로 백과사전을 닫는다. "아빠, 누가 이런 것을 상상이나 하겠어?" (297쪽)

 

 

   엄마의 자살과 아버지의 돌연사는 아이에게 있어 한 세계의 문이 닫히는 역사적인 사건이며, 새로운 세계의 문이 열리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아이는 엄마의 환영(혹은 내면의 목소리)과의 대화를 통해 앞으로 자신의 삶은 자신의 몫이며, 따라서 그 누구의 개입이나 도움을 바라지 말고 꿋꿋하게 홀로 헤쳐나가야 하리라는 것을 아렴풋하게 깨우친다.

 

 

   '결국 나는 아이에 지나지 않고...... 아이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스베이더를 좋아하는 아이, 놀라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아이, 매혹적인 온갖 사실을 마음에 간직할 수 있는 아이, 세상에 관심이 있는 아이, 따뜻하고 작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아이, 심지어 유령들에게도 말을 걸 수 있는 아이. 그는 어른들의 세계를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왜 모든 사람은 좀비처럼 생겼을까. 왜 그의 엄마는 죽었을까. 왜 그의 아빠는 반미치광이처럼 행동하는가. (262쪽)

 

 

  "어린이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일방적인 아버지의 세계에 길들여질 수밖에 없었던 버니의 반감과 아쉬움을 드러내주는 호소와도 같은 이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어린 시절, 아이다운 순수한 욕구와 호기심을 희생하고 그가 얻은 것은 쉽고 간편하게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약은 어른이 된 자신의 모습이다. "삶에 대한 통찰력도 없고, 삶이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했던 버니가 마지막 죽음의 순간 깨우친 단 한가지 사실은 "착하게 살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끝까지 자기 삶에 대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버니는 정말로 불쌍하다. 그런데 버니의 아들, 버니 주니어는 아버지의 삶을 반복할 것 같지는 않다. 작품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은 어쩌면 아이의 독립을 위한 필연적 장치가 아니었을까. 버니의 죽음은 아이에게는 독자적인 삶의 출발이 된다.

 

 

"어서 이리와. 꼬마야. 내가 도와줄게." 아이는 부드럽게 그녀가 뻗은 손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일어난다. 허리를 쭉 펴고 일어난다. (317쪽)

 

 

   인간은 자기를 둘러싼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알게 모르게 많은 부분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그중에서도 '나'와 가장 밀접하게 관계 맺고 있는 가정환경의 영향은 지배적이다. 그들의 허점과 미운 모습을 불평하고 경계하면서도 어느 순간 그들과 닮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버니 먼로의 죽음》은 다소 과장스럽고 코믹한 방식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흥분하고 분노하고 웃고 울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나'의 모습에 흠칫 놀라게 된다. 

   책을 덮고 표지 그림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작은 TV 속 세계에 갇힌 토끼 씨. 그 앞을 둘러싸고 있는 흥분한 군중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 누가 토끼 씨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이제 TV 스위치를 끄기로 하자. 가련한 토끼 씨는 보내주기로 하자. 그리고 우리의 어린 시절, 우리 자신, 우리 집, 우리 삶으로 마음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버니 먼로의 죽음'을 닮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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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민음사 모던 클래식 29
알레산드로 보파 지음, 이승수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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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이다.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묘한 리듬감을 가진 그 이름, 비스코비츠는 과연 어떤 동물일까. 단순한 소설적 은유일까. 아니면 표지 사이로 고개를 삐죽 내민 저 앵무새가 비스코비츠일까. 책을 읽어보면 궁금증은 풀린다. 비스코비츠는 내가 상상한 그 모든 동물(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알지 못했거나 예상치 못했던 삶의 방식으로 비스코비츠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사는 일보다 더 지루한 건 없다. 햇빛보다 더 울적한 것도, 현실보다 더 거짓된 것도 없다. 잠에서 깨어난다는 건 내게 죽음이나 마찬가지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이다. *(11쪽, 요즘 사는 게 어때, 비스코비츠? 중에서)


 

 

   비스코비츠의 첫 등장은 염세적이고 권태로운 겨울잠쥐이다. 아, 비스코비츠는 겨울잠쥐라는 야행성 설치류였구나. 무릎을 치며 책장을 넘겨가는데, 겨울잠쥐의 이야기치고는 굉장히 복잡하고 환상적이며 또한 삶의 불확실성을 생각하게 한다.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연상케 하는 겨울잠쥐의 이야기는 한 번의 눈() 깜박임, 하품 한 번에 모든 세상이 사라지면서 끝난다.겨울잠쥐의 이야기가 너무 매혹적이어서 내 마음의 절반 이상은 비스코비츠에게 사로잡혔다. 책을 더 읽으면서 나는 비스코비츠가 겨울잠쥐만이 아니라 달팽이, 앵무새, 사마귀, 돼지 등 각 이야기의 주인공 동물의 이름인 것을 알았다. 총 스무 개의 짧은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모든 동물들의 이름이 '비스코비츠'였던 것이다.

 


   "네 이름, 비스코비츠(V. I. S. K. O. V. I. T. Z)는 '매우 똑똑하고 유능한 동물종 중에서도 매우 똑똑한 우등종(Very Intellingent Superior Kind Of Very Intelligent and Talented Zootype)'의 약자란다. 자랑스러운 이름이지."

* (67쪽, 길을 찾아냈구나, 비스코비츠 중에서)

 


  

   겨울잠쥐부터 돼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하는 이 책에는 그동안 접했던 여타 우화들과 차별되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먼저, 생물학자였던 저자의 이력이다. "개구리와 쥐를 흥분시켜 알과 정액을 얻어야만 하는 연구실 일에 염증을 느껴" 인간 뇌에 대한 공부를 했다. 동물과 인간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은 이 책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어느 우화작가도 이처럼 과학적이고 사실적인 동물들의 습성을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 곳곳에 등장하는 생물학 용어들은 이야기의 흐름이나 분위기를 해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생물학자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이야기꾼의 면모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눈앞의 상추 포기 사이에 있는 그- 그녀(달팽이는 자웅동체)에 반한 달팽이의 여섯 달 동안의 사랑의 행로나 뻐꾸기의 반전이 돋보이는 되새 이야기('뻐꾹' 소리가 이렇게 소름끼치게 들릴 수 있다니!), 마치 마음속 메아리처럼 같은 말을 되받아치는 앵무새 연인 등 이야기 속 다양한 비스코비츠(들)는 각자의 생리(生理)에 충실하다. 그들 동물들, 비스코비츠(들)에게서 인간은 저 깊이 잠들어 있는 자신의 동물적 욕망과 본능을 확인하게 된다.

 

 

   단순히 동물 캐릭터에 인간의 속성을 덧입히는 형식의 우화가 아니라, 동물의 생물학적 습성을 통해 우리 인간의 '동물성'을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평범한 우화를 뛰어넘는 색다른 매력과 장점을 갖는다. 생물학과 소설의 결합이라는 실험성과 대중적 재미 모두를 충족시키는 알렉산드로 보파의 첫 번째 소설집.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대박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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