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터스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프라이스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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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상 과학 소설입니다. 태평양 연안국 전쟁의 여파로 중장년층이 사라진 미국. 예방 백신을 맞고 살아남은 사회적 약자층 - 노인과 미성년자 -의 암울한 생존 형태를 통해 현대인의 위험한 욕망을 꼬집고 있는데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상에 로맨틱한 정서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상 과학 스릴러와 로맨스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로맨스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아요. 칙칙하고 암울한 분위기를 상쇄하는 정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공상 과학 장르를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 공상 과학적이고 디스토피아적인 정서에 익숙지가 못한데요. 공상 과학적인 이야기를 공상만 하다시피 살아온 저에게 이 소설은 '생각보다' 기묘하거나 암울하지는 않아요. 가독성도 높고요. 솔직히 재미는 모르겠습니다. 긴장감이나 몰입도도 뛰어나지 않은 것 같고. 가독성을 높이는 요소라면 평이한 문장과 빠른 이야기 전개 정도를 꼽을 수 있겠네요.

      

 

               2

 

      '엔더'라고 불리는 노년층과 미성년층인 '스타터'의 대립 구도를 중심 축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 본능이고 어디까지가 탐욕인가. 육체가 바뀌어도 변질되지 않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불멸의 자아는 가능한가. 젊고 아름다운 몸을 사고 파는 바디 뱅크 안에서는 다양한 욕망들이 대립하고 충돌합니다. 생존을 위해, 혹은 공짜 성형을 위해 바디 뱅크를 찾는 미성년들과 그들의 청춘을 돈으로 사는(정확히는 갈취입니다) 노인들. 탐욕과 죄악을 오가는 그들의 매춘('인생의 봄'을 사고판다는 의미에서) 행위는 추악하고 위태롭습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워요. 이야기 속 인물들의 폭주하는 욕망은 인간의 한계를 아프게 드러낼 뿐이니까요.

 

 

            3

 

     공상 과학 소설의 결말 치고는 다소 싱겁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상 과학적인 결말이라면 어느 정도 충격적이고 극단적이어야 한다는 이상한 기대를 했던 모양입니다. 현실감각을 휩쓸어버릴 정도의, 블랙홀 같은. 웬걸요. 이보다 현실적일 수도 없을 것 같아요. 기묘하고 색다른 감동,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SF적 감동이라 기대하던 그런 것은 느낄 수 없었고요. 씁쓰름한 뒷맛이 남는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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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 A Life - 고요한 밤의 빛이 된 여인
도로시 허먼 지음, 이수영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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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그 장면을 선명히 떠올릴 수 있다. 예닐곱 살이거나 그보다 한두 살 더 먹었을 것이다. 사촌동생과 나란히 엎드려 그림책을 넘기고 있었다. 어린이 위인전집 가운데 한 권이었다. 그 위인이 누구였는가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날카로운 단도 끝 찢어진 팔목에 듣는 시뻘건 핏방울. 시름시름 앓는 어머니를 위해 자신의 팔목을 찢어 그 핏방울을 입술에 떨어뜨리는 장면이었다. 그 위인은 여느 위인답게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던 것이다. 착하고 영리하고 효성까지 지극했으니까. 반찬투정을 하거나 동생과 싸우다 혼나는 것이 일상인 보통의 어린이들이 그 찢어진 팔목과 핏방울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을까. 어린 나는 충격을 받았다. 혐오와 공포와 존경심이 뒤섞인 그것은 어린이가 감당하기 벅찬 감동이었다. 지금까지도 내가 전기(傳記)를 즐겨 읽지 않는 것에는 그때 받은 충격도 한 몫을 할 것이다. 대부분의 전기가 보통의 사람들을 훨씬 뛰어넘는 인격과 재능을 가진 위인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인내심이 뛰어나고 매우 용감하다. 사사로운 일에 흔들리지 않고 큰 슬픔도 금방 떨치고 일어난다. 감정이입이 불가능하다. 거의 초인적으로 느껴지는 그들의 인격과 업적은 경외감만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우리와는 뿌리부터가 다르다. 가까이 할 수 없는 당신들. 한 점 흠이 없는 그들, 위인들은 외롭다.  

