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을 입은 원시인 - 진화심리학으로 바라본 인간의 비이성과 원시 논리
행크 데이비스 지음, 김소희 옮김 / 지와사랑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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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92년 10월 28일.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신도들이 하늘로 올라가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종말론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날이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굉장한 공포에 사로잡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말짱한 모습으로 깨어났다. 하늘이 아니라 내 방 이불 속에서. 나에게 그 날은 잠깐동안의 공포로 지나갔지만, '휴거'를 확신했던 일부 사람들은 종말 아닌 종말을 맞이했다. 모든 것을 정리한 그들에게는 공중으로 들어올려질 몸뚱이 하나만 남았기 때문이다. 다미선교회의 설립자인 이장림 목사의 예언에서 시작된 터무니없는 이 사건은 인간의 신념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지녔는지 보여준다. 얼마 전 TV에서 당시 휴거 사건을 경험한 기독교인이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는 그 사건을 '황당하고 재미있는 해프닝' 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그가 그런 엄청난(?) 사건에 휘말린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건 바깥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그들을 자신과는 '다른' 사람들로 생각할지 모른다. 한마디로 말해 '미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이제 '그들', '미친' 사람들에게 향해진 시선을 나에게 돌려보자. 우리는 과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양복을 입은 원시인>은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동안 진화심리학 관련 서적들을 여러 권 접했다. 진화론에서 인간 심리와 행동의 뿌리를 찾아내는 접근법이 굉장히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비슷한 내용의 책들을 여러 권 읽으면서, 마치 복습하는 꼴이 되어갈 무렵 나는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인간의 비이성과 원시논리를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풀어낸다는 점에서 내 흥미를 자극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단순한 흥미는 경악으로 바뀌었다. 우리 인간의 비합리적인 사고 작용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데 대한 충격이었다.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한다고 믿고 있던 나는 보기 좋게 가격당한 것이다.

 




“나의 아버지가 나의 곁에서 조을 적에 나는 나의 아버지가 되고 또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고, 그런데도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대로 나의 아버지인데 어쩌자고 나는 자꾸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니 나는 왜 나의 아버지를 껑충 뛰어 넘어야 하는지 나는 왜 드디어 나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냐.”

 


   이 시는 이상(李箱)의 연작시인 <오감도> 시제2호의 전문이다. (...) 아버지의 아버지들을 연상하다 보면 수없이 많은 아버지들을 만나게 되고, 고고학적 성과에 따르면 그 아버지들은 200만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자, 여기서 시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을 한 줄로 세워 보자. 우리는 까마득히 먼 줄의 끝자락에 서서 앞에 있는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있다. 그런데 그 줄을 거꾸로 뒤집으면, 그러니까 모두 뒤로 돌면 우리는 가장 앞자리에 놓이게 되고 이상의 말처럼 그들의 아버지가 된다. 그들이 지닌 삶의 이야기를, 다른 말로 그들의 유전자를 모두 이어받은 우리는 이상의 말처럼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가 된다.


 

                                         - - <신화, 우리 시대의 거울, 2010, 다른세상> 에서 옮김


 

   진화론에 의하면 우리 인류는 오래된 역사를 거치면서 상당한 선택압에서 살아남은 생명체이다. 그런데 진화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있다. 적자생존. 강한 유전자만이 살아 남는다고 하는 적자생존의 원리가 진화론과 자주 언급되고 있지만, 사실 강하고 우월한 유전자만이 살아 남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적응'이다. 일정 조건이나 환경에 적응한 유전자가 살아남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월한 유전자뿐 아니라 열등한 유전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백만 년 동안의 진화과정이 고스란히 우리 인간의 두뇌에 축적되어 있다. 인간의 외부환경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세대를 거쳐 이루어진 지각체계만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야기된다. 수백만 년 전에는 생존과 직결되어 있던 것이 지금의 환경에서는 결함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원시인'이 상징하는 '비이성적이고 미신적인 자아'가 현대인의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양복을 입은 원시인>은 바로 이 '원시인 - (비이성적이고 미신적인 자아)'을 다양한 상황과 관점에서 날카롭게 해부하고 있다.

