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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두통 - 뚜렷한 절망과 은밀한 위로
올리버 색스 지음, 강창래 옮김, 안승철 감수 / 알마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밖에서 찾아 헤매던 경이로움을 우리는 스스로 지니고 다닌다.
ㅡ 토머스 브라우니 경
그동안 나는 편두통을 매우 일상적인 병으로 여기고 살았다. 편두통에 대한 일반적 인식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두통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재까지는 의학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바람처럼 찾아왔다 사그라드는 편두통은 그저 '신경성'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일상을 위협할 정도의 심각한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라면 입장이 다를 것이다. 병원을 찾아도 이상 소견은 없고 약도 듣지 않는 이들에게 편두통은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 자신이 겪는 고통의 원인도 해결책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 소개하는 책이 바로 그런 이들에게 위로와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올리버 색스는 이 책에서 흔하고 단순한 질병, 아니 병이라고도 여기지 않았던 편두통의 경이로운 세계를 펼쳐 보인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책을 읽어나가면서 한 번쯤 의구심이 들지도 모른다. 이게 편두통 증상이 맞는 걸까? 묵직한 책을 덮고 표지의 제목을 확인해 볼지도 모른다. 편두통. 표지의 또렷한 글자를 확인하고는 다시 책으로 돌아와 기이한 악몽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책에서 보여주는 편두통의 세계는 생경하고 무시무시하다. 그리고 매우 복잡하다. 표지 그림에서 보여지는 일그러진 자화상처럼 어지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가장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편두통 증상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집중해서 읽는 일이 다소 어려울 것도 같다. 지적 호기심만으로 읽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지레 겁먹을 것은 없다. 편두통에 대한 경이로운 발견이 어떤 이에게는 은밀한 위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책에 기술된 편두통은 그 원인과 증상이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가장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증상으로 두통과 욕지기, 무력감, 급격한 정서장애, 시각장애, 현기증, 우울증 따위가 있다. 앞선 증상을 동반하거나 개별적으로도 발생하는 인격장애, 장기능장애, 복부통증, 실어증, 반신마비 등도 편두통 증상에 포함된다. 1부에서는 편두통의 다양한 증상을 열거하고 있는데, 증상에 따라 4개의 장으로 나누고 있다. 1부를 읽다 보면 그 증상의 다양성과 복합성에 놀라게 된다. 증상별로 소개되는 실제 사례들이 편두통의 복합성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2부에서는 편두통의 발생에 대해 다룬다. 빛이나 소음, 냄새 같은 것도 편두통 촉발 요인이 된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3부에서는 편두통의 기반을 다룬다. 여기서는 편두통에 대한 생물학적, 심리학적 접근이 이루어진다. 4부에서는 편두통 치료법을 다룬다. 현재까지의 편두통 치료약들과 다양한 시도들을 소개하지만, 결론은 절망적이다. 편두통을 치료하는 특효약은 없다는 것이다. 거기 덧붙여 저자는 초판 서문에서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어두운 결말을 내리고 있다. 편두통 환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발작을 촉발하는 상황을 피하는 것 뿐이다. 과도한 쾌락, 업무, 걱정, 폭식, 폭음을 피하고, 밤에 일찍 자고 충분한 운동, 특히 걷기가 좋다고 한다. 끝으로 5부에서는 편두통 아우라에 대해 다루고 있다. 편두통 아우라는 시각적 환각 상태이다. 편두통 상태에서 대상이 왜곡되어 보이거나 시각적 환영에 사로잡히는 편두통 아우라는 어떤 의미에서 매우 예술적이고 매혹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부록으로 실린 '힐데가르트의 환영'과 '카르단의 환영'을 보면 더욱 그렇다.
질병을 일으키는 이유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가 있다. 자기 자신에 의해 발생되는 내적인 이유와 환경에서 생기는 외적인 이유가 그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면서도 외적인 이유에만 강하게 집착한다. 그리고 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잊어버린다. 왜 그럴까? 아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본문 중에서)
책에는 편두통을 '육체적이면서 상징적인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편두통 촉발 요인은 환자 개개인마다 다르고 그 양상 또한 변화의 가능성이 많으므로 명쾌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개 편두통 발작은 정서적인 문제에서 시작된다. 죄의식이나 분노, 억압된 감정이 육체적인 태도나 통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일종의 배출구와 같다. 많은 경우에 방귀나 설사, 구토와 같은 배설 행위를 통해 편두통이 해소되는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끔찍하고 매혹적인 질병을 통해 인간이 육체와 정신으로 연결된 유기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된다. 끔찍한 것은 그렇고 매혹적인 것은 뭐냐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앞서 얘기한 대로 편두통은 육체와 정신의 유기적인 작용이다. 특히 정서적인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편두통은 환자 자신이 오랜 동안 시달린 끝에 마침내 적응이 되어 그 병을 필요로 하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억압된 욕망이나 충동을 해소할 수 있는 매혹 때문이다. 이 매혹은 한 인간을 신경증적 성격과 습관에 지배당하게 만든다. 편두통에서 벗어나려면 환자의 치료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책에서는 강조한다. 검은 매혹의 그림자를 젖히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라는 말일 것이다.
올리버 색스의 저서들은 국내에서 활발하게 번역되고 있고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인간의 뇌와 정신 활동에 대해 쉽고 감동적으로 들려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책도 예외는 아니다. 1970년 씌여진 초판을 수정, 보완해 20년이 흐른 1992년 개정판이 나왔다. 이 책은 개정판이다. 600쪽을 넘기는 방대함이 20년의 노고와 편두통의 복잡성을 말해주고 있다.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편두통의 세계를 실제 사례와 연구 결과들을 토대로 풀어나가는 저자의 열정이 고스란하다. 오랜 시간 외로운 병과 씨름한 편두통 환자들과 그들에게 도움이 되어줄 의사와 가족들이 약간의 희망이라도 발견한다면 그 열정은 충분히 보상 받을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