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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 2012년 제13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김중혁 외 지음 / 문학의숲 / 2012년 10월
평점 :
던지면 길게 늘어졌다 다시 돌아오는, 요요는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손에 쥐고 놀려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능숙하게 다루는 아이들만 보고 손에 쥐어본 요요는 그러나 생각만큼 쉽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휘익, 하고 내던지면 이리 튀고 저리 튈 뿐 손 안에 쥐어지지 않던 아쉬움. 올해로 13회를 맞는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 <요요>는 그 허전한 감각을 되살리는 작품이었습니다.
네가 만들어 준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시침과 분침이 겹쳤다가 떨어지는 순간, 그건 멀어지는 걸까, 아니면 다시 가까워지고 있는 중인 걸까. * * 수상작 <요요> 중에서
시계제작자 차선재의 고독한 삶을 압축한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줄여볼 수도 있겠습니다. 시간은 흐른다. 타인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칭 "관계를 부수는 사람" 선재를 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시간에 대한 고찰이 담긴 독특한 시계입니다. 차선재가 만든 시계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저 흘러갑니다. 시침과 분침이 원형의 문자판을 따라 회전하는 반복적 시간에 익숙한 우리에게 그 직선의 시간은 역설적이게도 잃어버린 시간을 상기시킵니다. 내던져진 힘만큼 멀어졌다 되돌아오는 요요처럼요. 멀어지다 가까워지고 또 멀어지는,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요요의 시간.
걸어가고 있는 장수영의 손을 보았다. 흔들리는 손을 보았다. 저 손을 잡고 함께 걸었다. 내가 잡았던 손이었다. 장수영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장수영도 자신을 보고 있는 차선재의 눈길을 알고 있었다. 한번 돌아보면서 손을 흔들까 생각했지만 언제쯤 어떻게 돌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손을 흔드는 건,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계속 걷다 보니 이미 주차장 입구로 향하는 계단으로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 * 수상작 <요요> 중에서
요요의 시간은 상실의 감각을 일깨웁니다. 돌아갈 수 없는 순간에 대한 미련과 그리움. 대학 선배 장수영과의 헤어짐과 재회 속에서 선재는 '흐르는 시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상실의 시간을 상심하지 않게 된 것이지요.
해보자 이거지, 응? 누가 이기나 해보자 이거지? 그래, 찔러봐, 찔러 보라고. 씨팔, 내가 돌아갈 거 같아? 응? * * 김중혁 <바질> 중에서
<요요>와는 또 다른 형식이지만 자선작 <바질>에서도 김중혁은 상실감을 이야기합니다. 박상훈과 담담하게 헤어진 차우영은 이국의 어느 거리에서 우연히 바질 씨앗을 발견하고 손에 넣게 됩니다. '바질'은 박상훈과 자주 가던 카페 이름이기도 합니다. 연인에 대한 미련이 담긴 그 씨앗은 차우영이 의식 못하는 사이 가시 돋친 가지를 늘려가고 급기야는 그녀를 집어삼키고 말아요. 박상훈은 차우영을 구하기 위해 괴식물의 늪에 뛰어드는데요. 자신들을 포위하고 살갗을 찌르고 압박하는 무지막지한 힘은 다름 아닌 지나간 시간의 향기, 바질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헤어진 연인의 상실감을 가시 돋친 괴식물과의 싸움에 비유하고 있는 이 소설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우리 마음 깊은 곳을 두드립니다.
수상작이 된 <요요>와 함께 예심에 올랐던 일곱 편의 우수작들을 살펴 볼게요.
에바의 세계는 너무나 화려해서 아득했고, 아그네스의 세계는 너무나 핍진해서 믿어지지 않았다. 에바는 더 이상 공통점을 추출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듣고만 있는 아그네스가 말없이 자신을 비난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우정은 과거가 만들어 낸 상상일 뿐이야. 에바는 눈물이 날 것 같아 천천히 유리 막대를 젓는다. ** 김성중 <에바와 아그네스> 중에서
각각의 작품들은 형식과 내용 면에서 뚜렷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만난 두 여인의 그림자 같은 우정을 보여주는 김성중의 <에바와 아그네스>, 얼굴도 모르는 대리모에게서 태어난 '나'의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그리는 조해진의 <밤의 한가운데>, 세상을 등지고 수학적 논리 안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여인의 폐쇄적 삶을 다루는 박형서의 <Q.E.D.> 등 모든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언어는 '불화(不和)'입니다. 오십 살도 넘은 암코끼리와 여행을 떠나는 '나'의 이야기를 발랄하게 풀어내는 최진영의 <엘리>와 조현, 그리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 황정은의 작품에도 역시 소통 불능으로 불화를 겪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아무 말 없이 괄다를 지나쳐야 했다. 해 줄 말이 없다. 전할 말도 없다. 무슨 말을 하든 귀가 접힌 괄다는 듣지 않을 것이다. ** 김태용 <알게 될 거야> 중에서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김태용의 문장을 만나게 될 줄이야. 예상 못했던 만큼 반가움도 크네요. 김태용의 문장을 눈으로 쫓으면서 비죽비죽 터져나오는 웃음을 어쩔 수 없습니다. 뚜렷한 서사가 배제된 그의 소설은 읽는 이를 당혹스럽게 하지만, 그럼에도 다음 문장을 읽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끝을 보고야 말게 하는 이상한 힘이 있습니다. 여기서 계속 가자.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그리고 독자는 계속 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계속 가면 뭐가 나오느냐. 궁금해요? 그건, 만나서 얘기합시다.
(...) 소설을 쓰는 것은, 때때로 시간을 어지럽히는 일이다. 이효석 선생도 시간을 어지럽혔으므로 먼 시간 밖에 있는 나에게 이르렀다. 내 글 역시 시간을 교란하는 역할을 떠안길 바란다. 한 글자 한 글자 써 나갔던 소설 쓰기의 순차적인 시간이 누군가의 시간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안개 속에 있을 때 이효석 선생이 불빛을 반짝여 주었다. 잘 가고 있다고, 잘 헤매고 있다고, 불빛이 반짝였다. 불빛은 곧 스러질 것이다. 나도 곧 불빛을 잊고 방향을 잃을 것이다. 삶의 방향 같은 건 없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 김중혁 수상소감 중에서
기수상작가 이기호의 자선작을 포함해 열 편의 작품 하나하나 개성이 또렷해서 읽는 즐거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상 작가 김중혁의 수상소감을 옮기며 글을 마칩니다. 축하를 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