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 테마명작관 3
니콜라이 고골 외 지음, 강완구 엮음, 고일 외 옮김 / 에디터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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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에서 펴낸 <테마명작관> 시리즈는 세계의 고전 문학을 주제별로 분류해 엮고 있다. 이 책은 그 중 3권이다. '사랑', '가족'에 이어 이번 책에서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중요 테마인 '사회적 약자'를 조명한다. 총 다섯 편의 중,단편을 싣고 있는 이번 작품집의 주인공들은 신분이 낮고 궁핍한, 이른바 '쥐새끼(<가난한 사람들>에서)' 같은 미약한 존재들이다. 사회적으로 그들은 작용을 하기보다는 작용을 받는 입장이다. 고골의 <외투>와 체호프의 <관리의 죽음>에서는 두 하급관리의 허망한 죽음을 통해 무심코 던진 돌에 죽어나갈 수도 있는 무력한 이들을 극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외투> 속 주인공 바슈마치킨은 전 재산과도 같은 새 외투를 강탈당하고 이를 되찾기 위해 관청에 청원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대와 조롱 뿐이다. <관리의 죽음> 에서는 오페라를 관람하다 다른 부서의 수장에게 침을 튀게 한 사소한 실수를 사죄하러 다니는 체르뱌코프와 그의 존재 자체에 무관심한 고위층 관리의 모습이 대비된다. 두 하급관리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절망이다.

 

 

   작품에서 그려지는 사회적 약자들의 사랑과 욕망은 모두 좌절된다. 내가 볼 때 그것은 어느 정도 예정된 것이다. 그들의 좌절은 반드시 외부의 압력이나 작용 때문만은 아니다. 귀족 연인에게서 버림 받고 죽음을 선택하는 시골처녀 리자(카람진, <가엾은 리자>) 경기병 대위를 따라간 딸에 대한 걱정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삼손(푸슈킨의 <역참지기>)은 자기 스스로 약자의 틀에 갇혀있다는 데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가엾은 리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자기에 대한 체념의 습관 때문이다. 배운 것 없고 가난한 리자는 자신의 무력함을 받아들이고 거기 갇힌다. 무엇을 기다리지만 스스로 찾아나서지는 않는다. 고상하고 친절한 귀족 에라스트와의 사랑 역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것이다. 자기를 선택해 준 대상이 떠난 자리에 이미 자기는 없다. 그것이 선택당한 자들의 비극이다. <가엾은 리자>의 비극이 맹목과 체념의 태도에서 초래했다면 <역참지기>의 주인공 삼손의 불행 원인은 불신과 적대감에서 찾을 수 있다. 스스로 약자의 틀에 갇혀 있다는 것에는 리자와 다름없지만 수동적인 리자와 달리 삼손은 적대적이다. 사회권력에 대한 불신과 피해의식이 그 적대감의 뿌리로서 작용한다. 삼손과 같은 인물의 사고는 '다 그렇고 그렇다'로 귀결된다. 자신의 딸을 데려간 경기병 대위가 언젠가는 딸을 버릴 것이라는 확신이 절망이 되어 삼손의 삶은 파국을 맞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종합판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그 스스로가 사회적 약자이기도 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생 작품을 통해 그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쏟아냈다. <가난한 사람들> 역시 그들, 약자에 대한 따뜻한 비판의식이 깔려 있는 작품이다. 가난한 하급관리 마카르 제부쉬킨과 그의 먼 친척 바르바라가 주고받는 편지글에는 문학과 삶에 대한 통렬한 풍자가 가득하다. 고골의 <외투>와 푸슈킨의 <역참지기>에 대한 언급도 흥미롭게 읽힌다. 앞선 작품들에서 보이는 수동적이고 체념적인 주인공들에 비해 마카르와 바르바라는 자의식이 강하다. 자기와 자기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투철한 통찰력도 엿보인다. 그러나 마카르나 바르바라 역시 사회적 약자를 자처하고 마는 한계를 보인다.