   

     헬렌 켈러. 가까이 할 수 없는 당신들 가운데 한 사람. 귀 멀고 눈 먼 헬렌의 놀라운 생애는 전기라기보다 신화에 가깝게 느껴졌다. 인간이기보다 성녀(聖女)로 기억했다. 아니, 기억에조차 담을 수 없이 헬렌은 헤아리기 어려운 먼 곳에 있는 존재였다. 결코 닿을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이 책을 펼치기 전까지는 그랬다. 도로시 허먼이 4년 간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씌여진 이 책에서 헬렌은 성녀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보통의 욕망을 가진 여성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와 똑같은 욕망과 감정을 가진 헬렌의 모습은 참으로 인간적이어서 그동안의 성녀 이미지에 속았다는 기분이 들 정도이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 사랑하는 남자와의 달콤한 미래를 그리며, 끝내 오지 않은 남자를 기다리며 서 있던 헬렌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하다. 헬렌은 보통 여성들의 삶을 꿈꾸었던 소박한 여성이었다. 심각한 장애를 가진 헬렌은 성녀가 되기를 강요당했다. 장애인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과 두려움 그리고 일부 사람들의 명예와 탐욕 때문에 헬렌은 평생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야 했다. 그렇게 헬렌은 '위인'이 되었다.

 

 

헬렌 주변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매우 객관적이고 인간적이다. 특히 앤 설리번의 복잡하고 민감한 성격이 매우 입체적이고 생동감 넘치게 묘사된다. 어린 시절과 보육원 시절의 아픈 경험은 종잡을 수 없이 변덕스러운 성격과 헬렌에 대한 병적일 정도의 집착을 잘 설명해 준다. 그 불안정한 사람이 마찬가지로 불안정한 사람과 함께 더듬거리고 넘어지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다. 기적과도 같은 헬렌의 생애를 말할 때, 헬렌의 천재성이냐 앤 설리번의 특출한 교육방식이냐를 두고 가르는 일은 무의미해 보인다. 헬렌과 앤 설리번, 그 둘이었기에 가능한 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오랜 세월 동안 눈이 먼 사람, 더구나 귀까지 먹은 사람은 괴물로 여겨져 더 크기 전에 죽임을 당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눈이 먼 아이들을 산꼭대기로 끌고 가서 굶겨 죽이거나 산짐승들에게 잡아먹히게 내버려두었다. 로마에서는 부모가 시장에서 작은 바구니를 사다가 앞을 못 보는 자기 자식을 담아서 티베르 강에 던졌다. (...) 눈 멀고 귀까지 먼 아이들에 대해서 그들의 부모조차도 원죄의 대가를 치르느라 그렇게 천하게 태어난 거라고 생각했다. (본문 중에서)

 

     헬렌의 삶을 함께 했던 수많은 사람의 면면에서 느껴지는 공통의 표정은 경외감이다. 헬렌을 지켜보거나 손잡고 대화하던 사람들은 노골적이거나 은밀하게 헬렌에게 성녀를 강요했다. 그를 간파한 헬렌은 세상의 요구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헬렌이 세상의 요구대로 성녀를 연기하며 남몰래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눈 뜨고도 자신을 못 보고 말짱한 귀로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엾어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은 시각장애인이 천재도, 괴물도, 바보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에게는 교육받을 수 있는 머리와 재주를 익힐 수 있는 손이 있다. 또한 그들에게는 야망을 이룰 권리가 있다. 그들이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여 사회의 일꾼이 되도록 돕는 것이 사람들의 의무이다. (헬렌 켈러, 1907년/ 본문 중에서)

 

    티비에서 점자를 더듬으며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를 보았을 때 처음 느꼈던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이 크게 떠졌다. 한눈에 시각장애인임을 알아볼 수 있는 감겨진 두 눈과 점자를 더듬는 신비한 손짓. 연민과 혐오와 경이가 뒤섞인 감정이 나를 덮칠 때 당황스럽고 불쾌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불편한 상황(장애인에 대한 본능적인 감정과 그에 따르는 죄책감)을 못 견뎌하고 그래서 장애인과 섞이기를 회피한다. 본능적인 감정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감정이라는 것은 도덕과도 의지와도 무관한 것이니까. 앞으로도 나는 장애인을 볼 때 연민과 혐오와 경이의 감정에 휩싸일 것이다. 그때 나는 나의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장애인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태도라고 생각한다.  

