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
알렉상드르 졸리앙 지음, 성귀수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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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상드르 졸리앙은 날 때부터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장애인입니다. 세 살 때부터 십칠 년 동안 장애인 요양 시설에서 생활했던 그의 삶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요양 시설에서는 그에게 '자기를 내려놓으라'고 했습니다. 삶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놓아버리라는 말이었는데요. 당시 졸리앙은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상한 주문은 버거운 삶에 더해진 새로운 짐처럼 느껴졌지요. 시간은 흐르고 흘렀습니다. 졸리앙의 연약한 어깨를 짓누르던 그 이상한 짐은 견고한 영혼의 집이 되었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 정신의 발자취, 한 사람이 지나온 마음의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선불교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여우가 여우가 아니기 위해 무얼 할 수 있을까?" 저 역시 종종 이런 질문을 떠올려본답니다. "지금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기 위해선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지요. 알렉상드르는 알렉상드르가 아니기 위해 무언가를 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 중에서)

 

 

    붓다는 붓다가 아니니, 바로 그래서 내가 이를 붓다라 이르니라. 《금강경》의 한 대목인데요. 졸리앙이 이 책에서 풀어놓는 모든 이야기가 바로 이 한 문장에서 시작해 끝을 맺고 있습니다. 세상 어떤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대로의 존재는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는 말인데요. 우리의 선입견이 사람과 사물을 가두고 거기서 집착도 생겨난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생각, 말이라는 것이 하나의 고정된 관념, 선입견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 무엇이든 확정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는 자세... 저 《금강경》의 가르침에서 졸리앙은 내려놓기, 바로 집착하지 않는 태도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최근 들어 부쩍 마음수행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기를 지키는 것이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죠. 세상이 요구하는 것에 발빠르게 대응하는 자가 살아남는 이 현실은 자기를 잊고 잃어버린 허깨비들을 낳고 있습니다. 자기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사는 삶에 익숙한 사람들... 이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대가 앉아 있을 땐 앉아 있어라. 그대가 서 있을 땐 서 있어라. 그대가 걸을 땐 걸어라. 무엇보다 서둘지 마라. (본문 중에서)

 

      내려놓아라. '나'는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불교에서는 이런 가르침을 줍니다. 졸리앙이 요양 시설에서 지겹도록 들은 말이기도 하지요. 내려놓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고통을 회피하거나 삶을 단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슬플 때 슬퍼하고 기쁠 때 기뻐하고 놀 때는 마음껏 노는 것.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는 것. 내려놓기,는 오히려 삶과 단단히 밀착되는 작은 지혜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허깨비의 삶을 이어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감정'이라는 것은 매우 불편한 찌끄레기에 불과합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기 안의 욕구를 담고 있기 때문이지요. 《금강경》에서부터 성경, 옛날 성인들의 잠언들을 인용하며 졸리앙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그 어떤 생각이나 말에 갇히거나 집착하지 말고, 지금, 여기,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지요.

 

     "새들하고 싸우지 마. 날개 달린 짐승들은 함부로 쫓는 게 아니야. 그냥 낮에 파란 하늘 한 귀퉁이 살짝살짝 드러날 때를 틈타 한 번씩 쳐다보는 게 나을 거야." 그 말을 들은 후로 새들만 응시하는 버릇은 없어졌습니다. 어차피 한곳에 머물지 않고 휑하니 지나가버리는 떠돌이들이니까요. 대신 저는 드문드문 보이는 파란 하늘 조각에 집중합니다.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어온 평화, 붓다의 본질 말입니다. 제 인생에 그토록 짙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다는 걸 깨닫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새 떼들 뒤쪽에 펼쳐진 푸른 하늘을 본다고 해서 불안과 고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꾸 자기 시야를 제한하고, 안 좋은 것에만 집중하는 고질적인 버릇을 뜯어고치자는 것이죠. (본문 중에서)

 

 

    앞서 언급한 대로, 책의 큰 줄기는 《금강경》의 한 대목으로 이루어집니다. 나머지는 부연에 불과하지요. 불교의 핵심 사상을 풀어놓고 있는 이 사람, 졸리앙은 재미있게도 기독교 신자입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진정한 '내려놓기'를 실천하고 있는 셈입니다. 종교와 사상적 경계를 넘어 순수하게 자기를 탐색하고 있으니까요. 그의 순수한 자기 탐색은 삶의 본질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 삶은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복잡한 여정이라는 것.

