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춤 - 시몬느 드 보부아르
시몬느 드 보부아르 지음, 성유보 옮김 / 한빛문화사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나를 죽게 내버려 둬. 내 권총을 줘요. 나를 좀 불쌍히 여겨줘요." (...) 죽음과 고통 사이에 일종의 경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처럼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했을 때에도 어떻게 모른 체하고 그의 고통을 더 연장시킬 수 있는 것인지 의아스러웠다. 그리고 죽음이 승리를 거두는 때에도 왜 그리 가증스럽게 천국을 들먹이며 신비화시키는지! (100쪽)

 

《죽음의 춤》(원제: 아주 편안한 죽음,1964)은 시몬느 보부아르가 그의 나이 56세 때 발표한 자전소설이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암 선고와그에 따르는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는 화자의 시선은 대립되는 두 개의 세계를 통찰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 또는 '실존 혹은 공허의 세계'가 그것이다. 익숙한 일상의 시간에서 추방당한 영혼은 삶과 죽음이 줄다리기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에 놓인다. 늙은 어머니의 죽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인 동시에 그 주변인들의 삶에 깊은 파문을 일으킨다. '일상에서 추방당한 영혼'은 죽어가는 자이면서 그것을 지켜보는 자이기도 하다. '죽어가는' 어머니를 쫓는 화자의 시선은 동시에 '죽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자기자신에게로 향한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 뒤에서 시간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나의 과거는 압축되어진다. 내 나이 열 살 때의 '사랑하는 엄마'와 사춘기 시절을 억누르던 그 적대적인 여인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늙은 엄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동안에 나는 그 두 모습의 여자 모두에 대해 슬퍼했다. 엄마와 나 사이가 멀어지자, 슬픔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고 말았는데, 그 슬픔이 다시 내 가슴에서 되살아났다. (189쪽)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극적인 사건은 가슴속의 슬픔을 되살렸지만, 화자는 그 슬픔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과거 어머니와의 반목의 세월과도 화해를 할 수 있게 된다. 무수한 바늘과 선들이 꽂힌 어머니의 육체는 "깔끔하고 고상한 취향의 여인(94쪽)"의 자존심과 부끄러움마저도 무화(無化)시키고 만다. 최후의 동물성만 남은 그 육체 앞에서 화자는 어머니의 죽음(개인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공동의 죽음)을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타자()의 것일 때에 국한된다는 것, 그 '당연한 죽음'이 개인, 즉 자기자신의 일로 닥칠 때 그것은 큰 충격적 사건이라는 것을 죽어가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깨닫는다.

 



  "네가 보이는구나!" 엄마는 매번 캄캄한 어둠에 시력을 빼앗겼다가 다시 찾곤 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치 손톱으로 시트를 움켜쥐듯 세상을 움켜쥐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살아야 해! 살아야 해!' 엄마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139쪽)

 


  늙은 여인의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독자에게도 굉장히 힘겨운 일이다. 기계적인 의사들과 가식적인 간호사들에 내맡겨진 무력한 인간의 고통, 주변 사람의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고 그를 보내주는 것 또한 언젠가 우리가 겪어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닥치기 전까지 '죽음'은 하나의 관념으로, 삶의 '당연한' 사실로 저 멀리에 놓여 있다는 것. '실제적인 죽음', '자기자신의 죽음'은 우리가 알던 것과 다를 수 있음을, 아니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이 책은 깨우쳐준다.

 

 

   살아있는 모든 것, 생명 가진 것들은 삶의 욕망을 본능으로 안고 태어난다. 죽음은 삶의 과정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삶과 죽음이라는 모순을 동시에 안고 걷는 우리의 마지막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선고받은 것처럼 두려움과 공허감이 엄습해 온다. 그 두려움과 공허감이라는 '검은 구멍'을 우리는 못 본 체 걷는다. 돌이켜 보니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죽음'들은 모두가 돌연하고 잔인한 것이었다. 길고 긴, 그래서 지루하기까지 했던 투병 끝에 닥친 내 엄마의 죽음 또한 마찬가지였다.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던 화자가 차라리 어머니의 죽음을 바랐다가, 실제로 어머니의 죽음이 닥치자 충격과 슬픔에 빠졌던 것처럼 그 어떤 죽음도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 아래 인용하는 보부아르의 문장은 그 잔인한 진실을 꿰뚫고 있다.

 




   자연사란 없다. 인간에게 닥쳐오는 어떤 일도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세상에 그들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개인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돌발 사건이다. 죽음은, 그가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무엇으로든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이다. (195쪽)



 

   "죽음의 춤을 추면서 찌푸린 얼굴로 조소를 보내는 사신死神(193쪽)"의 "폭력" 앞에서 우리 인간은 한없이 무력하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 '폭력'과 '무력함' 속에서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살아있는 자의 오만과 용기가 뒤흔들리는 것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노인들의 일상을 비춰주는 tv프로그램에서 배우자를 먼저 보낸 노인들이 인터뷰 도중 감정의 동요를 보이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의아했다. 노인들이 '죽음' 앞에서 초연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노인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장래 나의 모습을 보았다. "만약 내가 죽을병에 걸렸고 가망이 없는데, 그 사실을 내가 모른다면 나한테 굳이 알리지 말아줘." 남편한테 얘길했다. "아니. 나는 꼬옥, 기필코 당신한테 사실을 알릴게!" "안돼! 싫어!" 우리는 낄낄거렸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폭풍처럼 죽음이 닥쳐올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웃을 수 없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웃을 수 있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공포가 엄습해오는 순간에 내 이마에 손을 얹어줄 사람, 고통이 온몸을 휘저을 때 그것을 잠재워 줄 진통제, 텅 비어 침묵이 흐르는 공간을 채워줄 수다스런 거짓말을 해주는 사람이 나 죽어가는 순간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또한 죽어가는 누군가의 곁에서 그의 마지막 '춤'을 지켜볼 수 있는 용기와 사랑을 키워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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