 

 

   부끄럽습니다, 내 사랑.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 정말 부끄럽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게 뭐 어떻다는 겁니까, 내 사랑! 왜 저는 그런 즐거움을 가지면 안 된다는 말입니까? 술을 마시면 제 구두 밑창에 대한 생각을 잊을 수 있잖아요. 왜냐하면구두 밑창을 영원히 평범하고 더러운 밑창으로 남아 있을 테니까요. 구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의 현인들은 신발 없이 맨발로 다녔잖아요. 그러니 우리 같은 하찮은 사람들이 이런 하찮은 물건에 대해서 투정을 부려서야 되겠습니까?

 

                              ㅡ  도스토옙스키,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

 

 

   모든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사회적 약자들은 대개 감상적이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다.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강자에 반해 그들은 사회중심적이다. 철저하게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이다. 사회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무력한 그들은 언제나 선택받는 자들의 위치에 있다. 그런 수동적인 삶은 그들 자신의 성격이 되고 운명이 된다. 그리고 "영원히 평범하고 더러운 밑창으로 남아 있"게 된다.

 

 

   책에 실린 작품들을 이미 읽었던 독자도 꽤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카람진의 작품을 제외한 모든 작품들을 오래 전 읽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읽었다. 이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한 감동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색다른 감동은 개인적 세월의 영향도 있겠으나, 현 시대에 어울리는 번역과 편집도 큰 몫을 했다. 이전에 읽었던 독자들이나 그렇지 않은 독자들에게도 이 작품집은 분명 뜻깊은 것을 남겨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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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 KBS 사이언스 대기획 인간탐구
김윤환.기억 제작팀 지음 / 예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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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기억한다는 것은 곧 산다는 것To remember is to live이라고 했다. 소설이나 영화 작품에 등장하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의 삶을 생각해 보면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어버린 사람의 삶은 공허하다. 이처럼 기억은 우리의 과거이고 현재를 발동하는 힘이며 미래를 향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러니까 기억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도 같다. 거시적으로 볼 것도 없이 일상에서도 우리는 기억의 소중함을 의식할 수 있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헤매거나 흔하고 쉬운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곤혹스러웠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치매는 노인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과거와 달리 조기 치매에 관한 우려의 목소리도 흘려들을 수 없다. 치매가 단지 노화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일면 희망적이다. 젊어서는 물론 늙어서도 건강한 기억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도가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이러한 다각적인 의문들로부터 출발한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는 기억과 망각의 생물학적 작용원리와 구조를 들여다본다. 다양한 연구결과와 사례들, 실험을 통해 전면적인 해부를 하고 있다.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각 기관들에 대한 사진이나 그림, 방송 당시의 영상들은 독자의 이해도를 높여준다. 1부에서는 기억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다룬다. 기억은 곧 생존과 맞닿아 있다는 것, 개인적 경험이나 지식, 가치관에 따라 기억은 조작된다는 사실을 흥미로운 실험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2부에서는 기억상실과 기억력 회복 방법을 다룬다. 인간의 뇌는 노화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노력을 통해 얼마든지 기억력은 향상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끝으로 3부에서는 망각을 다룬다. 잘 기억하는 것만큼 중요한 망각은 때때로 '고통의 탈출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잊고 싶은 나쁜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나쁜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경험 당시 느낀 '감정'의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전문용어로는 '감정기억'이라고 부른다. 이는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경우에 따라 전혀 불필요한 고통만 안겨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나쁜 기억도 최면술이나 긍정적인 기억 훈련을 통해 지우는 것(극복)이 가능하다고 한다. 팔다리가 없이 태어난 호주 청년 닉 부이치치, 나와 나이가 같은 그의 말이 가슴에 크게 남는다.