 

    신체적으로 부자유한 사람들, 장애인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그 두려움이 어디서 시작되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었던 헬렌 켈러. 그 어두움과 끝없는 고요가 우리는 두렵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그 어둠과 고요를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 안에도 있다. 이 두려움과 나약함이 편견을 낳는 것 아닐까.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자신과의 간극을 극복해야 하는 것 아닐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는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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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갈까요
김서령 지음 / 현대문학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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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인한 사월. 잔인해지지 못하는 나는 소설을 읽어요. 이번에 읽은 김서령의 소설집 《어디로 갈까요》는 온통 '이별'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이 봄날, 이별 이야기라니요. 과연 잔인한 사월인가요. 그래도 잔인해지지 못하는 나는 차마 한번 펼친 책을 덮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 봄날, 이별 이야기라서요.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뭣도 모르고 좋아하던 그 노랫말을 어느 정도 실감하게 된 서른한 살의 봄날, 피도 눈물도 없이 이별 이야기를 해보겠어요.

 

 

    처음 일주일 동안은, 이 자식 돌아오기만 하면 내가 죽여버릴 거야,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한 달이 지나가면서부터는 오히려 냉정해질 수 있었다. 변사체 신고가 들어올 때마다 차분하게 찾아다녔다. 내가 극심한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두 달이 넘어갈 무렵이었다. 정말 돌아오지 않는구나. 감시카메라를 여러 번 돌려보았지만 조악한 화질 안에서 신원이의 얼굴은 바짝 뭉개져 있었다. 그걸로는 신원이가 나에게 남기는 마지막 메시지를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이별할 수는 없었다. (203쪽)                                                           

 

 

     표제작 <어디로 갈까요>는 남편의 돌연한 죽음에 직면한 '나'의 자아 찾기 과정을 따라갑니다. 나는 사라질 거야. 소설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남편의 죽음, 즉 '사라짐'은 "늘 그들 곁에서 사라지고 싶었"던 '나'의 결별 의지를 각성시키는 동시에 배반합니다. 결별하기도 전에 결별에 직면한 것이지요. 떠나보낸 것도 떠나온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죽은 남편이 '나'에게 남긴 것은 "죽을 때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해도 갚을 수 없을 정도의 빚"만이 아닙니다. 매일 이별하며 살아가야 할 '이별의 과정'도 남았습니다. 책에 실린 나머지 여덟 편의 작품들 역시 바로 이런 '이별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모두 "죽을 때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이별해도 "갚을 수 없을 정도의 빚"처럼 '이별의 과정'을 떠안고 비치적거립니다.

 

    제대로 알았던 적 없었으므로 제대로 잊을 수도 없는 사람들을, 거기에 두었다. (166쪽)  

 

     이별에 봉착한 주인공 대부분의 공통된 태도는 부정(否定)입니다. 부정의 방식은 다양하지요. 광분, 죄의식, 불안. . . 고추장 통 때문에 익사한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는 '나'(「거짓말」)가 택한 이별의 방식은 '거짓말'이고요. 이별에 직면한 주인공들은 상실감에 앞서 상대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의식합니다. 누군지 모르게 되어버린 이와 이별해야 하는 당혹스러운 처지에 빠진 이들은 다소 연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죽거나 실종되거나 이혼하거나 잊거나 잊혀지는 이야기들에서 기묘한 경쾌함이 느껴질 지경이지요.

 

      "이번에는 정말 끝장을 내고 말 거야." (102쪽) 

 

     정말 끝장을 낼 수 있을까요. 관계가 그러하듯 이별도 우리 의지와는 별개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삶에서 우리 의지가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될까요. 새삼 인간의 무력함을 의식하게 됩니다. 살면서 겪는 다양한 만남과 이별을 그리고 있는 <이별의 과정>은 생의 허망과 인간의 무력을 일깨웁니다. 피아노 선생과 아빠의 짧은 만남과 이별, 아빠와 엄마의 연애와 아빠의 죽음 같은 '이별의 과정'은 애틋함도 없이 담담하게 펼쳐집니다. 눈곱을 떼어내거나 하품을 하듯, 밥알을 씹거나 걸레를 빨듯이 <이별의 과정>은 매우 일상적이어서 평온할 정도입니다. 기이할 정도의 평온은 체념이 아닌 순응에서 기인하고요. '나'의 이별 역시 그렇습니다. 많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오래된 남자친구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이별을 선언하는 '나'는 딱히 헤어지고 싶은 이유도 찾지 못합니다. 그냥 헤어져요. 그냥? 그냥. 이별의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의미심장한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일상적이지요. 그래요, 우리는 매일 이별하고 있군요.  

