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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데기 프로젝트 - 2010 제4회 블루픽션상 수상작 ㅣ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47
이제미 지음 / 비룡소 / 2010년 11월
평점 :
《번데기 프로젝트》는 청소년 문학상 수상작 - 제4회 블루픽션상 - 이다. 내 나이 서른. 믿기지 않지만 그렇게 되었다. 나는 청소년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 나는 무엇일까. 모르겠다. 어느 심리학 책에서 서른 살은 인생의 두 번째 사춘기라 했다. 무언가 이루었다고 하기엔 부족하고 다시 시작하기엔 늦은 감이 있는 불안정한 시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인생의 두 번째 사춘기를 맞은 셈이다. 그래서인가《번데기 프로젝트》를 두고 많은 생각을 했다.
주인공 정수선은 열여덟 살의 소설가 지망생. 아버지가 운영하는 삼겹살구이 가게에서 알바를 하면서도 책을 놓지 않을 만큼 소설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다. 그 열망을 빼고는 존재감이 희미한 평범한 여고생 수선이 대학 백일장 대회에서 입상을 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이제미는 예기치 못한 상황들을 펼쳐놓는다. 상금 1억원이 걸린 공모전에서 입상하면 자신에게 20%를 떼어달라는 조건으로 수선의 글쓰기 코치로 나선 문학 담당 선생 '허무식'이나 자신의 특수한 경험담이 막상 소설로 완성되자 저작권을 주장하는 치타 '추지행', 수선의 환상을 박살내버린 작가 '이보험' 등 등장인물들도 심상치않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점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실존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제미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공부하기 싫어서 소설을 쓰려고 했건만, 아무래도 멧돼지 피하려다가 호랑이 굴로 들어간 것 같았"다는 정수선의 독백은 과장이 아니다. 10대 청소년들의 삶은 획일적이고 한정되어 있다. 말 그대로 '고치의 시기'인 것이다. 이제미는 평범한 여고생 수선을 중심에 두고 전혀 평범하지 않은 상황과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편하게 읽으면서 무료함을 달랠 생각으로 책을 펼친 독자는 어느 순간 호랑이 굴로 빠져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더라도 몸을 돌려 빠져나오고 싶지는 않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등장인물들의 개성, 재미와 긴장이 어우러진 이야기 전개가 '호랑이굴'의 정체이기 때문. 아흥 ~
세상은 비극으로 차고 넘치지만 그것을 반드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청소년들에게 있는가. 조금은 코믹하게 비틀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은 그게 진짜 현실에 가깝지 않을까. 나는 이 소설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사실 네 상황은 그렇게 비극적이지만은 않아. 봐, 웃기잖아?"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다.
ㅡ 작가의 말 중에서 ㅡ
'호랑이 굴' 얘기가 나온 김에 좀 더 하겠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앞서 인용한 작가의 말에서 나는 저 오래된 속담을 떠올렸다. 무섭고 힘든 상황이라도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말이다. '마음 먹기에 달렸다.' 사는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이기도 했다. 당신은 호랑이 굴 밖에 있으니까 맘 편하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흘려들었다.《번데기 프로젝트》의 또 다른 주인공들, 수많은 청소년들도 지난 시절 나와 같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른들의 우려와 격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엔 자신의 세계가 너무 한정되어 있다. 비좁은 세계의 갑갑함이 가장 큰 시련이다. 제 안에 숨겨진 작은 날개를 감지하며 가슴이 부풀었다가 딱딱하고 비좁은 고치의 벽을 느끼고 불안감에 사로잡히기를 반복하는 것이 모든 '번데기'들의 현실이다. '번데기'는 번데기일 뿐이다. 번데기한테 나비 이야기를 들려줘도 크게 와닿지 않는다. 자신이 모르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번데기처럼 현실에 충실한 존재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불안정한 제 현실을 고스란히 버텨내는 번데기가 기특하다는 마음마저 든다.
'번데기'는 신선한 상징은 아니다. '성장'이라는 주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대표적인 상징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뻔하다는 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뻔한 것들'의 진실에 감동한다. 진실은 거창하고 복잡한 것 속에 있지 않다. 왜 어른들이 뻔한 얘기를 밥 먹듯이 하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뻔하니까 그런 것이다. 인생은 뻔한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기에 따라 뻔(fun)한 것이 될 수도 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이제 죽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 죽을 것이다.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호랑이 굴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해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해야 한다. 생각이 중요하다. 어릴 때, 그때도 겨울이었다. 가파른 아스팔트 도로 위를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신나게 달리다 눈길에 미끄러져 자전거와 함께 날아 추락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친구들과 함께였다. 내가 좋아하던 아이도 있었다. 아픔보다 창피함이 먼저 밀려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심각한' 순간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친구들의 걱정스러운 얼굴과 내 우스꽝스러운 모양이 대비되면서 순간적으로 터져나온 웃음은 한참 이어졌다. 나중에는 다른 아이들도 함께 웃었던 것 같다. 안 아팠던 것이 아니다. 진짜 아팠다. 집에 와서 보니 여기저기 검붉은 피멍이 맺혀 있었다. 뻔한 얘기를 너무 오래하고 있는 것 같다.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꿈이 뭐예요?"라는 질문을 받거나 "내 꿈은" 어쩌고 하는 부푼 대답을 하는 일이 어색한 나이가 되었다. 꿈을 좇기보다는 현실을 지탱하는 것이 더 절박해진 것이다. 서글프지는 않다. 이상하게도 삶이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번데기'의 상징이 단지 청소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은 거대한 책. 살아있는 누구든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차암 뻔한 얘기다. 그래도 꿋꿋하게 뻔한 얘기로 끝을 맺어야겠다. 꿈이든 희망이든 어떤 말로 불리든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품은 작은 씨앗이 있다. 《번데기 프로젝트》는 내 안의 작은 씨앗을 꿈틀거리게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세상 모든 번데기들에게 작가의 목소리를 빌려 응원의 말을 외치겠다. "사실 네 상황은 그렇게 비극적이지만은 않아. 봐, 웃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