 

 

    "어떤 기억은 바꿀 수 없어요. 바꿀 수 없고,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지요.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세요. 아픈 기억이 있고, 평생 남는 기억도 있겠지만 나쁜 기억 때문에 장애가 되지 말고 좋은 기억에 집중하며, 나빴던 시간에서 교훈을 얻어 앞으로 나가세요."  (본문 중에서)

 

 

    훌륭한 다큐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 나는 종종 아쉬움을 경험한다. 과학 다큐와 같이 전문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일수록 그렇다. 시청하는 내내 끄덕이며 열중했던 내용도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면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는 우뇌와 좌뇌 사이 대뇌변연계의 중추인 해마에서 기억이 지워지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해마는 모든 기억을 일시적으로 저장하는 임시저장공간인 것이다. 해마의 자체 삭제 기능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한 공간 확보라고 보면 된다. 반복적 경험이나 학습, 감각적 자극을 통해 대뇌피질로 옮겨진 기억은 장기기억이 된다. 기억의 연장이다. 기억을 연장시키기 위한 방법으로는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메모나 두뇌활동, 이를 테면 퍼즐이나 독서 따위가 있다. 스트레스와 알코올을 피하고, 적절한 수면과 운동도 기억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책에서는 제시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단 한 번 시청한 내용을 온전히 기억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KBS 사이언스 대기획 <기억> 제작팀에서 펴낸 이 책은 나와 같은 아쉬움을 느끼는 사람에게 반가움을 선사한다. 방송 분량 때문에 편집된 내용이 보태져서 더욱 풍성하다. 기억에 관한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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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두통 - 뚜렷한 절망과 은밀한 위로
올리버 색스 지음, 강창래 옮김, 안승철 감수 / 알마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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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찾아 헤매던 경이로움을 우리는 스스로 지니고 다닌다.


 

                          ㅡ 토머스 브라우니 경  

 

 

 

 

 

 

 

 

   그동안 나는 편두통을 매우 일상적인 병으로 여기고 살았다. 편두통에 대한 일반적 인식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두통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재까지는 의학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바람처럼 찾아왔다 사그라드는 편두통은 그저 '신경성'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일상을 위협할 정도의 심각한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라면 입장이 다를 것이다. 병원을 찾아도 이상 소견은 없고 약도 듣지 않는 이들에게 편두통은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 자신이 겪는 고통의 원인도 해결책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 소개하는 책이 바로 그런 이들에게 위로와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올리버 색스는 이 책에서 흔하고 단순한 질병, 아니 병이라고도 여기지 않았던 편두통의 경이로운 세계를 펼쳐 보인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책을 읽어나가면서 한 번쯤 의구심이 들지도 모른다. 이게 편두통 증상이 맞는 걸까? 묵직한 책을 덮고 표지의 제목을 확인해 볼지도 모른다. 편두통. 표지의 또렷한 글자를 확인하고는 다시 책으로 돌아와 기이한 악몽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책에서 보여주는 편두통의 세계는 생경하고 무시무시하다. 그리고 매우 복잡하다. 표지 그림에서 보여지는 일그러진 자화상처럼 어지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가장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편두통 증상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집중해서 읽는 일이 다소 어려울 것도 같다. 지적 호기심만으로 읽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지레 겁먹을 것은 없다. 편두통에 대한 경이로운 발견이 어떤 이에게는 은밀한 위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책에 기술된 편두통은 그 원인과 증상이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가장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증상으로 두통과 욕지기, 무력감, 급격한 정서장애, 시각장애, 현기증, 우울증 따위가 있다. 앞선 증상을 동반하거나 개별적으로도 발생하는 인격장애, 장기능장애, 복부통증, 실어증, 반신마비 등도 편두통 증상에 포함된다. 1부에서는 편두통의 다양한 증상을 열거하고 있는데, 증상에 따라 4개의 장으로 나누고 있다. 1부를 읽다 보면 그 증상의 다양성과 복합성에 놀라게 된다. 증상별로 소개되는 실제 사례들이 편두통의 복합성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2부에서는 편두통의 발생에 대해 다룬다. 빛이나 소음, 냄새 같은 것도 편두통 촉발 요인이 된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3부에서는 편두통의 기반을 다룬다. 여기서는 편두통에 대한 생물학적, 심리학적 접근이 이루어진다. 4부에서는 편두통 치료법을 다룬다. 현재까지의 편두통 치료약들과 다양한 시도들을 소개하지만, 결론은 절망적이다. 편두통을 치료하는 특효약은 없다는 것이다. 거기 덧붙여 저자는 초판 서문에서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어두운 결말을 내리고 있다. 편두통 환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발작을 촉발하는 상황을 피하는 것 뿐이다. 과도한 쾌락, 업무, 걱정, 폭식, 폭음을 피하고, 밤에 일찍 자고 충분한 운동, 특히 걷기가 좋다고 한다. 끝으로 5부에서는 편두통 아우라에 대해 다루고 있다. 편두통 아우라는 시각적 환각 상태이다. 편두통 상태에서 대상이 왜곡되어 보이거나 시각적 환영에 사로잡히는 편두통 아우라는 어떤 의미에서 매우 예술적이고 매혹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부록으로 실린 '힐데가르트의 환영'과 '카르단의 환영'을 보면 더욱 그렇다.