 


   "결함이 있는 마음은 모여 결함을 찬양하는 문화 제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누군가가 의구심을 품는 것에 저항하고 반대한다."  


 

                                                      - - (책속에서)


 


   우리 안에 들앉아 우리 사고와 이성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이 '원시인'은 이질적인 신념과 판단을 배척한다. 책의 저자 '행크 데이비스'는 이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원시인' 무리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안의 '원시논리', 비이성적이고 미신적인 사고과정을 인식하는 것, 그 결함을 인정하고, 의식적으로 이를 개선해 나가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 책은 현대를 살아가는 누구나 한 번쯤 필독해 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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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되기 - Becoming Human
장 바니에 지음, 제병영 옮김 / 다른우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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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품고 살아간다고 한다. 자칭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인간에게 '인간되기'라는 표제는 그래서 다소 거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자기 확신이 뒤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지은이 장 바니에는 이 오만과 아집의 껍데기를 향해 뜨겁고 단단한 돌을 던진다.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던 바니에는 프랑스의 트로슬리 브뢰이유에서 집 한 채를 마련해 발달 장애인 두 사람과 함께 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작은 공동체를 '라르슈'라고 부른다. 현재 34개국에 134곳이 넘는 라르슈 공동체의 시작이었다. '장'은 장애인들과 생활하면서 모든 인간은 똑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는 강함과 약함,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대립되는 본성과 욕망으로 빚어진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파리의 어느 거리에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자와 마주친 장 바니에는 자기 안의 두려움과 불안에 직면하게 된다. 이 여자를 도와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만약 이 여자가 지속적으로 도움을 요청한다면? 집으로 찾아온다면? 더럽고 못 생기고 추한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 본성을 자기 안에서도 발견하면서 스스로의 나약함을 인정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온전한 생활을 하기 어려운 장애인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장'은 인간적 나약함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하는 일이 좋은 일이라고 인정하지만, 그 이상 관계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파리의 거리에서 '장'이 직면했던 그 '두려움'과 '불안' 때문이다. 밝은 곳에 있기를 원하는 것 또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사회적으로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안도하는 동시에 불안을 느낀다. 그럴수록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쓴다. '더 나은 존재'라는 건 무엇일까. 사회적인 지위, 풍족한 재산, 안정적인 미래일까? 장 바니에는 고개를 젓는다. 그가 말하는 인간되기, 즉,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길은 자기 안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강해 '보이기'를 원한다. 자기 안의 나약함, 이기심, 비뚤어진 욕망을 들키는 것을 두려워한다. 두려움 때문에 자기 자신조차 속이게 된다. 나는 이미 충분히 좋은 사람이고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다,라면서. 사회적 약자 앞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 안에 감춰진 나약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너도 나와 마찬가지로 추하고 더럽고 나약해. 두려움 때문에 그들을 포용할 수도 없다. 장 바니에는 이 페쇄성에서 공포와 증오와 편견, 배척하는 마음이 싹튼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과거와 함께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타인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두려움 없이 자신을 더 개방하고 더 많이 이해하고 타인을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현실에 부딪쳐 나약해지거나 그 실체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현실에 억지로 모양을 짜 맞추는 것 또한 아니다.오히려 우리가 하나의 개인으로, 또 하나의 ()으로서 모든 이의 선()을 위해 진화해야 하는 것이다.  -- (p.29)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즉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배척에서 포용으로, 공포에서 신뢰로, 폐쇄에서 개방으로, 판단과 편견에서 용서와 이해로 '마음의 움직임'을 이루어야 한다고. 그때 비로소 서로에 대한 존엄성과 진정한 공동체 의식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인간되기>는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우리의 불완전함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훌륭한 존재가 아니다. 인정해야 한다. 훌륭한 존재가 아니면 어떤가. 나약하면 어떤가.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면 좀 어떤가. 평생 두려움과 불안을 혼자 떠안고 반쪽의 얼굴로 사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내가 불완전하고 미숙하다면 그것을 채워나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인간이 가진 훌륭함일 것이다. <인간되기>는 이 귀한 사실을 깨우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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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버돗의 선물 - 한정판 스페셜 기프트 세트 (스태들러 색연필 세트 + 그림엽서 + 케이스)
테드 겁 지음, 공경희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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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망하기 전에 제게 편지를 보내세요.


