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주문 신부
마크 칼레스니코 지음, 문형란 옮김 / 씨네21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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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결혼 원정기>라는 영화가 있다.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먼먼 이국의 땅으로 신부를 찾아 나선 농촌 총각 만택이 겪어내는 웃지 못할 일화들이 펼쳐진다. 그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우즈베키스탄'에서 만택과 일행들은 상품을 고르듯 여성과 맞선을 본다. 여성들, 즉 '상품' 쪽에게도 이국의 남성들이 '상품'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남녀는 각자의 꿈과 상대를 가늠해본다. 자신이 상대의 조건에 만족하는 '상품'이 되기를, 그리고 상대 역시 자신의 조건을 충족시켜 줄 '상품'이기를 소망한다. 만택으로 분한 정재영의 능청스러운 연기는 분명 웃음을 자아내지만, 그 웃음 끝에 씁쓸한 여운을 길게 남기는 영화였다. 만택의 이야기가 아니라도 국제결혼의 허점은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다. 국제결혼에 대한 편견은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지만, 언어의 장벽과 문화적 차이 같은 실제적 문제는 여전히 당사자들에게 극복해야 할 몫으로 남아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우' 자도 들어본 적 없고 비행기 한 번 타본 적 없는 농촌 총각이 '신부 상품'을 찾기까지의 여정은 까다롭고 험난하다. 그러면 이건 어떤가. 카탈로그를 보고 전화로 주문하면 우편으로 배달되는 신부(新婦). 무슨 해괴한 이야기냐고? 지금 내가 소개하려는 책 이야기이다. 물론 픽션이지만, 어떻게 보면 완전한 픽션도 아니다. '우편으로 배달되는 신부'는 얼굴 한 번 본 남성의 손에 이끌려 하늘을 날아 온 이국의 신부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 국제결혼은 이례적인 일도 아니다. 이전처럼 늙은 총각들의 전유물도 아니다. 영어 사용자가 늘어나고 한국을 찾는 외국인의 수도 늘어나면서 다양한 국제결혼도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니까.

 

 

 

   마크 칼레스니코는 캐나다 청년 '몬티'와 한국인 처녀 '경'의 결혼생활을 통해 국제결혼의 허점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항공우편으로 배달된 신부 '경'은 자신의 과거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꿈을 안고 캐나다에 온다. 빈티지 장난감과 만화책을 모으는 것이 취미인 노총각 '몬티'는 동양 여성에 대한 환상 - 근면하고 충실하고 순종적이고 귀엽고 이색적이고 가정적이고 순진한 - 에 젖어 있다. 저마다의 꿈과 환상을 품고 두 사람은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그런데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경'은 '몬티'의 지나친 장난감 수집 취미에 질리고, 마치 인형처럼 자신을 장난감 가게 카운터에 세워두는 '몬티'의 태도에도 분노한다. 새롭고 멋진 삶에 대한 꿈이 무참히 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있을 때 '경' 앞에 한국인 여성 '이브'가 나타난다. 독립적이고 창조적인 '이브'를 통해 '경'은 자신의 잃어버린 꿈을 찾고 싶어한다. '순종적이고 가정적인' 동양 여성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던 '몬티'는 그런 '경'의 태도를 이해하지도 용납하지도 못한다. 꽈광!! 이들 부부의 충돌은 단연 국제결혼의 문제만은 아니다. 서로 다른 성장배경 속에서 각기 다른 가치관을 형성해온 두 사람의 결합. 이것이 결혼이다. 지금껏 자신의 경험과 인식으로 쌓아올린 가치관에서부터 사소한 규칙, 습관 따위가 결혼과 함께 녹아내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와 다른 상대에 대한 저항감이 작용해 충돌하기 십상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살아가면서 충돌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평생을 싸우면서 살아갈 수도 없다. 부부관계가 원만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수용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모 TV 프로그램에서 부부심리상담사가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이해를 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는 것이 인간이잖은가, 그러면 적어도 상대방의 관점과 태도를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부부관계를 넘어 모든 인간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겠다. '경'과 '몬티'의 꿈과 환상은 찬란했으나 눈앞의 상대방을 존중하고 수용하는 자세가 부족했다. 현실의 상대방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두 사람의 유대감을 형성했다면 꿈이나 환상이 아닌 현실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종영되었는데, <사랑과 전쟁>이라는 부부클리닉 드라마를 즐겨 본 적이 있다. 조정위원들 앞에서 각자의 입장만을 변호하고 변명하는 부부들의 모습은 불편하고 안타까웠다. 나 또한 관계 속에서 그런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깨닫고 반성했었다. 한 발 물러서서 상대방의 입장과 심정을 헤아려 본다면 상처를 반복하는 일이 줄어들 텐데. <우편주문 신부>는 표면적으로 국제결혼의 허점을 꼬집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아집으로 똘똘 뭉쳐 상대방을 내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처를 이야기하고 있다. 섬세한 그림체가 인상적인 <우편주문 신부>는 그래픽 노블(Graphic Noble)의 특성 또한 잘 살려내고 있어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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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춤 - 시몬느 드 보부아르
시몬느 드 보부아르 지음, 성유보 옮김 / 한빛문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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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죽게 내버려 둬. 내 권총을 줘요. 나를 좀 불쌍히 여겨줘요." (...) 죽음과 고통 사이에 일종의 경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처럼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했을 때에도 어떻게 모른 체하고 그의 고통을 더 연장시킬 수 있는 것인지 의아스러웠다. 그리고 죽음이 승리를 거두는 때에도 왜 그리 가증스럽게 천국을 들먹이며 신비화시키는지! (100쪽)