 

    삶은 계속되고...... 바보는 제 갈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뿐입니다. (본문 중에서)

 

 

     부끄러운 사실을 고백해야겠습니다.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장애인에 대한 나의 편견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요. 졸리앙은 철학을 전공한 철학자인데요. 철학자,보다는 뇌성마비 장애인,이라는 타이틀에 마음이 치우친 것입니다. 나와는 다른 특별한 사람일 거라는 무의식적 편견을 알아차린 건, 책에 대한 실망감에서였습니다. 특별할 것이 없었습니다.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여타 마음수행 책과 다를 바 없었죠. '나와는 다른 특별한 사람'... 그러니까 뇌성마비 장애인의 삶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 고뇌에 찬 타인의 삶을 훔쳐보면서 나의 고뇌를 위로하려고 했던 찌질한 마음이 참 부끄럽습니다. "장애는 장애가 아니다. 그래서 이를 장애라 부른다." 마음속으로 되뇌어 봅니다. 굳이 이런 부끄러운 고백을 하는 것은... 혹시 저처럼 특별한 기대를 품고 책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입니다. 이 책은 뇌성마비 장애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순수하게 자기 탐색을 해 온 정신의 발자취를 담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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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처럼 울고, 신화처럼 사랑하라 - 신화 속에서 건져올리는 삶의 지혜 50가지
송정림 지음 / 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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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 속에 신은 없습니다. 인간의 복잡한 욕망이 있을 뿐입니다. 우선,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에서부터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태양, 불과 바다, 바람의 신. 전쟁과 사랑, 아름다움의 신... 인간적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죠. 그러니까 신화적 관점에서 신은 인간의 모조품인 셈입니다. 신화 속에 그려지는 신들의 모습은 매우 인간적입니다. 그들은 결코 완벽하지 않습니다. 인간적 감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신화 속에서 크고 작은 운명을 짓고 부수는 힘은 인간성을 초월한 어떤 힘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저주를 퍼붓는... 그 힘은 바로 '인간적 감정'입니다. 신화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죠. 생각해 봐요. 인간성과는 동떨어진... 인간을 초월한, 인간이 아닌, 완벽한 '그 무엇'이 등장하는 이야기를요.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인간적 한계에 갇힌 인간에 불과하니까요. 혹,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누가 그걸 읽겠어요? 우리가 '이야기'를 지어내고 읽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공감'입니다.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자기 자신과 조우할 때 우리는 위로받습니다. 인간의 다양한 욕망, 수많은 표정을 묘사하는 신화가 지금까지 널리 읽히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로마 신화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이 얽히고설킨 희비극이라 할 만하죠. 아내의 눈을 피해 별의별 속임수로 사랑을 나누는 제우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으로 불을 훔치는 프로메테우스, 인간을 사랑한 신 에오스, 아름답지만 질투심 강한 아프로디테 등... 인간적 감정에 휘둘리는 신들의 모습은 매우 인간적입니다. 신화에 등장하는 인간의 운명은 바로 이 인간적인 신들의 감정과 변덕에 좌지우지됩니다. 살랑바람 같은 신들의 의지에 반해 인간의 의지는 매우 굳세게 묘사되는데요. 종종 인간의 굳센 의지가 신들을 감동시켜 운명의 그늘을 벗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화 속에서 신들이 전지전능으로 인간의 운명에 개입한다면, 인간이 그 운명을 극복하는 유일한 힘은 바로 '의지(意志)'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화는 자기 안의 수많은 욕망과 싸우는 인간의 일생을 그리고 있는,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저...... 저는 그냥...... 당신의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프시케의 변명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에로스는 날개를 펴고 창밖으로 날아갔다. 놀란 프시케는 허둥지둥 그를 따라가다가 그만 창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에로스는 땅에 쓰러진 프시케를 보고 잠깐 날갯짓을 멈추고는 말했다. "어리석은 프시케여. 사랑과 의심이 어떻게 함께할 수 있겠는가?" (본문 중에서)

 

 

    그리스로마 신화는 신화적 상상력과 매력적인 상징들이 가득합니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재해석하는 책들이 넘쳐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책들은 신화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합니다. 지금 소개하는 이 책은 그리스로마 신화를 중심으로 희망, 사랑, 탐욕, 슬픔, 즐거움... 다섯 개의 주제 안에서 삶의 단상을 풀어내고 있는데요. 앞서 신화의 핵심 부분을 소개하고 약간의 사색을 곁들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책을 써 온 저자의 경력 때문인지 문장도 무난해서 읽기에 큰 불편은 못 느꼈습니다.