 


 

 

 


 

 

                                    -   Mr. 버돗












사랑하는 민나,

목표를 이룰 때까지

묻지 말고 살면서 일해라.

연약한 이웃들을 돕고

아무한테도 도움을 구하지 마라.

인생은 거품에 불과해서

굳건한 것은 두 가지,

타인의 고통에의 친절

나의 고통에의 용기.

 

ㅡ 너의 헌신적인 엄마가.

 

 

 


 

 


   "왜, 구걸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왜 그렇게 많지. 나는 그 사람들 만날 때마다 그냥 지나치질 못하거든. 동전이 있어도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죠." 이십대 초반, 어느 술자리에서 나는 평소 고민해왔던 문제를 꺼냈다. "거기까진 괜찮은데, 그러고 돌아서면 심각한 갈등상태에 빠지거든." 노란 불빛 아래 취기로 불콰한 얼굴들이 일순간 나에게로 쏠렸다. "나는 나의 오만이 역겨워요. 수치스러워. 그들에 대한 나의 연민이 부끄러워요. 나한테는 없어도 그만인 몇 푼 가지고 흡족해하는 나 자신이 재수없어. 근데 그 순간엔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었거든요. 그 마음을 주고 싶었거든." 술 한 잔. "내 오만함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 같아서 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나요.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닌데,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도 안 들어. 찝찝하죠. 그리고 언제부턴가 나는 그 사람들 피해요. 그들이 보이면 죄지은 사람처럼 시선을 피하면서 서둘러 걷죠." 나는 노랗고 붉은 얼굴들을 하나씩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노랑머리만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응수해 주었다. "음. 근데 진짜 진짜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 우리한테는 몇 푼 아닌 것이 그들에겐 하루 밥값이 될 수 있지. 그러니까 자의식 문제로 고민하는 것 자체가 더 큰 오만일 수 있다고. 내 생각은 그래." 노랑머리는 뭔가 다르구나. 그의 말에 나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던 것 같다. 그리고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귀한 대화였다. 이후 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이번 겨울 나는 다시 그 질문과 맞이하게 되었다.

 

 

   Mr. 버돗의 선물. 선물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주는 것. 여기까지 쓰고 한참을 생각했다. 무언가 주는 것. 주는 것. 쉬운 일 같지만 한편 어려운 일 같기도 하다. 누구에게 선물을 줘 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일까. 잘 모르겠다.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우선 <Mr. 버돗의 선물> 을 소개하겠다. 제목과 마찬가지로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다. 1933년 대공황기를 겪고 있던 미국의 작은 주 캔턴의 지역신문에 트럼프 카드 크기만한 작은 광고가 실린다.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이었다.

 

 



만약 당신이 내일 먹을 빵을 걱정한다면
복지단체에서 도움을 받아야 할지 고민할 것입니다.
제가 이런 상황에 놓인 75가구에게
즐겁고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기회를 드릴 수 있다면
매우 기쁘겠습니다.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분과 가족의 신원은 절대 밝히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편지로 사정을 알려주시면 곧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_ B. 버돗.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은 광고의 힘은 놀라웠다. 미스터 버돗의 우체국 사서함으로 수많은 편지들이 도착했다. 저마다의 진실하고 절박한 사연들에 마음이 동한 버돗은 애초의 계획을 바꿔 150가구에게 5달러씩을 선물했다. 이 책은 미스터 버돗에게 날아든 수많은 사연들을 묶고 있다. 현재 처한 어려움을 알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정직하고 간절하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고마움'이 담겨 있다. 자신이 5달러를 받지 못하게 되더라도 Mr. 버돗의 온정은 어려운 시기를 겪는 모두에게 귀한 선물이 될 거라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자신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들은 5달러가 절실했다.

