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왼발잡이 토끼의 무덤 - 청년 전태일을 키워드로 한 소설가 15인의 짧은 소설
강윤화 외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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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스물셋 청년 전태일이 불꽃 같은 생을 마감한 지 사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절규하며 죽어간 청년 노동자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짧은 생애가 남기고 간 열정과 분노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일깨우는 데 어느 정도 힘을 보탰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는 크게 나아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전태일은 죽었지만 지금, 여기에서 분노하고 투쟁하는 또 다른 전태일들. 여기 수록된 열다섯 편의 짧은 이야기들은 바로 이 시대의 전태일, 노동자들의 초상을 담아냅니다.

 

   노동자가 뭔지 아시죠. 나는 노동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선생님도 노동자라구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선생님은 아니잖아요. 나도 알아요. 노동자는 더러워요. 늘 땀 냄새가 나요. 역겨운 냄새가 나요. 집에 오면 빈둥대요. 돈도 못 벌구요. 싸움이나 하다 병원에 가구요. 선생님도 그러세요? 아니잖아요. 선생님도 노동자 맞다구요? 그럼 난 선생님은 안 될래요. 사장님이 될 거예요. (손홍규 _ 게으름뱅이 형 중에서)

 

 

   내레이터 모델, 이주노동자, 학원강사, 교수, 농부 등 열다섯 명의 작가가 그리는 노동자들의 초상은 제각각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은 모두 꿈(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꿈은 그들 노동력의 근거지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들은 열심히 일했고, 일하고 있지만 꿈을 향한 도약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나날이 발전해 가는데, 여전히 그들은 곤궁에 처해 있습니다. 그들, 노동자들의 처지는 자본주의의 허점을 아프게 증명합니다.

 

 

   표제작 <어느 왼발잡이 토끼의 무덤>은 제1회 전태일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김남일의 작품인데요. '왼발잡이'는 자유와 평등을 희구하는 모든 좌파를 상징합니다. 최근 화제에 오른 개그맨 최효종 씨의 속 시원한 입담을 떠오르게 하는 풍자가 인상적입니다. 김남일은 이 작품에서 점점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자본제일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입지는 그만큼 빈약해지고 있다현실적 논리를 설득력 있게 펼치고 있습니다. 저항의 상징인 왼발잡이 토끼의 죽음마저도 상품화하려는 '사장님들'의 욕망은 자본주의의 함정을 적나라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부당함에 대항하는 '왼발잡이 토끼'들에게 힘센 '사장님'들은 심드렁하게 경고하시겠지요. 네 무덤 네가 파는 거라고.

 

 

    그렇습니다. 이 작품집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제 무덤을 파고 있습니다. 저항하거나 순종하거나 절망하면서요. 세상 참 좋아졌다고들 합니다만 그 좋은 세상은 누구의 몫입니까. 노동자들의 피땀 없이 지금 우리가 여기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정작 그들의 현실이 암울하다면 지금 우리 사는 세상이 정말 좋은 세상이기는 한 것일까 회의를 품어보아야 합니다. 생각을 해봐야 하고 필요에 따라 행동도 해봐야... 그렇죠. 안하는 것이 아니죠. 왼발잡이 토끼들의 투쟁은 오래 전부터 계속되고 있었으니까요. 투쟁하는 것은 어쩌면 쉽습니다. 오랜 투쟁과 좌절의 기억을 안고도 자유와 정의에 대한 이상을 지켜나가는 일에 비하면 말입니다.

 

 

   각자의 개성을 담은 열다섯 편의 짧은 이야기들이 내는 목소리는 하나로 통일됩니다.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전태일의 절규를 기억하라는 것. 매우 중요한 메시지임에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목소리를 담아내는 형식입니다. 무려 열다섯 편의 단편을 수록하고 있는 이 작품집은 300쪽을 훨씬 밑도는 분량입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단편보다는 콩트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분량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런데 거의 모든 작품에서 제가 공통적으로 느낀 점이 있습니다. 선생님께 주제와 분량에 대한 지시를 받은 학생의 착실한 숙제장 같다고 할까요. 소설이 아니라고 하면 문제 삼을 것도 없겠지요. 주제와 분량의 제한이 이야기의 완성도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아쉬움이 크게 남습니다. 이야기는 미미하고 주제만 부각되는 글들을 읽으면서, 이럴 바엔 사회비평집을 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나 몇몇 작품들은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기도 합니다. 김도언의 <그건 아니야, 오빠>와 손홍규의 <게으름뱅이 형>이 그랬습니다. 두 작품 모두 소박하고 진실한 시선으로 감동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은 저와 느끼는 것이 또 다르겠지요. 제 개인적인 평에 너무 의지하지는 마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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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눈 프리키는 알고 있다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54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부희령 옮김 / 비룡소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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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기 그 애가 있어.