 

《죽음의 춤》(원제: 아주 편안한 죽음,1964)은 시몬느 보부아르가 그의 나이 56세 때 발표한 자전소설이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암 선고와그에 따르는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는 화자의 시선은 대립되는 두 개의 세계를 통찰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 또는 '실존 혹은 공허의 세계'가 그것이다. 익숙한 일상의 시간에서 추방당한 영혼은 삶과 죽음이 줄다리기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에 놓인다. 늙은 어머니의 죽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인 동시에 그 주변인들의 삶에 깊은 파문을 일으킨다. '일상에서 추방당한 영혼'은 죽어가는 자이면서 그것을 지켜보는 자이기도 하다. '죽어가는' 어머니를 쫓는 화자의 시선은 동시에 '죽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자기자신에게로 향한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 뒤에서 시간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나의 과거는 압축되어진다. 내 나이 열 살 때의 '사랑하는 엄마'와 사춘기 시절을 억누르던 그 적대적인 여인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늙은 엄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동안에 나는 그 두 모습의 여자 모두에 대해 슬퍼했다. 엄마와 나 사이가 멀어지자, 슬픔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고 말았는데, 그 슬픔이 다시 내 가슴에서 되살아났다. (189쪽)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극적인 사건은 가슴속의 슬픔을 되살렸지만, 화자는 그 슬픔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과거 어머니와의 반목의 세월과도 화해를 할 수 있게 된다. 무수한 바늘과 선들이 꽂힌 어머니의 육체는 "깔끔하고 고상한 취향의 여인(94쪽)"의 자존심과 부끄러움마저도 무화(無化)시키고 만다. 최후의 동물성만 남은 그 육체 앞에서 화자는 어머니의 죽음(개인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공동의 죽음)을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타자()의 것일 때에 국한된다는 것, 그 '당연한 죽음'이 개인, 즉 자기자신의 일로 닥칠 때 그것은 큰 충격적 사건이라는 것을 죽어가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깨닫는다.

 



  "네가 보이는구나!" 엄마는 매번 캄캄한 어둠에 시력을 빼앗겼다가 다시 찾곤 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치 손톱으로 시트를 움켜쥐듯 세상을 움켜쥐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살아야 해! 살아야 해!' 엄마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139쪽)

 


  늙은 여인의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독자에게도 굉장히 힘겨운 일이다. 기계적인 의사들과 가식적인 간호사들에 내맡겨진 무력한 인간의 고통, 주변 사람의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고 그를 보내주는 것 또한 언젠가 우리가 겪어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닥치기 전까지 '죽음'은 하나의 관념으로, 삶의 '당연한' 사실로 저 멀리에 놓여 있다는 것. '실제적인 죽음', '자기자신의 죽음'은 우리가 알던 것과 다를 수 있음을, 아니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이 책은 깨우쳐준다.