 

     혹독한 방식으로 삶을 증거하는 것이 이별. 삶은 거짓말 같은 죽음과 망각이 난무하는 것. 점점 멀어지면서, 매일 이별하면서 그래도 우리는 어딘가로. 어딘지는 몰라도 어딘가로. "잘 가고요, 기차 거꾸로 타지 마세요." 담담하게 책을 덮고도 나는 어디로 갈지 몰라 갈팡질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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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는 악어가 살지
파비오 제다 지음, 이현경 옮김 / 마시멜로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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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어린이가 첩자의 목을 자르다.

 

     신문기자는 기사를 통해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어린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어린이가 포로로 잡힌 사람의 목을 자르며 알라흐 아크바르('신은 위대하시다'라는 아랍어)라고 외치는 장면이 비디오카메라에 잡혔던 것이다. (...) 비디오에는 포로로 잡힌 아프가니스탄 남자가 한 무리의 탈레반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장면도 보였다. 탈레반 중에는 십대 소년들도 많았다. 사형을 할 아이, 커다란 군복을 헐렁하게 입은 그 아이가 말했다. '이자는 미국 첩자야.' 칼을 든 아이가 카메라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런 자는 죽어 마땅해.' 그때 한 탈레반이 포로의 수염을 들어 올렸다. 모두들 알라흐 아크바르, 알라흐 아크바르, 신은 위대하다고 외쳤다. 어린 아이가 칼을 남자의 목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내가 기사를 가리키며 또박또박 말했다. "나도 이 아이처럼 될 수 있었어요." (본문 중에서)

 

 

 

   

    "나도 이 아이처럼 될 수 있었어요."

    깊숙이 폐부를 관통하는 저 살벌한 진실 앞에 무릎을 꺾고 무너져 내립니다. 돌연 세계의 스위치가 나가버린 듯이 비현실적인 정적만이 시야를 흐릿하게 지워갈 때, 나는 본 것도 같습니다. 시커먼 바다를 유영하는 악어의 그림자.

 

    스물한 살 아프가니스탄 청년의 정치적 망명 과정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은 나의 무지와 무관심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자꾸만 나는 찔리는 것입니다. 망명. 위태하고 서러운 그래서 더러운, 생존! 이 책을 추천하는 문구들이 거슬리는군요. 아름답다느니 따뜻하다니느니. 추천 문구라는 것이 그렇고 그렇기는 해도, 이번만은 못 참겠습니다. 아름답고 따뜻하다니요. 이렇게 무지하고 무관심한 표현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현혹되지 마시라고요. 더럽습니다. 이 이야기는, 더럽습니다. 매우 단순한 방식으로 더럽습니다. 그래서 서럽습니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기다려야 했다. 인내심을 가져야 했다. 인내심이 생명을 구해준다. (본문 중에서)

 

    종교와 종족 분쟁으로 어지러운 아프가니스탄. 하자라족 마을에 사는 소년 에나이아트는 위태한 일상을 이어갑니다. 트럭을 몰던 아버지가 죽고, 하청업체에서 아버지의 트럭 값 대신 에나이아트와 그의 동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위협을 피해 이들 형제는 매일 밤 임시로 파놓은 구멍에 숨어 지냅니다. 그러나 위태한 평화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임시 피난처에 더 이상 몸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자란 에나이아트는 어머니에 의해 죽음보다 길고 위험한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파키스탄, 이란, 터키, 그리스를 거쳐 이탈리아에 이르는 망명 과정은 '인내'라는 한 단어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참고 참고 또 참는 것. 참을 수 없는 것도 참는 것. 무조건 참는 것. 에나이아트의 7년 간의 생존은 인내, 그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내게 어디 출신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프가니스탄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이 탈레반, 탈레반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내 나라에 대해 아는 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본문 중에서)