 

 


   직업이 뾰족탑 수리공이지만 도랑 파는 일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아이 몇은 신발이 필요하고 다른 애들은 옷이 필요하지만, 어느 착한 분이 저녁밥을 보내주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난 3주간 여러 끼니를 빵과 커피로만 때웠답니다. 민간사업청 관리자에게 말해 보았으나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_  119쪽, '당신의 두 발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다면' 중에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5달러짜리 수표를 받은 사람들은 감사의 편지도 잊지 않았다. 5달러는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산타클로스, 아니 버돗의 선물로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었다. 버돗의 5달러는 빵과 옷, 신발이 되어 그들의 허기를 채우고 몸과 발을 감싸준 것이다. 허기는 다시 찾아들 것이고, 옷과 신발은 낡아가겠지만 버돗이 퍼뜨린 '희망'만은 사람들 마음 속에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 '희망'이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주었을 것이다. 버돗의 5달러는 대공황에 빠진 미국을 살려낸 작은 힘이었다. <Mr. 버돗의 선물>이 담고 있는 '희망'이다.

 

 

   선물. 누군가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 어떤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쉬워 보이기도 한다. '장차 성공하면 기부도 하고 어려운 이웃도 돌아봐야지', '나도 어려운데 누굴 도와?' '나눔' 앞에서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반응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를 도울 만큼 넉넉하다고 생각지 않는 것이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눈멀어 다른 사람의 한숨을 들을 수 없다. 눈물을 볼 수 없고, 허기를 느낄 수 없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나누는 일이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매년 겨울 특정 장소에 금일봉을 두고 가는 익명의 사람을 추적하는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추적60분 같은 분위기는 아니고. 올해도 어김없이 그는 지정 장소에 금일봉을 놓고 갔는데, 나중에 보니 속이 꽉 찬 돼지저금통들이 수십 개였다. 그 장면을 보면서 마음이 뜨거웠다. 고마움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한평생 어렵게 모은 돈을 기부한 할머니도 있다. 일반적인 사람들('나도 어려운데 누굴 도와?' 하는)의 기준에서 본다면 그들은 결코 풍족한 편에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도 어려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들은 기꺼이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다. 앞서 얘기한 두 부류 사람들의 차이는 결코 물질적 풍요의 정도가 아닌 것 같다. 나눔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눔으로써 얻는 '그 무엇'을 알지 못한다. 반면, 나눔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은 나눔에서 오는 긍정적인 힘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또 한 번 진심으로 부끄러워진다. 나는 선물을 주는 법도 받는 법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다. 알았으면 조금씩 조금씩 선물을 준비해야지. 'Mr. 버돗'은 나에게도 이토록 귀한 선물을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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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데기 프로젝트 - 2010 제4회 블루픽션상 수상작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47
이제미 지음 / 비룡소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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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데기 프로젝트》는 청소년 문학상 수상작 - 제4회 블루픽션상 - 이다. 내 나이 서른. 믿기지 않지만 그렇게 되었다. 나는 청소년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 나는 무엇일까. 모르겠다. 어느 심리학 책에서 서른 살은 인생의 두 번째 사춘기라 했다. 무언가 이루었다고 하기엔 부족하고 다시 시작하기엔 늦은 감이 있는 불안정한 시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인생의 두 번째 사춘기를 맞은 셈이다. 그래서인가《번데기 프로젝트》를 두고 많은 생각을 했다.