 

 

   살아있는 모든 것, 생명 가진 것들은 삶의 욕망을 본능으로 안고 태어난다. 죽음은 삶의 과정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삶과 죽음이라는 모순을 동시에 안고 걷는 우리의 마지막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선고받은 것처럼 두려움과 공허감이 엄습해 온다. 그 두려움과 공허감이라는 '검은 구멍'을 우리는 못 본 체 걷는다. 돌이켜 보니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죽음'들은 모두가 돌연하고 잔인한 것이었다. 길고 긴, 그래서 지루하기까지 했던 투병 끝에 닥친 내 엄마의 죽음 또한 마찬가지였다.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던 화자가 차라리 어머니의 죽음을 바랐다가, 실제로 어머니의 죽음이 닥치자 충격과 슬픔에 빠졌던 것처럼 그 어떤 죽음도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 아래 인용하는 보부아르의 문장은 그 잔인한 진실을 꿰뚫고 있다.

 




   자연사란 없다. 인간에게 닥쳐오는 어떤 일도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세상에 그들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개인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돌발 사건이다. 죽음은, 그가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무엇으로든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이다. (195쪽)



 

   "죽음의 춤을 추면서 찌푸린 얼굴로 조소를 보내는 사신死神(193쪽)"의 "폭력" 앞에서 우리 인간은 한없이 무력하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 '폭력'과 '무력함' 속에서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살아있는 자의 오만과 용기가 뒤흔들리는 것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노인들의 일상을 비춰주는 tv프로그램에서 배우자를 먼저 보낸 노인들이 인터뷰 도중 감정의 동요를 보이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의아했다. 노인들이 '죽음' 앞에서 초연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노인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장래 나의 모습을 보았다. "만약 내가 죽을병에 걸렸고 가망이 없는데, 그 사실을 내가 모른다면 나한테 굳이 알리지 말아줘." 남편한테 얘길했다. "아니. 나는 꼬옥, 기필코 당신한테 사실을 알릴게!" "안돼! 싫어!" 우리는 낄낄거렸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폭풍처럼 죽음이 닥쳐올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웃을 수 없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웃을 수 있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공포가 엄습해오는 순간에 내 이마에 손을 얹어줄 사람, 고통이 온몸을 휘저을 때 그것을 잠재워 줄 진통제, 텅 비어 침묵이 흐르는 공간을 채워줄 수다스런 거짓말을 해주는 사람이 나 죽어가는 순간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또한 죽어가는 누군가의 곁에서 그의 마지막 '춤'을 지켜볼 수 있는 용기와 사랑을 키워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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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알면 영어가 쉬워진다 - 뇌의 메커니즘을 활용한 원리 학습법
정지환 지음 / 한솜미디어(띠앗)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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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를 알면 영어가 쉬워진다>는 영어 학습(특히 말하기 중심)과 뇌신경계의 작용을 연관시켜 색다른 학습법을 소개하고 있다. 상당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는데, 그 이유는 글쓴이가 직접 체험한 영어 학습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스스로 겪고 힘들어했던 공부법에 대해서 상당한 수준의 고찰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기기억, 절차기억, 프라이밍 기억, 의미기억, 일화기억을 소개하고 있는 전반부, 즉 '기억계층 시스템'으로 별도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단기기억에 매직 7에 대한 언급은 심리학서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수는 이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친근한 단기기억 그 다음은 장기기억이 나올 줄로 예상했는데, 이 책이 영어학습에 친절한 도움서라는 것을 나는 잠시 깜빡했던 모양이다. 이후 이따르는 기억의 종류는 절차, 프라이밍, 의미, 일화기억이다.

 

  오감을 사용한 공부법을 소개하는 다양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체험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교육계는 관리가 편한 닭장에 아이들을 가두어두고 주입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무엇을 뜻할까. 시스템의 변화는 곧 체제의 변화이다. 일본식 교육을 그대로 들여와서 그 모순이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계속해서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쓴이는 현재 영어교육의 모순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충분한 대안을 <뇌를 알면 영어가 쉬워진다>에 서술하고 있다.

 

  뇌 기능에 대해서, 말하기 영어학습과 직결되는 원리에 대해서 글쓴이가 전반부를 할애했다면 중반부는 성인의 경우, 그리고 아동기의 경우에 해당하는 영어학습방법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는 글쓴이의 성장과정을 서술하는데, 직접적인 체험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가독성이 있는 부분이었다.

