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갈까요
김서령 지음 / 현대문학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잔인한 사월. 잔인해지지 못하는 나는 소설을 읽어요. 이번에 읽은 김서령의 소설집 《어디로 갈까요》는 온통 '이별'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이 봄날, 이별 이야기라니요. 과연 잔인한 사월인가요. 그래도 잔인해지지 못하는 나는 차마 한번 펼친 책을 덮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 봄날, 이별 이야기라서요.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뭣도 모르고 좋아하던 그 노랫말을 어느 정도 실감하게 된 서른한 살의 봄날, 피도 눈물도 없이 이별 이야기를 해보겠어요.

 

 

    처음 일주일 동안은, 이 자식 돌아오기만 하면 내가 죽여버릴 거야,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한 달이 지나가면서부터는 오히려 냉정해질 수 있었다. 변사체 신고가 들어올 때마다 차분하게 찾아다녔다. 내가 극심한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두 달이 넘어갈 무렵이었다. 정말 돌아오지 않는구나. 감시카메라를 여러 번 돌려보았지만 조악한 화질 안에서 신원이의 얼굴은 바짝 뭉개져 있었다. 그걸로는 신원이가 나에게 남기는 마지막 메시지를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이별할 수는 없었다. (203쪽)                                                           

 

 

     표제작 <어디로 갈까요>는 남편의 돌연한 죽음에 직면한 '나'의 자아 찾기 과정을 따라갑니다. 나는 사라질 거야. 소설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남편의 죽음, 즉 '사라짐'은 "늘 그들 곁에서 사라지고 싶었"던 '나'의 결별 의지를 각성시키는 동시에 배반합니다. 결별하기도 전에 결별에 직면한 것이지요. 떠나보낸 것도 떠나온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죽은 남편이 '나'에게 남긴 것은 "죽을 때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해도 갚을 수 없을 정도의 빚"만이 아닙니다. 매일 이별하며 살아가야 할 '이별의 과정'도 남았습니다. 책에 실린 나머지 여덟 편의 작품들 역시 바로 이런 '이별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모두 "죽을 때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이별해도 "갚을 수 없을 정도의 빚"처럼 '이별의 과정'을 떠안고 비치적거립니다.

 

    제대로 알았던 적 없었으므로 제대로 잊을 수도 없는 사람들을, 거기에 두었다. (166쪽)  

 

     이별에 봉착한 주인공 대부분의 공통된 태도는 부정(否定)입니다. 부정의 방식은 다양하지요. 광분, 죄의식, 불안. . . 고추장 통 때문에 익사한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는 '나'(「거짓말」)가 택한 이별의 방식은 '거짓말'이고요. 이별에 직면한 주인공들은 상실감에 앞서 상대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의식합니다. 누군지 모르게 되어버린 이와 이별해야 하는 당혹스러운 처지에 빠진 이들은 다소 연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죽거나 실종되거나 이혼하거나 잊거나 잊혀지는 이야기들에서 기묘한 경쾌함이 느껴질 지경이지요.

 

      "이번에는 정말 끝장을 내고 말 거야." (102쪽) 

 

     정말 끝장을 낼 수 있을까요. 관계가 그러하듯 이별도 우리 의지와는 별개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삶에서 우리 의지가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될까요. 새삼 인간의 무력함을 의식하게 됩니다. 살면서 겪는 다양한 만남과 이별을 그리고 있는 <이별의 과정>은 생의 허망과 인간의 무력을 일깨웁니다. 피아노 선생과 아빠의 짧은 만남과 이별, 아빠와 엄마의 연애와 아빠의 죽음 같은 '이별의 과정'은 애틋함도 없이 담담하게 펼쳐집니다. 눈곱을 떼어내거나 하품을 하듯, 밥알을 씹거나 걸레를 빨듯이 <이별의 과정>은 매우 일상적이어서 평온할 정도입니다. 기이할 정도의 평온은 체념이 아닌 순응에서 기인하고요. '나'의 이별 역시 그렇습니다. 많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오래된 남자친구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이별을 선언하는 '나'는 딱히 헤어지고 싶은 이유도 찾지 못합니다. 그냥 헤어져요. 그냥? 그냥. 이별의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의미심장한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일상적이지요. 그래요, 우리는 매일 이별하고 있군요.  

 

     혹독한 방식으로 삶을 증거하는 것이 이별. 삶은 거짓말 같은 죽음과 망각이 난무하는 것. 점점 멀어지면서, 매일 이별하면서 그래도 우리는 어딘가로. 어딘지는 몰라도 어딘가로. "잘 가고요, 기차 거꾸로 타지 마세요." 담담하게 책을 덮고도 나는 어디로 갈지 몰라 갈팡질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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