누구? 저 빨강 머리?

저애가 프랭키야.

프랭키 누구?

제발 그렇게 빤히 보지 마! 알잖아, 프랭키 피어슨. 리드 피어슨의 딸.

오, 이런. 저 애 말이야?

응, 저 애.  

 

 

 

   이 작품은 열네 살 프랭키의 분열된 자아가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는 성장소설입니다. 제목의 '초록눈 프리키'는 프랭키의 또 다른 자아입니다. 열네 번째 생일이 몇 주쯤 지난 어느 밤 파티에서 프리키는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소름끼치는 것! 네가 네 눈을 봐야만 해! 소름끼치는 초록눈을!" 그날 밤 파티에서 프랭키를 강간하려던 소년이 프랭키의 무서운 '저항'에 무너지면서 한 말입니다. 프리키는 그렇게 프랭키의 삶에 등장합니다. 프랭키는 특별히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닙니다. 부스스한 빨강머리와 창백한 얼굴의 프랭키는 학교 수영팀에 소속되어 있지만, 실력은 들쭉날쭉한 평범한 학생입니다. 프랭키의 특별함은 다른 데서 부여됩니다. 유명한 운동선수이자 방송인인 아버지의 존재입니다. 프랭키 피어슨은 언제나 리드 피어슨의 딸로서 사람들에게 비춰집니다. 집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프랭키는 리드 피어슨의 딸로서만 존재합니다. 자기 본성이나 욕망이 아닌 아버지의 신념과 욕망 안에서 생활합니다. 아버지 리드 피어슨은 자기중심적이고 명예욕이 강한 인물입니다. 타인들에게 보여주는 삶에 익숙한 그는 아내와 자식들을 자기 삶의 부속물 정도로 취급합니다. 프랭키와 그의 여동생, 이복형제인 오빠는 그런 삶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프랭키의 어머니 크리스타만이 그런 삶의 방식에 불만을 품습니다. 화려하지만 공허한 남편과의 삶에 자기 자신은 부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프랭키가 그러하듯 그녀 역시 크리스타가 아닌 리드 피어슨의 아내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었으니까요. 크리스타는 자신의 본성과 욕망에 충실한 삶을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 소박한 바람은 리드 피어슨의 가정을 무서운 파멸로 몰아가는 시작이 됩니다.

 

   아빠는 그런 식이었다. 불같이 화를 내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그리고 멀리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면, 잘못된 일은 사라졌다. 우리를 용서한다고 말하거나 화내지 않겠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빠는 그냥 웃으면서 잊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잊기를 바랐다. (책에서)

 

   프랭키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가족들과 함께 TV 속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저 사람이 정말 우리 아버지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며 감탄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좋은 남편도 아버지도 아닙니다. 가족은 자신의 명예욕을 충족시켜 줄 수단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명예가 곧 가족 구성원 모두의 목표이자 희망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지요. 부부 동반 모임을 거절하거나 자기만의 공간을 요구하는 아내의 태도는 그에게 용납할 수 없는 배신 행위로 간주됩니다. 부부는 자주 충돌하고 삐걱거리면서 마침내는 별거 상태에 들어갑니다. 프랭키는 순종적이지 못한 엄마가 가정불화의 싹이라며 원망합니다. 엄마의 실종도 프랭키의 미움을 사그라들게 하지는 못합니다. 엄마를 향한 미움에는 아빠의 폭력 아래 자신과 여동생만이 남았다는 두려움이 크게 작용합니다. 자신을 지켜줄 아빠마저 잃고 싶은 않은 프랭키는 가정을 둘러싼 중요한 진실을 외면합니다.

