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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남자의 문제
하워드 제이콥슨 지음, 윤정숙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영국 남자의 문제,라니. 궁금증을 유발하는 제목이죠? 상상해 볼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거나 이하일 거예요. 은퇴한 연예부 기자 '리보르'와 대중적인 철학자 '샘 핑클러', 닮은 꼴 배우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줄리언 트레스러브'.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이들, 세 명의 영국 남자는 모두 '문제'를 떠안고 있습니다. 아흔을 바라보는 '리보르'는 아내와 사별 후 심각한 '상실감'에 비틀거리고요. 부와 명예와 아름다운 아내와, 모든 것을 가진 '샘 핑클러'는 '끝없는 욕망'을 좇느라 늘 허기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줄리언 트레스러브'. 그의 문제는 보다 관념적이고,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공고합니다.
그의 삶은 소극(笑劇)이었다. 우스꽝스러운 것투성이였다. 그래, 사실이었다. 자신에게는 비극이나 장려함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의 비극과 장려함 속으로 전진해 들어가려고 했었다. (본문 중에서)
닮은 꼴 배우라는 줄리언의 직업은 그의 '문제'의 핵심을 집어주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자기 삶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줄리언은 항상 다른 이의 삶을 꿈꿉니다. 다른 이의 얼굴을 넘보고, 생각을 흉내내고, 말을 따라하면서요. '닮은 꼴 배우'는 직업을 넘어서서 그 자신의 존재 방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자기 삶을 살지 못하는 줄리언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되어야 하지요. 그 자신 이외 무엇이든.
줄리언에게 자신만의 꿈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이 있었지요. 어쩌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을 줄리언의 순수한 희망은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박살나고 말아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곳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음울하고 고독한 시가 판매상"이었던 아버지는 줄리언이 보다 또렷하게 살아가기를, 그러니까 현실적인 삶에 뛰어들기를 바랐지요. 그러나 삶은 얼마나 얄궂은가요. 우리가 끝내 알 수 없을 이상한 규칙들을 숨기고 있지요. 우리가 그 이상한 힘을 의식하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운명에 휩쓸려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줄리언의 '문제', '운명'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그 일은 최초이자 마지막이었을 그의 희망, 꿈의 좌절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지요. 어느 밤, 줄리언은 바이올린 가게를 들여다 보다 노상 강도를 당합니다. 습격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군요. 지갑과 금품을 노린 범죄는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갑과 금품을 갈취하는 형식 이면에 진짜 의도를 숨기고 있는 관념적인 습격이라고 할까요. 물론 이러한 추론은 관념적인 사내, 우리의 줄리언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바이올린'의 꿈이 좌절된 데에는 모두 다 그만한 뜻이 있어서였을까요. 어쨌든 바이올린 가게 습격 사건의 충격은 그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전환점으로 작용합니다. 한밤의 습격자가 남긴 한마디. 줄리언이 기억 속에서 되살려낸 그 한마디 때문이지요. "당신 주(You Jew)".
"네가 꾸며낸 거야."
"내가 왜 꾸며내?"
"너는 꼬이고 뒤틀린 사람이니까." (본문 중에서)
자신을 '주(Jew)', 즉 '유대인'으로 착각한 반유대주의자의 공격이었을 것이라는 줄리언의 믿음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어쩌면 자신이 '유대인'일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확신에 이르게 되지요. 이상해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삶의 규칙은 매우 정밀하지요. 들여다 봐야 해요, 침착하게. 줄리언에게는 오래된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이미 우리도 잘 알고 있는 그의 특성. 바로 흐릿한 존재감이지요. 그의 열등감은 학교 동기이기도 한 샘 핑클러에 대한 시기와 부러움으로 투영됩니다. 샘은 모든 면에서 그를 앞지릅니다. 부와 명예, 아름답고 지적인 아내와 영리한 아이들, 매력적인 정부(情婦)들. 그에 비하면 줄리언의 삶은 찌끄레기에 불과합니다. 사소한 좌절과 이별로 점철된 그의 삶에는 정작 자기 자신이 빠져 있으니, 말 다한 거죠. 그가 우러러보면서도 증오하는 샘 핑클러는 '주(Jew)', 즉 유대인이기도 합니다. 경계인이면서도 대중을 좌지우지하는 성공한 핑클러, 그의 특별한 능력에서 줄리언은 세상 모든 유대인들의 특별한 능력, 신성을 봅니다. 급기야 세상 모든 유대인과 유대적인 것, 특히 성공한 유대인들을 핑클러(들)라 통칭합니다. 그때부터 그의 세계는 핑클러(들)과 자기 자신. 둘로 나뉘게 됩니다. 끝없이 핑클러(들)의 삶을 동경하고 흉내내고 침범하면서 거듭 실망과 좌절에 부딪히는 그에게 핑클러(들)은 벽인 동시에 문이기도 하지요.