 

  원리원칙을 알고 행동하기를 욕망하는 것이 성인의 특질이라면, 이 책은 아동을 교육하거나 혹은 재우쳐 영어공부를 하고자 하는 성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영어공부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지, 여태 고집해온 영어학습방법의 문제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뇌를 알면 영어가 쉬원진다>는 명확하게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거기서 멈추었다면 이 책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새로운 학습법에 대한 소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 <뇌를 알면 영어가 쉬워진다>는 적어도 한국에서 성장한 사람들, 특히 영어교육을 받았거나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필독서가 되지 않을까. 기대감을 가져보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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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 신야, 여행의 순간들
후지와라 신야 글 사진,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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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을 때 먼저 버릇은 책장을 바로잡고 사르르 넘겨보는 것이다. 이러면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당연히 사진이다. 특히 평상시 익숙한 모습에 눈은 더 강렬하게 반응한다. <여행의 순간들>에서는 부산 자갈치 시장을 글쓴이가 옮겨놓은 사진이 있다.

 




  이미 <동양기행>을 통해 경험한 글쓴이 후지와라 신야의 사진들은 이 책 <여행의 순간>에서도 한결같이 어둡고 침침하다. 침잠된 어둠을 이용해서 글쓴이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둔한 독자인 나는 아직까지 명쾌하게 정의내리지 못한다. 그럼에도 <여행의 순간>에서는 사진작가이면서 동시에 여행 작가인 글쓴이가 어둠을 통해서 내보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렴풋이 감지된다. 불신. 부산에서 글쓴이를 당혹하게 한 것, 나 역시 불안한 현실경험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체감하고 있는 우리시대의 강렬한 이미지를 글쓴이는 불신, 그렇게 정의내리고 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아주 짤막하게, 그래서 더 강렬했던 한국을 소개한 글은 ‘돌돔 공방(36쪽)’이었다.

 

  우리 땅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그러나 글쓴이는 아주 담담하다. 그의 담담함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는 제삼자, 결국 남이라 위치, 구경꾼이기 때문에 그의 담담한 글쓰기는 아주 당연함을 반영하고 있다.


 


  “여행지에서 피할 수 없는 사소한 분쟁은 그 나라 사람들의 환영키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트러블은 마이너스적인 면도 있지만 여행을 활기차게 북돋아주는 경우도 많다. 굴곡 없는 일상에 지쳐갈 무렵 새롭게 활기를 불어넣어준다는 의미에서 일부러 약간 위태롭게 보이는 다리를 건너갈 때도 있다.// 이를 테면 한국 부산 외곽의 관광객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것으로 유명한 먹자골목에서 ‘도마 위의 잉어가 되어볼까?’라고 생각한 그 남자처럼 말이다.”(34쪽)


 


  이 글에서 글쓴이는 자갈치를 찾기 전 무던히도 지루했던 모양이다. 그리고‘사소한 분쟁’으로 묘사를 하고 있다. 현지인은 무척이나 경멸스러운 경험으로 치부할 수도 있을 돌돔 사건. 요리를 다 먹고 나와서 주문한 돌돔이 멀쩡히 주방 세숫대야에서 아가미를 벌금거리고 있는 모양을 확인한 글쓴이는 매우 당차게 일을 해결한다. 적어도 남한을 글쓴이는 무법지대라고 생각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더 모진 꼴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다행히도 글쓴이는 제법 그럴싸하게 넘겼다.

 




 <여행의 순간>은 오히려 <동양기행>의 무게감보다는 양적인 면에서는 가볍다. 그러나 글쓴이가 말하는 것처럼‘정돈하지 않고 독자 앞에 그냥 내던지는 것’은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던져주고 있다. 글쓴이의 시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한 곳을 훑고 있다. 그러나 한결같이 화려함의 이면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행의 순간>에 특별한 가치를 둔다면 그것은 현상 속의 한 순간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순간이 곧 전체일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순간, 그때를 인정할 때에 비로소 진전이 있을 것이다. 냉철한 시각으로 세계 구석구석을 훑고 있는 글쓴이의 행보가 부럽다. 이 땅에서 나도 글쓴이와 같은 시각으로 순간순간을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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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플렉스의 탄생, 어머니 콤플렉스 아버지 콤플렉스
베레나 카스트 지음, 이수영 옮김, 김영옥 감수 / 푸르메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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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의 여성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작품《피아노 치는 여자》는 놀랍다. 피학 성애(Masochism) 성향을 보이는 여자(에리카)를 노골적으로 묘사해서가 아니다. 200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여타 외설물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작가의 거침없고 날카로운 문장은 단순히 '에리카'의 성적 피학증(sexual masochism)을 묘사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막이 내린 무대 뒤를 훔쳐보는 듯한 집요한 시선으로 '에리카'의 성적 피학증의 근원을 파헤치고 있다. 피아노 선생 '에리카'는 권위적이고 독재적인 어머니의 딸이기도 하다. 사회 일원으로서의 여성 '에리카'의 배후에는 늘 어머니가 있다. '에리카'는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 서 있지만 그녀의 움직임을 조종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무대 뒤의 어머니이다. 작가의 통찰력 있는 묘사를 통해 독자는 '에리카'의 불안정한 감정과 자학적 성향, 모순되는 욕망의 근원이 '어머니'임을 알게 된다.