 

     오이디푸스에게 장님이 되어 암흑 속에 갇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단지 더이상 참혹한 현실을 보고 싶지 않다는 현실도피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에게 주어진 인간의 본질을 똑바로 보기 위한 것이었다. 눈을 감아야 정말로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 그 물음에 충실하게 임하고 싶었던 것이다. (본문 중에서)

 

 

    그리스로마 신화를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책에 등장하는 이름과 이야기가 크게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 읽지 못한 사람이라도 무성한 소문처럼 떠도는 신화의 위력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신화는 우리 삶 곳곳에 녹아 있으니까요. 다양한 예술작품에서는 물론 일상에서도 쉽게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박카스, 오리온, 나이키, 헤라, 헤르메스... 누구나 한 번 들으면 알 만한, 신화 속 등장인물에서 따 온 상품명들이지요. 그리스로마 신화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도 신화가 숨겨놓은 다양한 삶의 상징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권해드리고 싶어요. 제가 맨 처음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은 것이 중학생 때였는데요. 하아. 그땐 이보다 더 지루한 이야기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 아니 확신을 했습니다. 공감할 수 없었고, 그래서 집중하기 어려웠습니다. 삶의 경험이 부족했던 탓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그때의 저와 같지 않을까... 하는데요.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핵심만 짧게 간추리고 있어서 내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두꺼운 그리스로마 신화를 선뜻 펼치기 부담스러운 사람들, 읽던 도중 포기한 사람들에게 이 책은 부담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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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하는 책읽기 - 나를 다독여주고 보듬어주세요
서유경 지음 / 리더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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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끝을 간지럽히는 당신들의 지문. 포획을 노리는 거미줄 같은 밑줄들. 행간마다 고인 너의 시간, 모서리 접힌 페이지에 담긴 감정들... 사람 손을 탄 책, 그러니까 헌책은 은밀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90년대만 해도 헌책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기는 것이 유행(?)이었던 것 같아요. 펜팔 시대이기도 했지요. 무심하게 넘긴 책의 페이지에서 모르는 이의 이름이나 전화번호 같은 것을 발견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유치하고 은밀한 낙서나 머리카락, 압사한 곤충의 사체, 심지어는 말라붙은 코딱지마저도 ^ ^ 어떤 정취를 품고 있었던 것 같아요.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의 간극. '너'의 색깔과 '나'의 색깔의 다름을 넘어선 기묘한 연대감. 접힌 모서리를 펼칠 때의 설렘과, 오래된 밑줄 위에 다시 밑줄을 그을 때, 그 부듯한 마음. 그런 사소하고 순간적인 몸짓과 느낌이 나를 위로했고, 그래서 헌책방을 자주 찾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위로하는 것은 실로 사소하고 순간적인 몸짓이나 눈짓, 뜻밖의 감정들. 아아! 하는 짧은 감탄사 같은 것들 아닐까요.

 

    당신은 종이에 물을 뿌려 나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묻어 나온 것들은 간혹, 당신이 읽어낼 수 없는 나의 여백이거나

     서쪽에서 동쪽으로 번지는 먹구름이거나

     나는 여기서 쉼, 표를 찍는다

 

          - 김지녀, 『시소의 감정』, 민음사, 80~81쪽

 

 

   우리 삶은 "당신이 읽어낼 수 없는 나의 여백"과 '내가 읽어낼 수 없는 당신(들)의 여백'으로 채워진 거대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의미를 알기 어려운 행간들, 누군가 접어두고 잊어버린 페이지들을 무심히 넘기다 불현듯, 아아, 마음을 두드리는 단어나 문장을 만나는 순간들이 있죠. 힘주어 밑줄을 긋는 그 짧은 순간. 그런 공감의 순간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무거운 삶을 버티기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에게 삶이란 단지 오늘을 견디는 것, 바로 그것뿐이다. 아직 더 견뎌야 했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내게 삶을 견디는 방법을 가르쳐 준 사람은 없다.