그는 핑클러의 둥지를 더럽혔고, 헤프지바를 통해 리보르의 둥지도 더럽혔다. 이 뻐꾸기 같은 이교도는 그들에게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자신의 삶이 소극(笑劇)이기 때문에 그들의 비극을 빨아먹고 싶었을까. (본문 중에서)
줄리언은 자기 앞에 놓인 모든 문들을 열어젖히기 시작합니다. 핑클러(들)의 세계로 통하는 그 문에 들어서면 자신 역시 그들의 특별함을 - 그것이 어떤 것이든 - 부여받을 수 있다는 비이성적인 확신에 차서요. 핑클러의 아내와 잠자리를 갖고, 이상형과는 거리가 먼 유대인 여성 헤프지바와의 동거 역시 이 열망과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존재하고픈 허기증. 무엇이라도 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핑클러(들)의 세계, 그 문을 끝없이 두드리던, 부서져라 두드리던 줄리언의 환상도 결국 부서지는 순간이 오지요. 그는 자신이 그토록 열망하던 '신성한' 세계에도 나름의 '문제'와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아프게 깨닫습니다. 환상이 깨어진 거기, 줄리언이 오래 외면했던 진정한 '삶'이 얼굴을 드러냅니다. 비극적이지도 희극적이지도 않은.
그 안에 수치가 있었다. 그는 누구의 수치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아마도 자연의 일부. 엄청난 세월이 지났어도 밀물처럼 밀려드는 피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 아니면 수치는 이 도시일까? 이 도시가 나타내는 문명화의 환상? 교훈을 얻지 못한 아이의 공허하고 고집스러운 완고함과도 같은 그 얼굴 없는 불굴성? (...) 그렇지 않으면 수치는, 모든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누구도 아닌 줄리언 트레스러브, 그 자신이었다. 그는 혀를 데어가며 차를 홀짝였다. 그가 구하던 특별함은 - 그만큼이나 규정할 수 없는 누군가를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면 - 불필요했다. 수치는 일반적이었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되는 것은 수치가 되는 것이었다. (본문 중에서)
리보르와 샘 핑클러, 그리고 줄리언 트레스러브의 '문제(들)'를 통해 "사랑과 상실" 그리고 "경계인"의 삶을 통찰하는 이 작품은 2010년 영국 부커상 수상작입니다. "부커상 최초 유머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서점 진열대에 누워 독자를 기다리고 있는데요. 부커상이니 유머소설이니 하는 광고성 문구에 집착하는 분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이 소설 별로 웃기지는 않습니다. 유대적인 문제에 관한 철학적이고 냉소적인, 다소 토론 조로 흐르는 대화가 주를 이루는데요. 즉흥적이고 단순하게 터져나오는 웃음을 기대하는 분이라면 실망하기 십상입니다. 이 작품에서 하워드 제이콥슨이 구사하는 유머는 매우 지적이고, 오히려 비극성마저 느껴지지요. 이 비극성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어떤 감정, 바로 인간적인 '수치'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바이올린 가게를 들여다 보다 불시의 습격을 당한 줄리언처럼 우리는 두리번거리게 되지요. 너무 멀리 왔다는 것을 의식하고 허둥대는 우리에게 이 작품은 절박한 한마디를 남깁니다. "집으로 돌아가. 자네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 뭐라고요? 당신에게는 "You Jew?"로 들렸다고요? 틀림없이 You Jew였다고요? 오 마이 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