 

 

   스위스의 심리 분석가 '베레나 카스트'는 본 저서《콤플렉스의 탄생, 어머니 콤플렉스 아버지 콤플렉스》에서 부모를 통해 형성되는 콤플렉스를 유형별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오래 전 읽었던 옐리네크의 작품을 떠올리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변태적 성애에 대한 특별한 혐오감이나 편견 같은 건 없지만 그런 것을 표현해 낸 예술작품을 굳이 찾아 보지는 않는 편이다. 대개의 작품에 묘사된 변태적 성애는 다만 그것이 전부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옐리네크는 딸의 위에 군림하는 독재적인 어머니를 내세워 '부정적 어머니 콤플렉스'의 다양한 성향을 묘사해내고 있다. 작품 속에서 어머니는 딸(에리카)의 '그림자 원형'으로서 작용한다. 물론 당시에 이 작품을 읽으면서는 '그림자 원형'이니 '부정적 어머니 콤플렉스'니 하는 심층적인 심리적 용어를 생각하지는 못했다. '베레나 카스트'의 구체적이고 재미있는 설명을 통해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의 무의식 이론과 부모가 자식에게 미치는 다양한 영향에 대해 조금 더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베레나 카스트'는 부모가 자식에게 미치는 콤플렉스 유형을 크게 네 개로 나누고 있다. '본래 긍정적인 어머니 콤플렉스', '본래 부정적인 어머니 콤플렉스', '본래 긍정적인 아버지 콤플렉스', '본래 부정적인 아버지 콤플렉스'. 저자는 다년 간 연구한 실제 사례자들과 신화나 동화 속 등장인물들을 통해 이 네 개의 유형별 콤플렉스를 상세하게 풀어내고 있다. 신화나 동화를 통한 풀이는 복잡하고 다양한 콤플렉스 유형에 보다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나치게 부모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마마보이나 파파걸은 특별하거나 병적인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부모의 손에 길러지고 성장하는 사람 누구나 어머니나 아버지의 영향을 받는데, 그것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일 수 있고, 두 개의 양상이 복잡하게 얽힌 양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대부분의 부정적인 콤플렉스는 나이에 따른 분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을 경우에 생긴다고 한다. '베레나 카스트'에 따르면 어느 정도의 시기가 되면 부모로부터 육체적, 정신적 독립을 통해 자아 형성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어른이 되고 사회에 나가도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삶이 어려워진다. 비교적 정상적으로 살아가던 사람들도 어떤 난관에 봉착하면 성장하면서 형성된 무의식이 작용해서 다양한 심리적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양한 심리적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여 절망할 것은 없다. 부모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알고 그 근원을 파악하여 주체적인 자아형성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이 책의 본래 목적이기 때문이다.

 

 

   나의 감정과 생각, 행위에서 부모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거나 흐뭇했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부정적인 영향이라고 하더라도 부모를 원망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부모 또한 그들 부모의 희생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은 제각각이고, 그것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다양한 무의식적 행동으로 표출되거나 내면에 고인다. 우리 안에 고인 다양한 콤플렉스, 부정적인 부모의 영향을 극복하고 이제 홀로, 하나의 독립된 자아로서 세상에 서야 할 때이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이들이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나서기를 바란다. 끝으로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일부를 소개하고 글을 맺겠다. 평생을 '아버지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카프카는 글쓰기를 통해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다. 소개하는 글은 오래 전 보았던 흑백영화 속 카프카의 독백이다. 언젠가 메모해 두었던 이 글에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굳은 의지와 끝내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엿보인다.

 

 


   무지보다는 진실을 아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것이 옳았는지 의심스럽군요. 이젠 나도 세상의 일부분임을 깨달았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서로 견해는 다르더라도 전 당신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늦으나마 이 중대한 깨달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과 죽음이 조금은 쉬워지기를…….

 

                                                    ㅡ  Franz Kafka (1883 ~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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