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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왼팔
와다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들녘 / 2011년 10월
평점 :
『바람의 왼팔』은 전작 『노보우의 성』으로 일본 문학계를 떠들썩하게 뒤흔든 와다 료의 신작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시대적 배경은 센고쿠(전국) 시대. 아시노가와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도자와 가문과 고다마 가문은 세력 확장을 위한 열띤 싸움을 한다. 수적으로나 전략 면에서 열세한 도자와 가문은 성이 포위되기에 이른다. 무사 한에몬은 도자와 가문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된다. 요조의 손자 고타로의 왼팔을 빌리기로 한 것이다. 사이카 출신인 요조는 산 속 마을에 은둔하며 사냥꾼으로 살아간다. 전쟁에서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그는 손자만은 지켜내겠다는 일념으로 고타로의 사격 솜씨를 숨겨왔다. 반면 고타로는 '남들처럼 살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지나친 견제는 열한 살 소년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다. 그 벽을 깨뜨린 것이 한에몬이다. 우연한 기회에 고타로의 귀신 같은 왼팔 사격술이 세상에 드러나고, 한에몬은 도자와 가문의 몰락을 막기 위해 고타로를 전쟁에 투입시킨다.
제목 『바람의 왼팔』에서 '바람'이 정확히 의미하는 것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wish나 dream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남들처럼 살고 싶'은 고타로의 소망과 훌륭한 무사로 남고 싶은 한에몬의 야망이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바람'이 잠자고 있던 운명을 깨운 것이다. 요조가 무고한 죽임을 당하고 한에몬이 부당한 살인을 저지른 것도 이 '바람' 때문이었다. 백지처럼 순수한 고타로의 마음 속에 분노와 복수심을 불어넣은 것도 역시 '바람'에서 시작되었다. 하나의 작은 씨앗과도 같은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는가를 이 작품은 잘 보여준다. 그러나 무섭지는 않다. 무겁지도 않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무척 비극적인데도 경쾌하게 읽힌다. 이 경쾌함은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예를 중시하는 현대 일본의 관습과 대조되는 센고쿠 시대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솔직함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낭만이 있었다. 방패막이도 없이 싸움터에 뛰어들고 무릎을 꿇기보다 스스로 배를 가르고 죽어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낭만 때문이었다. 센고쿠 시대의 자유스러움은 이야기 전반에, 특히 인물 간의 대화에 잘 스며 있다. 센고쿠 시대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낭만과 솔직함은 비극을 상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의 강점은 살아 움직이는 묘사에 있다. 실감나는 전투 장면의 묘사나 인물의 내면 묘사가 탁월하다. 주인공은 물론 주변 인물들까지도 성격이 또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무사 한에몬에 대한 묘사는 매우 입체적이다. 남다른 무공武功을 자랑하는 용감무쌍한 무사의 이면에는 '나를 얻고 싶으면 더 무공을 세우라' 했던 여인 스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어린아이 같은 고집과 천진함을 보이기도 하는 한에몬은 때때로 귀엽기까지 하다. 이야기 후반에 한에몬이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한에몬과 대적하는 즈쇼나 고다마 가문의 기베에 등 주변인물들 역시 그 이면에 숨은 장점이나 상처 같은 것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입체적인 인물묘사는 이야기 몰입에 큰 힘을 실어준다.
이야기의 결말은 비극적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마음은 쾌적하다. 이런 걸 두고 카타르시스라 할까. 그러니까, 뒤끝이 없다. 한차례 신나게 싸운 용감한 무사가 여기저기 나뒹구는 모가지들을 뒤로 한 채 홀연히 사라지는 것처럼 나는 이 책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