 

 

   주인공 정수선은 열여덟 살의 소설가 지망생. 아버지가 운영하는 삼겹살구이 가게에서 알바를 하면서도 책을 놓지 않을 만큼 소설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다. 그 열망을 빼고는 존재감이 희미한 평범한 여고생 수선이 대학 백일장 대회에서 입상을 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이제미는 예기치 못한 상황들을 펼쳐놓는다. 상금 1억원이 걸린 공모전에서 입상하면 자신에게 20%를 떼어달라는 조건으로 수선의 글쓰기 코치로 나선 문학 담당 선생 '허무식'이나 자신의 특수한 경험담이 막상 소설로 완성되자 저작권을 주장하는 치타 '추지행', 수선의 환상을 박살내버린 작가 '이보험' 등 등장인물들도 심상치않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점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실존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제미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공부하기 싫어서 소설을 쓰려고 했건만, 아무래도 멧돼지 피하려다가 호랑이 굴로 들어간 것 같았"다는 정수선의 독백은 과장이 아니다. 10대 청소년들의 삶은 획일적이고 한정되어 있다. 말 그대로 '고치의 시기'인 것이다. 이제미는 평범한 여고생 수선을 중심에 두고 전혀 평범하지 않은 상황과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편하게 읽으면서 무료함을 달랠 생각으로 책을 펼친 독자는 어느 순간 호랑이 굴로 빠져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더라도 몸을 돌려 빠져나오고 싶지는 않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등장인물들의 개성, 재미와 긴장이 어우러진 이야기 전개가 '호랑이굴'의 정체이기 때문. 아흥 ~

 


   세상은 비극으로 차고 넘치지만 그것을 반드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청소년들에게 있는가. 조금은 코믹하게 비틀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은 그게 진짜 현실에 가깝지 않을까. 나는 이 소설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사실 네 상황은 그렇게 비극적이지만은 않아. 봐, 웃기잖아?"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다.  

 

                                       ㅡ 작가의 말 중에서 ㅡ

 


   '호랑이 굴' 얘기가 나온 김에 좀 더 하겠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앞서 인용한 작가의 말에서 나는 저 오래된 속담을 떠올렸다. 무섭고 힘든 상황이라도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말이다. '마음 먹기에 달렸다.' 사는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이기도 했다. 당신은 호랑이 굴 밖에 있으니까 맘 편하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흘려들었다.《번데기 프로젝트》의 또 다른 주인공들, 수많은 청소년들도 지난 시절 나와 같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른들의 우려와 격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엔 자신의 세계가 너무 한정되어 있다. 비좁은 세계의 갑갑함이 가장 큰 시련이다. 제 안에 숨겨진 작은 날개를 감지하며 가슴이 부풀었다가 딱딱하고 비좁은 고치의 벽을 느끼고 불안감에 사로잡히기를 반복하는 것이 모든 '번데기'들의 현실이다. '번데기'는 번데기일 뿐이다. 번데기한테 나비 이야기를 들려줘도 크게 와닿지 않는다. 자신이 모르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번데기처럼 현실에 충실한 존재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불안정한 제 현실을 고스란히 버텨내는 번데기가 기특하다는 마음마저 든다.

 

 