 

                    - 조경란, 『불란서안경원』, 문학동네, 304쪽

 

 

     지금 소개하는 책 『치유하는 책읽기』는 여백의 시간을 채우는 밑줄들로 가득합니다. '책에 관한 책'이 속속 쏟아져 나오고 또 많이 읽히는 것 같은데요. 이 책 역시 책 속 책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을 쓴 서유경은 은희경과 김연수, 정미경, 한강, 김숨, 김이설의 소설을 좋아하는 한국문학 애호가입니다. 책에 실린 문장들 모두 한국문학(소설, 시, 산문) 작품에서 옮긴 것들인데요. 방대한 독서량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종 차분한 어조로 책 속 문장을 소개하는데요. 아직 읽지 않은 책들도 이미 읽어버린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한 편, 한 권의 책에서 고른 한 구절... 그 짧은 문장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느낌.

 

     커피 한 잔을 마실 때에도 욕심이 자란다. 뜨거운 커피 한 잔이면 족하다. 그러니 일회용 믹스로도 충분한데, 순간 커피메이커가 있다면 더 맛난 커피를 마실 수 있을 거란 기대, 원두를 갈아 마시면 그 향은 얼마나 황홀할까, 상상한다. (...) 우리가 잊고 있던 삶에 대해 시인이자 여행작가안 최갑수는 산문집 『잘 지내나요, 내 인생』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갖는 일은 분명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을 포기하는 일, 그것 역시 새벽 두 시에 잠들어 세 시에 깨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버린다는 건 어찌됐든 내게서 떠나가는 일이다. 떠나가는 것만 생각하고 다가올 것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한다면 어떤 것도 버리지 못하게 된다. (119~120쪽)

 

 

    전문적인 서평이나 자세한 책 소개를 담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읽기에 따라서 책 이야기는 배경으로 치부해도 될 정도니까요. 그러니까, 책에 대한 이야기이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삶과 문학의 경계를 구분짓는 일이 무의미해 보입니다. 기차를 타고 연인을 만나러 가던 기억, 설거지하다 아끼는 컵을 깬 일, 공부와 취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촌 동생 이야기... 서유경은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에 힘주어 밑줄을 그어요. 밑줄을 따라 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그림자, 억눌린 욕망과 은밀한 기억, 감정들과 조우하게 됩니다. 나 자신도 몰랐던 혹은 모르는 체하고 싶었던 수많은 얼굴들. 그것들을 똑바로 응시하고 긍정하는 서유경의 담담한 태도에, 아아! 하고, 나직하고 짧은 동조의 목소리를 보냅니다. 

 

 

                     서유경(자목련) 님의 블로그 http://littlegirl73.blog.me

 

 

 

 

 

 

             (*)

              서평에 소개한 인용문은 모두 『치유하는 책읽기』에서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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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언덕 단비청소년 문학 2
창신강 지음, 최지희 옮김 / 단비청소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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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하나의 작품만으로도 마음에 새겨지는 작가가 있지요. 저에게는 창신강이 그런 작가 중에 한 명입니다. 그의 전작 《나는 개입니까》를 매우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인간으로 변신한 개의 눈에 비친 인간 세계를 그리고 있는데요. 진심이 담긴 이야기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평이한 듯 독특한 맛이 느껴지는 문장도 참 좋았고요. 깊이 우려낸 차의 풍미 같다고 하면 될까요. 자극적인 맛은 없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그윽한 향이 온몸으로 퍼져가는 부듯한 느낌.

 

    하늘 언덕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곳이다. 그곳은 꿈꾸는 아이들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미래를 보여 준다. 하늘 언덕은 상처 받은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다. 그곳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본문 중에서)

 

   요즘 힐링, 힐링 하죠. 지금 소개하는 작품 《하늘 언덕》에서 창신강은 진정한 '치유'의 의미를 묻고 있습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차오포' 마을은 "시끄러운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맑은 공기와 파란 하늘과 녹음이 우거진 곳"입니다. 자연 속에서 사람과 동물이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곳이지요. 차오포 마을에는 '나무 사이 집 꽃차'라는 '아동심리 치료 센터'가 있는데요. 마음이 병든 아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이 이야기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리취안취안은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리취안취안은 처음으로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바로 거위에게 버림받은 슬픔이었다. 생각이 깊은 뚱보 거위는, 방금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와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는 손님 발빝에서 손님 신발에 묻은 먼지라도 털어 주듯 부리로 신발을 가만가만 쪼았다. 리취안취안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본문 중에서)