 

   요즘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많아요. 저는 잠을 잘 자지 못해요. 그래서 낮 동안 머리가 맑지 못해요. 특히 크리스타 코너에 대해서, 저는 잊어버리기 시작했어요. 엄마가 저를 잊었으니까, 그게 이유죠. 8월 26일 전에도 엄마는 저를 잊어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엄마를 용서할 수 없어요. 아무도 제가 기억하게 할 수는 없어요. 잊는 것은 제 권리예요. (책에서)

 

   그러나 프랭키의 또 다른 자아 프리키는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진실을 폭로할 용기도 있었습니다. 진실을 감당할 지혜도, 있어 보입니다. 아니, 이것은 독자로서의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가슴에 맺힌 슬픔과 상처, 그리고 무서운 진실을 프랭키와 프리키가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부모의 충돌과 헤어짐의 과정을 지켜보는 열네 살 소녀의 분열된 자아와 복잡한 갈등심리를 이 작품은 속도감 있게 그려냅니다. 엄마의 실종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후반부에는 추리소설의 긴장감도 흐릅니다. 독자는 불길한 예감 속에서 책장을 넘기다 무서운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인간은 저마다의 욕망과 신념 안에서 살아갑니다. 리드 피어슨 가족의 몰락상은 욕망과 신념의 충돌에서 야기됩니다. <초록눈의 프리키>는 그 혼돈과 충돌의 폭풍 속에서 자기의 참모습을 지켜내려는 소녀의 몸부림으로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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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뿐이다 놀 청소년문학 11
마이클 콜먼 지음, 유영 옮김 / 놀(다산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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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단 생활을 하다 보면 보이든 보이지 않든 편이 갈리게 마련이다. 감정적이거나 생존적인 이유가 바탕이 된다. 특히 청소년들의 집단 따돌림 문제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판단력이 부족한 미성년이라는 데서 그 심각성이 크다. 사회는 그들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가른다. 과연 현명한 처사일까. 우리는 보이는 것 너머를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 작품에서 마이클 콜먼은 따돌림 문제에 대해 조금 다른 접근을 시도한다.  


 

    "왜 그랬어?"

   "사실 난 한 번도 그 이유를 생각해본 적 없었어. 그래서 좀 전에 네가 물었을 때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았지."

   그가 한숨을 내쉰다.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무슨 생각?"

   "난 네가 부러워."

 

                                               (168쪽)

 
 

 

   대니와 토쉬는 모든 것에서 대립된다. 대니는 우등생이다. 수학적인 사색을 즐기며 늘 혼자 있는 대니는 일명 왕따다. 그는 이름 대신 괴짜라 불린다. 반면 열등생 토쉬는 무리 안에서 안정을 느낀다. 토쉬는 그렉 무리와 함께 대니의 소중한 노트를 뺏으면서 조롱하고 괴롭힌다. 5일 간의 여름방학 캠프는 그런 그들의 관계에 큰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사건의 중심에는 액셀만 선생이 있다. 체육담당 교사인 액셀만은 대니와 토쉬를 한 팀으로 배정한다. 협동심을 기르는 것이 목적인 이 캠프에서 액셀만은 팀원끼리의 믿음을 강조한다. 서로에 대한 믿음 없이는 함께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액셀만은 자신이 계획한 훈련이 리얼 서바이벌 상황이 될지 예측이나 했을까.

 

   사고는 오리엔티어링 경기 도중 일어난다. 팀별로 지도와 나침반을 이용해 주어진 지점을 거쳐 목적지로 돌아오는 훈련이다. 대니와 토쉬는 팀의 주장 그렉이 준 지도를 들고 이동하다 깊은 동굴로 추락한다. 물이 점점 차오르는 컴컴한 동굴 속에서 대니와 토쉬는 처음으로 서로를 바로 보게 된다.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에 단둘이 남게 된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설정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작가 자신이 따돌림 피해자였다는 사실도 인상적이다. 그 역시 작품 속 대니처럼 '왜? 왜 나를?'이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져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직접 물을 기회나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집단 따돌림은 글자 그대로 집단 내에서 벌어진다. 집단에서 이탈한 두 개인이 서로를 마주 본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특수한 상황에 던져진 두 소년의 섬세한 심리변화를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뜻깊은 물음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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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 - 내 안의 아이 치유하기
틱낫한 지음, 진우기 옮김 / 불광출판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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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에는 너만 남겨 두고 나 혼자 도망갔었어.
정말 미안해. 이젠 도망가지 않고 너를 안아줄게."
 