 

 

   질병을 일으키는 이유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가 있다. 자기 자신에 의해 발생되는 내적인 이유와 환경에서 생기는 외적인 이유가 그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면서도 외적인 이유에만 강하게 집착한다. 그리고 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잊어버린다. 왜 그럴까? 아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본문 중에서)

 

 

   책에는 편두통을 '육체적이면서 상징적인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편두통 촉발 요인은 환자 개개인마다 다르고 그 양상 또한 변화의 가능성이 많으므로 명쾌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개 편두통 발작은 정서적인 문제에서 시작된다. 죄의식이나 분노, 억압된 감정이 육체적인 태도나 통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일종의 배출구와 같다. 많은 경우에 방귀나 설사, 구토와 같은 배설 행위를 통해 편두통이 해소되는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끔찍하고 매혹적인 질병을 통해 인간이 육체와 정신으로 연결된 유기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된다. 끔찍한 것은 그렇고 매혹적인 것은 뭐냐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앞서 얘기한 대로 편두통은 육체와 정신의 유기적인 작용이다. 특히 정서적인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편두통은 환자 자신이 오랜 동안 시달린 끝에 마침내 적응이 되어 그 병을 필요로 하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억압된 욕망이나 충동을 해소할 수 있는 매혹 때문이다. 이 매혹은 한 인간을 신경증적 성격과 습관에 지배당하게 만든다. 편두통에서 벗어나려면 환자의 치료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책에서는 강조한다. 검은 매혹의 그림자를 젖히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라는 말일 것이다.

 

 

   올리버 색스의 저서들은 국내에서 활발하게 번역되고 있고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인간의 뇌와 정신 활동에 대해 쉽고 감동적으로 들려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책도 예외는 아니다. 1970년 씌여진 초판을 수정, 보완해 20년이 흐른 1992년 개정판이 나왔다. 이 책은 개정판이다. 600쪽을 넘기는 방대함이 20년의 노고와 편두통의 복잡성을 말해주고 있다.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편두통의 세계를 실제 사례와 연구 결과들을 토대로 풀어나가는 저자의 열정이 고스란하다. 오랜 시간 외로운 병과 씨름한 편두통 환자들과 그들에게 도움이 되어줄 의사와 가족들이 약간의 희망이라도 발견한다면 그 열정은 충분히 보상 받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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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왼팔
와다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들녘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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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의 왼팔』은 전작 『노보우의 성』으로 일본 문학계를 떠들썩하게 뒤흔든 와다 료의 신작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시대적 배경은 센고쿠(전국) 시대. 아시노가와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도자와 가문과 고다마 가문은 세력 확장을 위한 열띤 싸움을 한다. 수적으로나 전략 면에서 열세한 도자와 가문은 성이 포위되기에 이른다. 무사 한에몬은 도자와 가문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된다. 요조의 손자 고타로의 왼팔을 빌리기로 한 것이다. 사이카 출신인 요조는 산 속 마을에 은둔하며 사냥꾼으로 살아간다. 전쟁에서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그는 손자만은 지켜내겠다는 일념으로 고타로의 사격 솜씨를 숨겨왔다. 반면 고타로는 '남들처럼 살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지나친 견제는 열한 살 소년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다. 그 벽을 깨뜨린 것이 한에몬이다. 우연한 기회에 고타로의 귀신 같은 왼팔 사격술이 세상에 드러나고, 한에몬은 도자와 가문의 몰락을 막기 위해 고타로를 전쟁에 투입시킨다.