 

    보이는 것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검푸른 밤의 바다를 유유히 떠가는 악어의 실루엣 같은 진실을 이 작품은 포착해내고 있습니다. 고된 노동과 은신(隱身)의 날을 이어가는 아프가니스탄 소년 망명자의 눈에 비친 911테러는 심각한 영화의 한 장면 정도이고요. 올림픽이 열린 2004년 아테네는 축제의 현장이 아닌 돈벌이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소년의 망명 길은 역사나 정치, 종교적 문제와 직접적으로 맞닥뜨리지는 않습니다. 구식 텔레비전의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리는 소년의 눈 속에서 붕괴되는 건물, 먹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연기 같은 것을 상상하면서 눈을 비빈다던가, 소년이 올림픽 기간에 심은 아테네 거리의 가로수들이 하늘로 쭉쭉 뻗쳐나가는 모양을 꿈처럼 떠올려 볼 수 있는 정도지요. 트럭 짐칸에 공처럼 몸을 말아넣은 사람들의 무감각해진 통증과 요의(尿意).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는 망명자의 밤과 익명의 죽음들. 피를 나눈 형제가 어두운 구멍 속에서 희미해지고 세계의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려도 소년은 소년의 길을 갑니다. 그뿐입니다.


     네 어머니에게서 배웠던 언어가 아닌 언어를 쓰면서, 너는 어른이 되어갈 거야. 네 어머니에게서 배우지 않았던 언어로 최초의 차를 구입하게 될 거고, 네 어머니에게서 배우지 않은 언어로 휴식을 취하게 될 거야. 언젠가는 네 어머니에게서 배우지 않은 언어로 웃게 될 거야. (본문 중에서)

 

    스물한 살의 정치적 망명자 에나이아트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씌인 이 소설은 잔잔한 수면 아래 날카로운 악어 이빨을 숨기고 있습니다. 희망으로 부풀린 고무보트에 앉아 노를 저을 때, 돌연 샛노랗게 번득이는 악어의 눈과 마주칠 수 있습니다. 무서워도 참아야 해요. 참고 또 참아야지요. 살아남는다는 것은 곧 인내. 쓰디쓴 진실이 시퍼런 칼날처럼 마음 깊숙한 곳곳을 후벼파도 참아야 해요. 참아야만 합니다. 참는 것밖에는 없어요. 아, 하고 비명을 지르기도 부끄러울 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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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상페
장 자크 상뻬 지음, 허지은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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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에게 《뉴요커》는 학교와도 같아요. 나의 삶이지요.

 

                                                   - 장 자끄 상뻬

 

 

 

 

       상뻬는 열일곱 살 때 우연하게 본 《뉴요커》를 보고 한순간에 매료됩니다. 이후 30년 동안 그의 마음속에는 늘 《뉴요커》가 있었습니다. 열띤 동경이었지요.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까운 꿈이었고요. 《뉴요커》는 뭐랄까,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을 갖추고 있는 독창적인 세계였습니다. 1925년 이래 그 위엄이나 독창성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고요. 자신의 그림이 '감히' 《뉴요커》에 실린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던 겸손한 풍자화가에게 어느 날 꿈 같은 행운이 찾아옵니다. 《뉴요커》의 사장에게서 직접 그림 요청을 받은 것이지요. 1978년, 그렇게 상뻬는 《뉴요커》에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이지요. 지금 소개하는 책 《뉴욕의 상뻬》는 1978년부터 30년 이상 《뉴요커》의 표지를 장식했던 상뻬의 그림 150여 점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상뻬와 《뉴요커》의 30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화집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동안 그림으로밖에 만날 수 없었던 상뻬의 육성 인터뷰가 책의 특별함을 더하고 있습니다. 약간의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이 인터뷰에는 《뉴요커》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존경이 깃들어 있습니다. 한편, 상뻬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데요. 인터뷰 전반에서 보여지는 자기 그림에 대한 완고함과 겸손함이 인상적입니다. 《뉴요커》의 사장 윌리엄 숀의 까다로운, 이를 테면 똑같은 팔을 여덟 번이나 수정하게 하거나 그림의 한 부분을 지우라는 등의 요구를 수용하고 배우면서 상뻬는 그제야 자신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잡지의 덧없는 성격과 풍자화가라는 애매한 위치에서 흔들리는 잉여 인간에게 《뉴요커》는 또렷한 존재감을 부여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뭔가를 찾지만, 끝내 그게 뭔지 찾아내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내면적 자각이지요. 그런데 정말 뭔가를 찾아낸다면, 상황이 심각해지는 거예요. 혹시 이런 의문을 품어 본 적 있습니까? 누가 생명의 불씨를 주었는지, 왜 우리의 심장은 뛰기 시작한 것인지...... 대체 왜일까? 아무도 몰라요. 답은 없고, 그냥 흘러가는 거예요. (본문 중에서)