   '번데기'는 신선한 상징은 아니다. '성장'이라는 주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대표적인 상징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뻔하다는 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뻔한 것들'의 진실에 감동한다. 진실은 거창하고 복잡한 것 속에 있지 않다. 왜 어른들이 뻔한 얘기를 밥 먹듯이 하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뻔하니까 그런 것이다. 인생은 뻔한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기에 따라 뻔(fun)한 것이 될 수도 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이제 죽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 죽을 것이다.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호랑이 굴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해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해야 한다. 생각이 중요하다. 어릴 때, 그때도 겨울이었다. 가파른 아스팔트 도로 위를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신나게 달리다 눈길에 미끄러져 자전거와 함께 날아 추락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친구들과 함께였다. 내가 좋아하던 아이도 있었다. 아픔보다 창피함이 먼저 밀려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심각한' 순간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친구들의 걱정스러운 얼굴과 내 우스꽝스러운 모양이 대비되면서 순간적으로 터져나온 웃음은 한참 이어졌다. 나중에는 다른 아이들도 함께 웃었던 것 같다. 안 아팠던 것이 아니다. 진짜 아팠다. 집에 와서 보니 여기저기 검붉은 피멍이 맺혀 있었다. 뻔한 얘기를 너무 오래하고 있는 것 같다.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꿈이 뭐예요?"라는 질문을 받거나 "내 꿈은" 어쩌고 하는 부푼 대답을 하는 일이 어색한 나이가 되었다. 꿈을 좇기보다는 현실을 지탱하는 것이 더 절박해진 것이다. 서글프지는 않다. 이상하게도 삶이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번데기'의 상징이 단지 청소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은 거대한 책. 살아있는 누구든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차암 뻔한 얘기다. 그래도 꿋꿋하게 뻔한 얘기로 끝을 맺어야겠다. 꿈이든 희망이든 어떤 말로 불리든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품은 작은 씨앗이 있다. 《번데기 프로젝트》는 내 안의 작은 씨앗을 꿈틀거리게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세상 모든 번데기들에게 작가의 목소리를 빌려 응원의 말을 외치겠다. "사실 네 상황은 그렇게 비극적이지만은 않아. 봐, 웃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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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왈 曰曰 - 하성란 산문집
하성란 지음 / 아우라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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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왈. 시끄럽다. 개소리. 제목을 보고 스쳤던 생각. 언젠가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하성란 작가가 인터뷰를 했다. 작품 얘기였던 것 같다. 그때 작가의 말하는 본새는 시끄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굉장히 차분했다. 말하는 음성이 조용했다. 자연적으로 귀 기울이게 만드는 고요한 울림을 가진 그에게 순간 부러움을 느꼈던 것도 같다. 그때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인가. 그의 산문집 제목은 조금 의외였다. 호기심이 일었다. 무엇보다도 말(曰)이 아쉬워서 집어든 책 .


 

   2009년 1월 19일부터 그해 연말까지 한국일보 '길 위의 이야기'에 연재했던 글들을 묶는다. (...) 그렇지 않은 해가 없었겠지만 작년 한 해도 다사다난했다. 많은 이들과 함께한 순간들을 두고두고 잊지 않을 거라던 그 마음이 그새 아스라해졌다는 것에 놀란다. 바꿔 말하자면 이 짧은 글들이 다시는 못 올 2009년에 바치는 송사쯤으로 읽히면 좋겠다.

 

                                                       - 작가의 말 중에서


 

   해 보름 정도를 빼고는 매일 거르지 않고 썼다는 650자 산문 묶음집이다. 정말 650자일까. 나와 같이 호기심 많은 독자도 있을 것이다. 몇몇 글들의 글자수를 세어보았다. 띄어쓰기 포함해서 650자가 맞다. 이렇게 얘기해도 분명 세어보는 사람들 있을 것이다.

 


   제목을 '왈왈'로 정하고 보니 지난 한 해 정말 왈왈(曰曰)댔다는 느낌이다. 누가 듣든 듣지 않든 개의치 않고 쉬고 작은 목소리나마 제 목소리를 내려 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도 그렇다. 정말 왈왈댔다는 느낌이다. "작은 목소리나마 제 목소리를 내려"했다기보다는 시끄럽기만 했다. 생각만 해도 시끄러울 정도이다. "누가 듣든 듣지 않든 개의치 않고" 제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작가의 말이 다소 의심스럽다. 누군가는 제 목소리를 들을 거라는 가능성 내지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그래 다른 사람은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예외이다. 어릴 때 일기 쓰던 생각이 난다. 방학 때 썼던 내 일기장이 전교생에게 공개된 적이 있다. 일기를 가장 솔직하게 쓴 어린이의 글이라고 했다. 솔직하게 쓴 건 사실이다. 그런데 몇 번 공개가 되고 보니 '일기를 가장 솔직하게' 쓰던 어린이는 머리를 굴렸다. 이 글을 그 친구가 보겠지. 그 선생님이 보겠지. 염두에 두면서 일기를 쓰게 되었다. 거짓을 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내밀한 자기 안을 들여다보고 스스로와 소통하는 일기의 순수한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그때부터 나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써댔던 것인지 모르겠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왈왈댔던 것 같다. "누가 듣든 듣지 않든 개의치 않고"가 아니라 누군가는 들어줘야 하고 들어줄 것이라 믿으면서. 왈왈.