 
 
 
    마음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불쑥 솟구치는 감정에 휩쓸려 일을 그르치거나 혐오하는 부모의 언행을 답습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좌절감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금방 수긍할 것이다. 다음부턴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해도 매번 똑같은 구렁에 빠진다. 그럴 때 사람들은 말한다. 이건 내가 바라던 게 아니었다고. 물론 그럴 것이다. 자신을 구렁텅이로 몰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우리는 왜 눈앞에 구렁이 있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은 무엇일까. 심리학에서는 이 '보이지 않는 힘'을 가리켜 '내면아이Inner Child'라 한다. 내면아이는 해결되지 않은 어린시절의 상처가 이어져 현재에까지 미치는 영향력을 뜻한다. 오랫동안 저 심연에 묻혀 있던 내면아이는 우리의 보살핌과 사랑이 절실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정체조차 모르거나 알더라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상담과 각종 심리치료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만, 누구나 쉽게 문을 두드리는 데는 한계가 있는 실정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와의 불화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고통의 원인도 해결책도 모르는 이들에게 나는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
 
 
   틱낫한 스님의 이번 책 <화해>는 내면아이 치유를 위한 지혜와 수행법을 담고 있다. 이 책 전반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수행(치유)의 목적이다. 수행의 참목적은 단지 고통에서 달아나기 위함이 아니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함의를 포함하고 있다. 늙고 병들고 죽고 이별하는 삶의 근본부터가 고통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깊이 바라보는 일이 책에서 말하는 수행의 기본자세다.
 
 
   내 손 위에 잎사귀가 한 장 있다고 하자. 당신의 눈에 무엇이 보이는가? 잎은 그저 잎일 뿐이다. 그것은 꽃이 아니다. 하지만 잎을 깊이 바라볼 때 우리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식물이 보이고, 햇빛이 보이고, 구름이 보이고, 흙이 보인다. '잎'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잎은 잎이 아닌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잎에서 햇빛, 구름, 흙 같은 잎이 아닌 요소들을 제거하고 나면 잎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본문에서)
 
 
   깊이보기를 통해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서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책에서 강조하는 또 하나가 이것이다. 우리 모두는 과거와 미래의 연속체라는 것. 이것을 아는 것에서 치유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내면아이는 무엇인가. 과거의 상처다. 우리가 생명 흐름의 연속체라는 이해는 우리의 '과거'가 어린시절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그림자라는 것을 말이다. 부모와 조상의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이어져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듯이 우리의 상처와 고통은 후손에게 전해진다. 책에서 말하는 수행의 중요한 목적이 여기 있다.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곧 나의 조상과 후손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독립된 자아'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무지하다. '나인 것'과 '내가 아닌 것'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이해할 때, 무지는 치유되고 고통, 화, 질투, 두려움도 사라진다. (본문에서)
 
 
   책에는 일곱 가지 수행법이 소개된다. 끝없는 생각을 멈추고 현재에 집중하는 물건 치우기('물건'은 비유다) 명상이나 16가지 호흡 수행법, 평화의 편지 쓰기와 같은 실천법 등은 깊이 보기와 바로 보기를 그 목적으로 한다. 우리가 하나의 독립된 존재라는 인식은 치유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된다고 책에서는 역설한다. 우리 안에 깃든 바람과 햇빛과 구름과 흙 같은 것을 인정할 때 깊이 보고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구별은 다른 사람에 대한 용서와 이해의 길을 막는다. 우리의 상처와 치유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싹트고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서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의식하라는 것이다.
 
 
   고통과 함께 살아갈 준비를 하라. 고통을 받아들이고 고통받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고통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다. (본문에서)
  
  
   치유는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어루만지는 일이다. 책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을 거실과 지하실로 비유한다. 두려움, 분노, 슬픔과 같은 감정의 씨앗들은 지하실에 잠들어 있다. 지하실 문을 개방하고 그것들을 깨워 하나 하나 만나는 일이 수행이고 치유의 길이다. 지하실에는 부정적인 감정뿐 아니라 이해나 배려의 마음과 같은 긍정적인 씨앗들도 함께 있는데, 이것들을 거실로 끌어내는 것도 수행의 중요한 과정이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상처와 화해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우리 안의 아이가 울고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상처와 고통을 볼 수 없다.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상처와 고통을 포용할 수 있는 지혜를 얻는다는 말도 된다. 치유는 모든 변화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틱낫한 스님의 책은 어렵지 않다. 알기 쉬운 비유와 일화로 풀어내는 이 책 역시 부담 없이 읽어낼 수 있다. 책에 소개된 수행법도 실생활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어려운 숙제는 책을 덮고부터다. 우리 안의 바람과 구름과 햇빛을 불러내 그것들을 어루만지는 일은 온전히 우리 몫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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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멜랑콜리아 - 상상 동물이 전하는 열여섯 가지 사랑의 코드
권혁웅 지음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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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 예술작품부터 노랫말에 이르기까지 사랑에 대한 담론은 끝이 없다. 우리 인간은 어떤 형식으로든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을 멈추지 않기 때문에(그럴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사랑은 인간의 영원한 테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권혁웅은 이 책에서 조금 기괴한 사랑의 담론을 펼친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중심에는 괴물(상상동물)들이 있다. 저자는 시인의 감성과 평론가의 날카로운 논리로 세계의 신화와 문학작품 속 괴물들에서 사랑의 속성을 파헤친다.