 

 

   제목 『바람의 왼팔』에서 '바람'이 정확히 의미하는 것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wishdream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남들처럼 살고 싶'은 고타로의 소망과 훌륭한 무사로 남고 싶은 한에몬의 야망이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바람'이 잠자고 있던 운명을 깨운 것이다. 요조가 무고한 죽임을 당하고 한에몬이 부당한 살인을 저지른 것도 이 '바람' 때문이었다. 백지처럼 순수한 고타로의 마음 속에 분노와 복수심을 불어넣은 것도 역시 '바람'에서 시작되었다. 하나의 작은 씨앗과도 같은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는가를 이 작품은 잘 보여준다. 그러나 무섭지는 않다. 무겁지도 않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무척 비극적인데도 경쾌하게 읽힌다. 이 경쾌함은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예를 중시하는 현대 일본의 관습과 대조되는 센고쿠 시대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솔직함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낭만이 있었다. 방패막이도 없이 싸움터에 뛰어들고 무릎을 꿇기보다 스스로 배를 가르고 죽어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낭만 때문이었다. 센고쿠 시대의 자유스러움은 이야기 전반에, 특히 인물 간의 대화에 잘 스며 있다. 센고쿠 시대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낭만과 솔직함은 비극을 상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의 강점은 살아 움직이는 묘사에 있다. 실감나는 전투 장면의 묘사나 인물의 내면 묘사가 탁월하다. 주인공은 물론 주변 인물들까지도 성격이 또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무사 한에몬에 대한 묘사는 매우 입체적이다. 남다른 무공武功을 자랑하는 용감무쌍한 무사의 이면에는 '나를 얻고 싶으면 더 무공을 세우라' 했던 여인 스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어린아이 같은 고집과 천진함을 보이기도 하는 한에몬은 때때로 귀엽기까지 하다. 이야기 후반에 한에몬이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한에몬과 대적하는 즈쇼나 고다마 가문의 기베에 등 주변인물들 역시 그 이면에 숨은 장점이나 상처 같은 것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입체적인 인물묘사는 이야기 몰입에 큰 힘을 실어준다.

 

 

   이야기의 결말은 비극적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마음은 쾌적하다. 이런 걸 두고 카타르시스라 할까. 그러니까, 뒤끝이 없다. 한차례 신나게 싸운 용감한 무사가 여기저기 나뒹구는 모가지들을 뒤로 한 채 홀연히 사라지는 것처럼 나는 이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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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의 아내
테이아 오브레트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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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는 마을에서 시어 칸을 본 적이 없어요. 안 그래요?"
약제사가 할아버지를 쳐다보고는 다시 구부러진 나무 숟가락으로 흰 크림을 저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아저씨도 무서워요?"
"무서운 건 시어 칸이 아니란다." 

               ㅡ    본문 중에서 
 

 

  
 