 

   과체중으로 걷는 일조차 버거워하는 아이, 거식증에 걸려 콩나물처럼 말라버린 아이, 부모와의 갈등을 폭력으로 표출하는 아이, 돈 세는 일에만 집착하는 아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물질적인 삶에 우선하는 도시 생활의 폐단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는 우리에게 편리한 삶을 제공해 주지만 상대적으로 정신적인 공허(空虛)를 달랠 여유를 박탈하지요. 이런 공허감은 이제 도시인의 기질 같은 것으로 굳어진 지 오래. 그래서인지 힐링을 부르짖고는 있지만, 글쎄요. 힐링마저 돈으로 사려는 세태를 보면 참 씁쓸합니다. 이런 어른들 사이에서 아이들이라고 멀쩡하겠어요?

 

   진상상은 처음으로 자기가 날마다 몇 번씩 세던 돈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진상상은 상자 속 돈을 바라보듯 아이아이 그림을 혼자 우두커니 바라봤다. 그러자 늙은 말 아이아이가 갈기를 휘날리며 마을 전체가 울리도록 콧김을 내뿜고 네 발굽으로 땅을 내디뎌 그림 속에서 뛰쳐나와 문을 박차고 마을 밖 푸른 초원으로 달려 나갔다. (본문 중에서)

 

   자연(自然)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안아줄 엄마의 큰 품과 같습니다. 뚱뚱하거나 말라비틀어진 모습, 남을 괴롭히거나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병든 마음을  편견 없이 받아들여주는, 자연이라는 거울은 아이들 각자의 본연의 마음을 그대로 비춰주는데요. 처음으로 자기 자신과 마주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마음의 빗장을 여는 법을 배워나가게 됩니다.

 

   리취안취안은 뚱보 거위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생각이 들자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 다리를 움직이지 않았다. 뚱보 거위도 리취안취안을 보더니 기다랗고 하얀 목을 쭉 뺐다. 그때 리취안취안은 뚱보 거위 눈 속에 담긴 것을 보았다. 뚱보 거위 눈 속에만 있는 그것은 지난 이틀 동안 리취안취안이 잃어버릴까 봐 걱정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거위 눈 속에 아직도 그것이 있는 것을 보자 리취안취안의 마음이 편안하고 잔잔해졌다. 리취안취안은 땅에 앉아 거위를 품에 안았다. (본문 중에서)

 

   아이들 스스로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이 소설은 자연(自然)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병든 삶을 이야기합니다. 진정한 힐링, 치유란 무엇일까요.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인정하고 마음을 여는 일. 치유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는 간단한 진실을 이 소설은 소박한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마음을 여는 일, 그것은 또 다른 세계로 디디는 작은 발걸음 같은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뚱보 거위와 늙은 말(馬)의 세계. 사람과 동물이 교감하고 친구가 되는 곳.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자연(自然). 그곳이 '하늘 언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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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사 에디션 D(desire) 5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장소미 옮김 / 그책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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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걷는다, 라고 피터 모르간은 쓴다. 소설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베트남 산골 출신인 "그녀"는 임신한 채 집에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계속 걸어요. 걷고 또 걷지요. "허기와 걸음이 톤레사프의 땅에 각인되며 멀리멀리 퍼져" 갈 때까지. 어떻게 하면 되돌아오지 않을까 궁리하면서. 길을 잃기 위해. "알고 있는 그 어떤 것도 더는 알아보지 않겠다는 자세"가 되어.

 

             허기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대체 어디서 멈출 것인가.  (본문 중에서)

 

   생명을 품은 그녀는 역설적이게도 죽어갑니다. 보이지 않는 저 배 속의 생명이 그녀의 피와 살, 생명력을 무섭게 흡수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배고픔은 끝이 없고 그 허기의 원천은 바로 저 배 속의 아이. "쥐새끼 같은" 뱃속의 아기가 자랄수록 그녀는 조금씩 더 죽어갑니다.

 

            전 여기 앉아 기다렸어요. 정확히 뭘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혹시 부영사님을 기다린 걸까요? (본문 중에서)

 

    '그녀'는 피터 모르간이 쓰는 소설 속 인물입니다. (피터 모르간은 누구일까요? ^ ^ )뒤라스는 이 소설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교차시키는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요. 피터 모르간이 쓰는 소설 속 '그녀', 그리고 캘커타의 프랑스 대사관을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가 끝없이 반복되는 돌림노래처럼 단조롭게 진행됩니다.