 

 

   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다. 사람살이를 어렵게 하는 것들은 많다. 어쩔 수 없는 주변상황이 그렇고 내 마음 같지 않은 다른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당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아무에게나 질문을 던져보라. 미움과 절망, 후회와 변명의 말들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올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말(曰)로 시작해 말(曰)로 끝나는 유별난 종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태어난 지 18개월 된 조카가 말을 뗐다. 다섯 살 제 누나와 엄마가 놀고 있으면 곁으로 와서 말을 한다. "나도." 그래 너도 말의 세계에 입문했구나. 본격적인 사람살이 돌입했구나. 사람 물이 들어가는구나. 어린 조카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이는 자라면서 말의 위력(威力)과 무력(無力)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신인일 땐 어딘가 모르게 촌스럽던 연예인들도 몇 년 지나면 세련된 모습이 된다. 그런 걸 '방송국 물 좀 먹었다'라고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시골 사는 친척들도 내가 놀러 갈 때마다 서울 물은 다르네, 라며 웃곤 했다. 물도 물이려니와 먹는 음식에 따라 쌍둥이의 얼굴도 다르게 바뀌는 듯하다. 어쩌다 헤어져 서울과 유럽에서 따로 자란 쌍둥이는 어딘가 모르게 모습이 많이 달랐다. 작년 여름 아빠와 떨어져 시카고에 살고 있던 시조카가 서울에 왔다. 그곳엔 한국인이 많지 않다고 했다. 그애는 어릴 적 배웠던 우리말을 떠듬떠듬 섞어가며 이야기했다. 못 알아듣는 우리말은 영어 사전을 뒤적여 알려주었다. 그애의 아버지는 7년 동안이나 미국에 가 있었으면서도 고향 사람들보다 더 사투리를 진하게 하는 이였다. 방송국 물이나 서울 물처럼 시카고 물이라는 것도 있다. 제 아빠를 닮은 그애는 뭐랄까 어딘가 모르게 버터를 좀 바른 듯한 '미국에 사는 한국인' 표시가 팍 났다. 제 아빠가 엉뚱한 말을 하자 그애가 곧바로 되받았다. "아빠, 약 했어?" 미국 친구들과 하던 우스갯소리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니 좀 이상하긴 했다. 그애 아빠는 아이도 못 알아들을 진한 사투리로 버럭 화를 냈다. 음식과 마찬가지로 언어도 사람의 얼굴을 변화시킨다. 두 사람의 얼굴은 점점 더 달라질 것이다.

 - 물과 말, 전문


 

 

   을 쓰다 보니 책에 대한 내용보다 '말'에 대한 개인적 생각을 풀어놓고 있는 것 같다. 짖고 싶은 본능이 문제다. 큰일이다. 다시 책 얘기를 하기로 한다. 이 책을 펼친 건 지난 해 끄트머리에서이다. 생각은 많고 말을 풀어놓을 곳은 없어 속이 시끄럽던 때였다. 좀 심각했다. 그래서 작가가 아무리 왈왈대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안아주세요." 지하철역 입구에서 술 취한 사내의 말을 흘려듣고 지나쳤다던 작가의 경험담이 떠오른다. 말을 제대로 못하면 자연 듣는 것도 어려워지는 것 아닐까.

 

 

 

   의 무한한 매력에 취해 있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황홀할 지경이었다. 책,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승화된 말(曰)들을 타고 신나게 달려왔다. 치기(稚氣)와 허영(虛榮)의 시절을 바람처럼. 그리고 잠시 멈춘 길,위에 드리워진 내 그림자가 수상쩍다. 내 것 아닌 말의 허울 속에서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홀려 있었나. 나는 온전히 제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성란 작가의 조용한 짖음- 《왈왈》 -을 들으면서 나는 말(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또 딴청을 부린 셈이다. 그래도 변명할 건덕지는 있다. 작가는 "누가 듣든 듣지 않든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일기 쓰던 어린이를 생각한다. 누가 듣든 듣지 않든 개의치 않고 왈왈 짖어댔던 가장 솔직한 아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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