 

 

       상뻬의 그림을 처음 만난 것은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를 통해서였습니다. 상뻬는 그 책의 삽화를 그렸지요. 그때 나는 그림보다 이야기에 심취했습니다. 상뻬의 그림을 눈여겨보지는 못했다는 말입니다. 물결치듯 흐르는 선과 꿈결 같은 색감이 근사하다는 느낌이 전부였죠. 상뻬의 그림 역시 하나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야 깨닫습니다. 책에 실린 그림을 가만 들여다 보고 있자니 풍경과 인물과 색채와 여백이 음악처럼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틀이 없고 유리도 없는 창문과 같다는 인상도 받습니다. 미국적인 것, 뉴요커의 생활을 넘어선 보편성이야말로 상뻬 그림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가 아닌가 싶어요. 
    

  재즈는 곧 생략이에요. 하나의 곡언법이지요. (본문 중에서) 

 

 

        상뻬의 그림에서 사람들은 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철학을 발견합니다. 상뻬는 인터뷰에서 재즈에 대한 애정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는 피아노나 트롬본 등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상뻬의 그림에 강렬함과 은근함이 혼합된 재즈 선율과 같은 호소력을 더해준 것이 재즈에 대한 동경과 애정이 아니었나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상뻬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춤추고 포옹하고 연주하고 노래하고 걷고 달리고 말하고 웃고 울고 여럿이거나 혼자, 끊임없이 무언가를 동경하고 사랑하지요. 우리처럼요.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거예요.

 
      나는 항상 끊임없이 놀라고 또 놀랍니다. 조금 아까 창으로 비행기 한 대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에 수많은 사람들이 떠 있는 것이지요. 전속력으로 날아가는 그 기계 속에, 어디론가 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거예요. 나에게는 그런 생각들이 정말로 재미있고 매력적이랍니다. 정말 놀랍잖아요. (본문 중에서)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호소력을 갖는 상뻬의 그림은 일상적이면서 일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일상을 넘어선 그곳에는 상뻬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어요. 상뻬의 이야기는 생에 대한 경이와 경탄에서 태어나고요. 뜨겁고 팔딱이는 생의 속삭임은 누추한 일상에 젖어 있는 우리를 각성시키는 동시에 위로합니다.

 

 

L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타인들이 더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S(상뻬) 포도주 따개를 발명한 사람이나, 의자를 발명한 사람이나, 망치를 발명한 사람이나, 못을 발명한 사람이나, 다들 자신도 모르게 타인들이 더 잘 살 수 있게 기여를 한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L 맞습니다. 그렇지만 풍자화에는 그런 것들과 비슷한 실용적인 기능은 없지요.
S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풍자화를 사치품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치품 없이 살 수 없어요. 산다고 해도 아주 재미없게 살게 되지요. 사치품은 무지개입니다. 항상 비가 내리는 브르타뉴 지방에서 산다고 해봅시다. 살기야 살죠. 하지만 하늘에 뜬 작은 무지개를 보면 기분이 한결 좋아지겠지요. (본문 중에서)

     

 

       슥슥 쉽게 그려진 것 같은 그림이지만 매우 고심해서 그려진 그림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인터뷰에서 상뻬는 좋은 그림은 일 년에 한 점 나올까 말까 하다고 전합니다. 그 말은 자기 작품에 대한 상뻬의 엄격함을 보여주는 한편 삶이라는 것, "무지개"라는 것은 결코 쉽게 그려질 수 없고 그려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그래서 자꾸, 자꾸자꾸 상뻬의 그림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반짝 나타났다 사라질 무지개를 바라보는 심정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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