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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을 입은 원시인 - 진화심리학으로 바라본 인간의 비이성과 원시 논리
행크 데이비스 지음, 김소희 옮김 / 지와사랑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1992년 10월 28일.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신도들이 하늘로 올라가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종말론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날이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굉장한 공포에 사로잡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말짱한 모습으로 깨어났다. 하늘이 아니라 내 방 이불 속에서. 나에게 그 날은 잠깐동안의 공포로 지나갔지만, '휴거'를 확신했던 일부 사람들은 종말 아닌 종말을 맞이했다. 모든 것을 정리한 그들에게는 공중으로 들어올려질 몸뚱이 하나만 남았기 때문이다. 다미선교회의 설립자인 이장림 목사의 예언에서 시작된 터무니없는 이 사건은 인간의 신념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지녔는지 보여준다. 얼마 전 TV에서 당시 휴거 사건을 경험한 기독교인이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는 그 사건을 '황당하고 재미있는 해프닝' 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그가 그런 엄청난(?) 사건에 휘말린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건 바깥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그들을 자신과는 '다른' 사람들로 생각할지 모른다. 한마디로 말해 '미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이제 '그들', '미친' 사람들에게 향해진 시선을 나에게 돌려보자. 우리는 과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양복을 입은 원시인>은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동안 진화심리학 관련 서적들을 여러 권 접했다. 진화론에서 인간 심리와 행동의 뿌리를 찾아내는 접근법이 굉장히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비슷한 내용의 책들을 여러 권 읽으면서, 마치 복습하는 꼴이 되어갈 무렵 나는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인간의 비이성과 원시논리를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풀어낸다는 점에서 내 흥미를 자극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단순한 흥미는 경악으로 바뀌었다. 우리 인간의 비합리적인 사고 작용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데 대한 충격이었다.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한다고 믿고 있던 나는 보기 좋게 가격당한 것이다.
“나의 아버지가 나의 곁에서 조을 적에 나는 나의 아버지가 되고 또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고, 그런데도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대로 나의 아버지인데 어쩌자고 나는 자꾸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니 나는 왜 나의 아버지를 껑충 뛰어 넘어야 하는지 나는 왜 드디어 나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냐.”
이 시는 이상(李箱)의 연작시인 <오감도> 시제2호의 전문이다. (...) 아버지의 아버지들을 연상하다 보면 수없이 많은 아버지들을 만나게 되고, 고고학적 성과에 따르면 그 아버지들은 200만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자, 여기서 시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을 한 줄로 세워 보자. 우리는 까마득히 먼 줄의 끝자락에 서서 앞에 있는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있다. 그런데 그 줄을 거꾸로 뒤집으면, 그러니까 모두 뒤로 돌면 우리는 가장 앞자리에 놓이게 되고 이상의 말처럼 그들의 아버지가 된다. 그들이 지닌 삶의 이야기를, 다른 말로 그들의 유전자를 모두 이어받은 우리는 이상의 말처럼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가 된다.
- - <신화, 우리 시대의 거울, 2010, 다른세상> 에서 옮김
진화론에 의하면 우리 인류는 오래된 역사를 거치면서 상당한 선택압에서 살아남은 생명체이다. 그런데 진화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있다. 적자생존. 강한 유전자만이 살아 남는다고 하는 적자생존의 원리가 진화론과 자주 언급되고 있지만, 사실 강하고 우월한 유전자만이 살아 남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적응'이다. 일정 조건이나 환경에 적응한 유전자가 살아남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월한 유전자뿐 아니라 열등한 유전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백만 년 동안의 진화과정이 고스란히 우리 인간의 두뇌에 축적되어 있다. 인간의 외부환경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세대를 거쳐 이루어진 지각체계만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야기된다. 수백만 년 전에는 생존과 직결되어 있던 것이 지금의 환경에서는 결함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원시인'이 상징하는 '비이성적이고 미신적인 자아'가 현대인의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양복을 입은 원시인>은 바로 이 '원시인 - (비이성적이고 미신적인 자아)'을 다양한 상황과 관점에서 날카롭게 해부하고 있다.
"결함이 있는 마음은 모여 결함을 찬양하는 문화 제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누군가가 의구심을 품는 것에 저항하고 반대한다."
- - (책속에서)
우리 안에 들앉아 우리 사고와 이성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이 '원시인'은 이질적인 신념과 판단을 배척한다. 책의 저자 '행크 데이비스'는 이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원시인' 무리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안의 '원시논리', 비이성적이고 미신적인 사고과정을 인식하는 것, 그 결함을 인정하고, 의식적으로 이를 개선해 나가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 책은 현대를 살아가는 누구나 한 번쯤 필독해 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