 

          땀이, 땀의 원천인 몸뚱이에서 철철 흐른다. 계절풍 동안의 이 무더위는 정말이지 사람을 미치게 한다. 더 이상 정신을 집중할 수 없다. 생각이 불타버리고 서로를 밀어내다가 공포가 모든 것을 잠식한다. 공포만이 남느다. (본문 중에서)

 

    캘커타는 죽음의 도시입니다. "무더위"와 "어슴푸레한 빛" "도무지 색깔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단조로움. 굶주린 거지와 문둥이들, 버려진 아이들의 도시이지요. 프랑스 대사관은 외딴 성처럼, 섬처럼 거기 있습니다. "살인적인 태양을 피해 덧창을 닫고" 집안에 갇혀지내는 창백한 사람들의 성. 고향을 잃고 떠도는 이방인들의 섬. 그들에게 남은 건 참을 수 없는 권태와 미지근한 공포 뿐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지요. 피터 모르간의 소설 속 "그녀"처럼. 길을 잃기 위해, 알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알아보지 않겠다는 자세가 되어.

 

            저 라호르의 부영사, 당신이 보기엔 약간 죽은 사람 같지 않나요? (본문 중에서)

  

    쏟아지는 햇볕 속에서도 창백한 이국의 유령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삶을 연기하는 그들은, 그래요, 그림자도 없이 떠도는 그들은 유령과 같아요. 죽음은 그들의 욕망과 희미한 기억마저도 앗아가 버렸습니다. 하품하듯이 불평하는 것으로 공포를 견디는 그들 사이에 '부영사'가 있습니다. 샬리마르 정원의 문둥이들과 개들을 향해 총을 난사한 부영사는 캘커타로 임시 배속되어 다음 발령지를 기다리고 있는데요. 프랑스 대사관에서 부영사의 존재는 이상한 열기를 퍼뜨립니다. 그는 누구와도 다른 인물이었기 때문이지요. 죽어간다는 의식도 없이 죽어간 그들과는 달리 생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표출한 저항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부영사의 존재를 통해 자기 안의 숨은 욕망과 활기를 갉아먹는 권태, 그리고 공포를 엿보는데요. 죽음을 일깨우는 부영사의 존재가 그들에게는 매우 불편합니다.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아요. 아무도. 지옥 같은 고독이지요. 제 생각에 여사님은, 그의 존재가 불러일으키는 말썽에 화내지 않을 유일한 사람입니다. (본문 중에서)

 

 

     부영사의 존재와 함께 부각되는 인물이 하나 더 있는데요. 프랑스 대사의 아내 안 마리입니다. 부영사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자기 안의 숨은 욕망과 공포를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부영사가 샬리마르 공원에 총을 쏘는 방식으로 생에의 갈망을 표출했다면 안 마리가 택한 방식은 상심(傷心)입니다. 밤의 무도회를 열고 여러 명의 정부와 쾌락을 나누는 안 마리의 퇴폐적이고 자조적인 욕망은 자기 자신을 둘러싼 절망적 현실을 인정하고 저항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읽을 수 있지요.

 

            한 사람이 기억을 떠올린다. 정원에서 그가 「인디아나 송」을 휘파람으로 불어. 마지막 사람이 이 「인디아나 송」을 기억하지. (본문 중에서)

 

 

     뒤라스가 직접 감독한 영화 《인디아송》(India Song,1975)의 원작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은 뒤라스의 여타 소설들에서도 드러나는 삶의 권태와 폭력성, 활기를 빼앗는 근본적인 허기...같은  "현재 삶 속의 죽음"을 그리고 있는데요. 고향에서 멀어지기 위해 걷고 또 걷고 끝없이 걷는 임신한 소녀와 캘커타의 프랑스 대사관을 둘러싼 인물들의 권태로운 몸짓을 교차해 보여주는 방식으로 무의미하고 공허한 돌림노래와 같은 생의 단면을 그려냅니다. 반복해서 읽다 보면 어쩐지 으스스해지는 그런 이야기지요. 뒤라스 특유의 문장, 건조하게 뚝뚝 끊어지는 단조로운 문장이 주는 독특한 울림과 위안이 그리운 이에게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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