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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의 아내
테이아 오브레트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하지만 저는 마을에서 시어 칸을 본 적이 없어요. 안 그래요?"
약제사가 할아버지를 쳐다보고는 다시 구부러진 나무 숟가락으로 흰 크림을 저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아저씨도 무서워요?"
"무서운 건 시어 칸이 아니란다."
ㅡ 본문 중에서
그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아내는 이 소설(『호랑이의 아내The Tiger's Wife』)은 영어권 문학계에서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전미도서협회는 이 작가를 '35세 이하 최고의 작가 5인'에 선정했고,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작가 콜럼 매칸Colum McCann은 그녀를 발굴한 걸 가리켜 "수년 만에 최고의 전율을 선사한 문학적 발견"이라며 찬사를 토했다. 그리고 2011년 6월, 테이아 오브레트는 영어권 최고의 여성 작가에게 수여한다는 오렌지상을 수상한다. "독자들을 변화시키고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일종의 연금술을 찾고 있었는데, 『호랑이의 아내』가 그 조건을 충족시킨다"는 것이 심사평이었다. 작품에 쏟아지는 대단한 찬사들 때문에 나는 책을 읽기도 전부터 약간의 주눅이 들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작가의 나이였다. 테이아 오브레트는 발칸반도 출신의 이민자이다. 1985년 9월, 발칸반도에 위치한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난 작가는 1997년 미국에 정착하기 이전까지 키프로스, 이집트를 거쳐왔다. 인종, 종교 갈등으로 빚어진 유고슬라비아의 내전은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이어졌고, 지금은 일곱 개의 국가로 분리되었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쳐온 작가가 20세기 후반의 발칸전쟁을 첫 작품의 소재로 한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원동력이 된 것은 외할아버지의 죽음이라고 작가는 밝히고 있다.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오브레트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발칸 반도의 역사를, 그 안에서 사라져간 외할아버지를 바로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로 작품 속에는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상당 부분 녹아 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나탈리아의 할아버지의 죽음이다. 작중 화자이기도 한 나탈리아가 할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이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환상적으로 그려진다. 내과의인 나탈리아는 타지의 고아원에 방문하는 동안 할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는다(현실). 할아버지와의 애정이 각별했던 나탈리아는 생전에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들(비현실)을 회상하고 추적해 나가는 과정에서 할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고 껴안을 수 있게 된다.
익명의 발칸 반도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는 전쟁의 상흔이 얼룩처럼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총알이 박혀 있는 수도원 회벽, 고아가 된 아이들, 팔 다리가 없는 사람들, 전사한 시체를 찾아 땅을 파헤치는 사람들... 그러나 구체적인 지명이나 역사적 사실, 정치적 메시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대해 작가는 "자신의 스토리가 역사의 무게에 눌리거나 불필요하게 정치적인 것에 함몰되는 걸 원치 않았다"고 했다. 어떤 것에 관해 쓰기 위해서는 그것으로부터 정말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오브레트는 총알이 관통한 찢어진 심장을 눈앞에 들이미는 대신 흐르는 그 피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보인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호랑이의 아내'는 할아버지의 이야기 핵심, 아니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뉘지만, 읽다 보면 그 모든 이야기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폭격 맞은 동물원을 빠져나온 호랑이, 가브란 가일레이와 백정 루카, 곰사나이 다리샤, 약제사의 이야기, 그러니까 '호랑이의 아내' 이야기는 발칸 반도의 피가 흐르는 구슬픈 우화로 읽힌다. 죽음의 신을 의인화한 가브란 가일레이나 곰이 되어버린 사나이 다리샤의 이야기 등 비현실과 환상을 그 기초로 하는 이 이야기들은 인간 존재의 나약함, 그 가운데에서도 불안에 사로잡힌 인간의 어리석음과 폭력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사이, 그에게 남은 건 벙어리 여자와 무절제한 늙은이, 훈제소에서 양들이 죽어가면서 끊임없이 내지르는 비명과 부당한 세상 모든 일에 대한 분노뿐이었다. (274쪽)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백정 루카의 이야기다. 구슬라 연주를 하던 섬세한 감성을 지닌 청년 루카가 좌절된 사랑과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폭력적이고 거친 백정이 되어가는 모습은 지켜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만큼 흡인력이 있다. 백정 루카는 '호랑이의 아내'와도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만약 상황이 달랐더라면, 그러니까 그해 겨울의 재앙들이 다른 순서로 일어났더라면 호랑이의 아내에 관한 소문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 하지만 그해 겨울은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 가장 길고, 또 말도 안 되는 싸움들과 사소한 불편함, 개인적인 치욕들로 얼룩진 시간이었기에 호랑이의 아내는 마을 사람들에게 찾아온 불행에 대한 비난을 모두 뒤집어쓰게 되었다. (284쪽)
'전쟁' 상황에서 오는 공포와 분노, 그 안을 살아가는 개인의 불안. 여기서 싹트는 잔혹함과 이상한 광기, 떠도는 소문들의 희생자는 단연 '호랑이의 아내'만은 아닐 것이다. 오브레트는 이 작품을 통해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희생자이기도 한 이상하고 슬픈 우리 삶을 매혹적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무서운 것은 '호랑이'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