 

 

   우리 인간 안에는 인간보다 더 인간인 동물이 산다. (...) 우리보다 더 우리 자신을 닮은, 나아가 우리의 시대를 증거하는 괴물들 말이다.(14쪽)

 

 

   사랑과 괴물이라니. 조금 생뚱맞다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우선 다양한 괴물들의 모양새에 놀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친숙한 괴물들(이를 테면 퀴클롭스나 세이렌, 늑대인간이나 좀비 따위) 이외의 기괴한 괴물들의 이야기가 몹시 흥미롭게 읽힌다. 몸이 한데 붙어서 두 개의 머리에 네 개의 팔이 달린 몽쌍씨(蒙雙氏)나 몸이 반쪽이어서 둘이 합쳐야 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일비민(一臂民), 가슴에 구멍이 뚫린 관흉국(貫胸國)의 사람들은 그 기괴한 형상으로써 사랑을 구현한다. 사랑해서 한 몸이 되고, 사랑하는 이를 잃고 '반쪽'이 되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다는 사랑의 비유를 그들은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책은 열여섯 가지 사랑의 코드(이름, 약속, 망각, 짝사랑, 유혹, 질투, 우연/필연, 자기애, 첫사랑, 고백, 기다림, 무관심, 소문, 외설, 외로움, 비밀)로 묶여 있다. 이 코드들은 사랑의 필연적 단계와 거기서 빚어지는 복잡한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랑을 단순히 행복과 비애의 이분법적 틀에서 느끼고 받아들였던 사람이라면 자신이 몰랐거나 혹은 간과했던 사랑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자기애나 외로움 역시 사랑의 범주에 들 수 있다는 논리에 큰 공감을 느낀다.

 

 

   감정은 관계의 소산이기 때문에 혼자 있다는 사실이 외롭다는 감정을 즉각적으로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나는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게 아니라 혼자가 '되어서' 외롭다. 외로움은 대상을 경유한 후에야 떠오르는 감정이다. 그것은 있어야 할 사람이 없어서 생기는 감정이므로 없음(부재)의 형식으로 수행되는 있음(현존)이다. (233쪽)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인간의 사랑은 어떤 식으로든 계속된다는 깨달음을 준다. 몽쌍씨와 같이 대상과의 융합만이 사랑은 아니라는 것, 대상과의 간격을 의식하게 해주는 가혹함 역시 사랑의 속성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직 메아리로써만 응답할 수 있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에코나 조각난 자아를 이끌고 세계로부터 추방당하는 프랑켄슈타인 등 적지 않은 괴물들이 끔찍한 형상과 운명으로 이러한 사랑의 비애를 구현하고 있다.

 

 

   우알레펜은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가졌다. 이괴물이 가진 양가성이 실제로는 무관심한 자의 행동과 유관하다는 뜻이다. 그는 다르게 행동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정상적인 양태를 벗어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성격과 운명을 제 모습에 구현하는 것, 이것이 상상 동물들의 운명이다. (195쪽)

 

 

   책에는 난생 처음 듣는 해괴한 괴물들의 이야기도 많지만, 카프카의 <변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문학작품이나 구미호와 강시, 좀비, 골룸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괴물들도 다수 등장한다. 낯설거나 익숙한 그들의 운명과 성격, 형체에서 사랑의 속성을 발견하는 일은 흥미롭고 또한 뜻깊다. 인간의 보편적 감정 중 하나인 사랑이 보편적이지 않은, 비정상적인 존재들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사랑의 보편성을 증거하는 이 책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끌어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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