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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는 악어가 살지
파비오 제다 지음, 이현경 옮김 / 마시멜로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어린이가 첩자의 목을 자르다.
신문기자는 기사를 통해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어린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어린이가 포로로 잡힌 사람의 목을 자르며 알라흐 아크바르('신은 위대하시다'라는 아랍어)라고 외치는 장면이 비디오카메라에 잡혔던 것이다. (...) 비디오에는 포로로 잡힌 아프가니스탄 남자가 한 무리의 탈레반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장면도 보였다. 탈레반 중에는 십대 소년들도 많았다. 사형을 할 아이, 커다란 군복을 헐렁하게 입은 그 아이가 말했다. '이자는 미국 첩자야.' 칼을 든 아이가 카메라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런 자는 죽어 마땅해.' 그때 한 탈레반이 포로의 수염을 들어 올렸다. 모두들 알라흐 아크바르, 알라흐 아크바르, 신은 위대하다고 외쳤다. 어린 아이가 칼을 남자의 목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내가 기사를 가리키며 또박또박 말했다. "나도 이 아이처럼 될 수 있었어요." (본문 중에서)
"나도 이 아이처럼 될 수 있었어요."
깊숙이 폐부를 관통하는 저 살벌한 진실 앞에 무릎을 꺾고 무너져 내립니다. 돌연 세계의 스위치가 나가버린 듯이 비현실적인 정적만이 시야를 흐릿하게 지워갈 때, 나는 본 것도 같습니다. 시커먼 바다를 유영하는 악어의 그림자.
스물한 살 아프가니스탄 청년의 정치적 망명 과정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은 나의 무지와 무관심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자꾸만 나는 찔리는 것입니다. 망명. 위태하고 서러운 그래서 더러운, 생존! 이 책을 추천하는 문구들이 거슬리는군요. 아름답다느니 따뜻하다니느니. 추천 문구라는 것이 그렇고 그렇기는 해도, 이번만은 못 참겠습니다. 아름답고 따뜻하다니요. 이렇게 무지하고 무관심한 표현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현혹되지 마시라고요. 더럽습니다. 이 이야기는, 더럽습니다. 매우 단순한 방식으로 더럽습니다. 그래서 서럽습니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기다려야 했다. 인내심을 가져야 했다. 인내심이 생명을 구해준다. (본문 중에서)
종교와 종족 분쟁으로 어지러운 아프가니스탄. 하자라족 마을에 사는 소년 에나이아트는 위태한 일상을 이어갑니다. 트럭을 몰던 아버지가 죽고, 하청업체에서 아버지의 트럭 값 대신 에나이아트와 그의 동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위협을 피해 이들 형제는 매일 밤 임시로 파놓은 구멍에 숨어 지냅니다. 그러나 위태한 평화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임시 피난처에 더 이상 몸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자란 에나이아트는 어머니에 의해 죽음보다 길고 위험한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파키스탄, 이란, 터키, 그리스를 거쳐 이탈리아에 이르는 망명 과정은 '인내'라는 한 단어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참고 참고 또 참는 것. 참을 수 없는 것도 참는 것. 무조건 참는 것. 에나이아트의 7년 간의 생존은 인내, 그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내게 어디 출신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프가니스탄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이 탈레반, 탈레반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내 나라에 대해 아는 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본문 중에서)
보이는 것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검푸른 밤의 바다를 유유히 떠가는 악어의 실루엣 같은 진실을 이 작품은 포착해내고 있습니다. 고된 노동과 은신(隱身)의 날을 이어가는 아프가니스탄 소년 망명자의 눈에 비친 911테러는 심각한 영화의 한 장면 정도이고요. 올림픽이 열린 2004년 아테네는 축제의 현장이 아닌 돈벌이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소년의 망명 길은 역사나 정치, 종교적 문제와 직접적으로 맞닥뜨리지는 않습니다. 구식 텔레비전의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리는 소년의 눈 속에서 붕괴되는 건물, 먹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연기 같은 것을 상상하면서 눈을 비빈다던가, 소년이 올림픽 기간에 심은 아테네 거리의 가로수들이 하늘로 쭉쭉 뻗쳐나가는 모양을 꿈처럼 떠올려 볼 수 있는 정도지요. 트럭 짐칸에 공처럼 몸을 말아넣은 사람들의 무감각해진 통증과 요의(尿意).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는 망명자의 밤과 익명의 죽음들. 피를 나눈 형제가 어두운 구멍 속에서 희미해지고 세계의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려도 소년은 소년의 길을 갑니다. 그뿐입니다.
네 어머니에게서 배웠던 언어가 아닌 언어를 쓰면서, 너는 어른이 되어갈 거야. 네 어머니에게서 배우지 않았던 언어로 최초의 차를 구입하게 될 거고, 네 어머니에게서 배우지 않은 언어로 휴식을 취하게 될 거야. 언젠가는 네 어머니에게서 배우지 않은 언어로 웃게 될 거야. (본문 중에서)
스물한 살의 정치적 망명자 에나이아트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씌인 이 소설은 잔잔한 수면 아래 날카로운 악어 이빨을 숨기고 있습니다. 희망으로 부풀린 고무보트에 앉아 노를 저을 때, 돌연 샛노랗게 번득이는 악어의 눈과 마주칠 수 있습니다. 무서워도 참아야 해요. 참고 또 참아야지요. 살아남는다는 것은 곧 인내. 쓰디쓴 진실이 시퍼런 칼날처럼 마음 깊숙한 곳곳을 후벼파도 참아야 해요. 참아야만 합니다. 참는 것밖에는 없어요. 아, 하고 비명을 지르기도 부끄러울 노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