   그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아내는 이 소설(『호랑이의 아내The Tiger's Wife』) 영어권 문학계에서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전미도서협회는 이 작가를 '35세 이하 최고의 작가 5인'에 선정했고,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작가 콜럼 매칸Colum McCann은 그녀를 발굴한 걸 가리켜 "수년 만에 최고의 전율을 선사한 문학적 발견"이라며 찬사를 토했다. 그리고 2011년 6월, 테이아 오브레트는 영어권 최고의 여성 작가에게 수여한다는 오렌지상을 수상한다. "독자들을 변화시키고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일종의 연금술을 찾고 있었는데, 『호랑이의 아내』가 그 조건을 충족시킨다"는 것이 심사평이었다. 작품에 쏟아지는 대단한 찬사들 때문에 나는 책을 읽기도 전부터 약간의 주눅이 들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작가의 나이였다. 테이아 오브레트는 발칸반도 출신의 이민자이다. 1985년 9월, 발칸반도에 위치한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난 작가는 1997년 미국에 정착하기 이전까지 키프로스, 이집트를 거쳐왔다. 인종, 종교 갈등으로 빚어진 유고슬라비아의 내전은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이어졌고, 지금은 일곱 개의 국가로 분리되었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쳐온 작가가 20세기 후반의 발칸전쟁을 첫 작품의 소재로 한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원동력이 된 것은 외할아버지의 죽음이라고 작가는 밝히고 있다.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오브레트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발칸 반도의 역사를, 그 안에서 사라져간 외할아버지를 바로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로 작품 속에는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상당 부분 녹아 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나탈리아의 할아버지의 죽음이다. 작중 화자이기도 한 나탈리아가 할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이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환상적으로 그려진다. 내과의인 나탈리아는 타지의 고아원에 방문하는 동안 할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는다(현실). 할아버지와의 애정이 각별했던 나탈리아는 생전에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들(비현실)을 회상하고 추적해 나가는 과정에서 할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고 껴안을 수 있게 된다.

 

 

   익명의 발칸 반도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는 전쟁의 상흔이 얼룩처럼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총알이 박혀 있는 수도원 회벽, 고아가 된 아이들, 팔 다리가 없는 사람들, 전사한 시체를 찾아 땅을 파헤치는 사람들... 그러나 구체적인 지명이나 역사적 사실, 정치적 메시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대해 작가는 "자신의 스토리가 역사의 무게에 눌리거나 불필요하게 정치적인 것에 함몰되는 걸 원치 않았다"고 했다. 어떤 것에 관해 쓰기 위해서는 그것으로부터 정말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오브레트는 총알이 관통한 찢어진 심장을 눈앞에 들이미는 대신 흐르는 그 피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보인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호랑이의 아내'는 할아버지의 이야기 핵심, 아니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뉘지만, 읽다 보면 그 모든 이야기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폭격 맞은 동물원을 빠져나온 호랑이, 가브란 가일레이와 백정 루카, 곰사나이 다리샤, 약제사의 이야기, 그러니까 '호랑이의 아내' 이야기는 발칸 반도의 피가 흐르는 구슬픈 우화로 읽힌다. 죽음의 신을 의인화한 가브란 가일레이나 곰이 되어버린 사나이 다리샤의 이야기 등 비현실과 환상을 그 기초로 하는 이 이야기들은 인간 존재의 나약함, 그 가운데에서도 불안에 사로잡힌 인간의 어리석음과 폭력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사이, 그에게 남은 건 벙어리 여자와 무절제한 늙은이, 훈제소에서 양들이 죽어가면서 끊임없이 내지르는 비명과 부당한 세상 모든 일에 대한 분노뿐이었다. (274쪽)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백정 루카의 이야기다. 구슬라 연주를 하던 섬세한 감성을 지닌 청년 루카가 좌절된 사랑과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폭력적이고 거친 백정이 되어가는 모습은 지켜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만큼 흡인력이 있다. 백정 루카는 '호랑이의 아내'와도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만약 상황이 달랐더라면, 그러니까 그해 겨울의 재앙들이 다른 순서로 일어났더라면 호랑이의 아내에 관한 소문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 하지만 그해 겨울은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 가장 길고, 또 말도 안 되는 싸움들과 사소한 불편함, 개인적인 치욕들로 얼룩진 시간이었기에 호랑이의 아내는 마을 사람들에게 찾아온 불행에 대한 비난을 모두 뒤집어쓰게 되었다. (284쪽)

 

 

'전쟁' 상황에서 오는 공포와 분노, 그 안을 살아가는 개인의 불안. 여기서 싹트는 잔혹함과 이상한 광기, 떠도는 소문들의 희생자는 단연 '호랑이의 아내'만은 아닐 것이다. 오브레트는 이 작품을 통해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희생자이기도 한 이상하고 슬픈 우리 삶을 매혹적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무서운 것은 '호랑이'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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