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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잔해를 줍다
제스민 워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미국 남부 연안의 흑인 빈민가를 무대로 하는 이 소설은 2005년 여름, 미국 뉴올리언스를 덮친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요. 작가인 제스민 워드는 당시 끔찍한 재앙의 생존자입니다. 충격에서 헤어나기까지 2년 여의 시간이 필요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생생한 묘사가 두드러집니다.
끔찍했다. 바람이다. 매질하는 데 쓰이는 전깃줄처럼 사나운 채찍을 휘두른다. 비. 살갗을 후려치는 돌멩이처럼 우리의 눈 속을 파고들며 눈을 뜰 수 없게 만든다. 물. 사방에서 소용돌이치며 모였다가 굽이쳐나가는 물은, 그 아래 가라앉은 웅덩이 흙 때문에 붉고도 붉어 보여서 피가 그치지 않는 거대한 상처 같다. (본문 중에서)
허리케인을 소재로 하고 있다고 하면 재난소설의 형식을 생각하시는 분도 있겠는데요. 이야기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 것은 맞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이 소설은 전형적인 성장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 있겠어요. 가상의 도시 부아 소바주 중심에 위치한 작은 오두막을 배경으로 열다섯 살 흑인 소녀 에쉬의 시점을 따라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무뚝뚝하지만 속깊은 두 오빠와 어린 동생, 알코올중독자 아버지와의 가벼운 일상, 죽은 엄마에 대한 회상이 이야기의 주를 이루고 있는데요. 변두리 흑인 빈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내 셔츠로 감싼 달걀들이 데운 돌처럼 따뜼하다. 그런데 가볍다. 색깔은 돌 같지만 돌이라깅는 너무 가볍다. 나는 달걀이 자갈 색깔이라서 꼭 그만큼 무거울 거라고 생각했다. 품에 넣으면 내 몸이 앞으로 기울 거라고.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나는 개구리 알이 올챙이로 변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봄에 우리 땅 근처의 도랑에 가보면 개구리 알이 그득했기 떄문이다. 나와 스키타 오빠가 어렸을 때 한번은 도랑가에 엎드려 손으로 개구리 알을 퍼내서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정말 작은 벌레 같은 개구리들이 있는지, 뒤척거리고 꿈틀거리다 보면 길고 뾰족해져서 쑥쑥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눈을 감은 수백 개의 조그만 눈동자 모양을 하고 있을 때, 알들은 공기보다도 가볍고 산들바람처럼 시원하다. 나는 알 안에 있다면 몸을 보호할 주머니가 필요한 동물들, 그러니까 말이나 돼지나 인간도 그처럼 가벼울까 궁금해졌다. 개똥벌레의 심장을 품은 젤리처럼 투명해 보일까, 아니면 돌처럼 단단하고 고요해 보일까? (본문 중에서)
소설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작가의 목소리가 있는데요. 생명에 대한 존엄성입니다. 이야기 첫머리부터 들큼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끼 개들의 출산 장면이 나옵니다. 가족의 일부라 할 수 있는 투견 차이나의 새끼들이죠. 이야기 첫머리를 장식할 정도로 차이나가 이야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큽니다. 차이나와 특별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 스키타의 입을 빌려 작가는 그 어떤 생명도 하찮은 것은 없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니어를 낳다 죽은 엄마와 자신의 뱃속에 자라고 있는 아기를 통해 에쉬는 삶과 죽음 너머의 신비를 체험합니다.
폭풍 전야 열흘과 폭풍 당일 그리고 그 다음 날까지를 하루 단위로 구성해 진행되는 이 소설은 '폭풍 전야'의 불안과 긴장을 매우 효과적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개의 출산, 농구 시합, 투견 대결 등 자잘한 일상을 보여주면서 크고 작은 시련을 초연히 끼워넣습니다. 에쉬의 임신과 매니의 배신, 개의 죽음, 아버지의 손가락 절단 사고 같은 시련은 무거운 구름을 몰고 빠르게 다가오는 허리케인에 대한 불안감을 고조시키지요. 폭풍 전야,라는 말이 실감나요. 시련과 갈등이 부풀어오르고 묵직해지면 독자는 차라리 폭풍을 기다리는 마음이 됩니다. 미친 바람이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기를요. 그리고 허리케인이 들이닥치는 순간 이상한 고요함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흔들리는 컴컴한 다락에 옹그린 채 같이 뒤흔들리면서요. 바람의 말에 귀기울이는 낮과 밤. 부서지고 뒤섞이고 날아가는 시간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제스민워드는 이 고요한 절박감을 소설에 잘 녹여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