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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사 ㅣ 에디션 D(desire) 5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장소미 옮김 / 그책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그녀는 걷는다, 라고 피터 모르간은 쓴다. 소설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베트남 산골 출신인 "그녀"는 임신한 채 집에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계속 걸어요. 걷고 또 걷지요. "허기와 걸음이 톤레사프의 땅에 각인되며 멀리멀리 퍼져" 갈 때까지. 어떻게 하면 되돌아오지 않을까 궁리하면서. 길을 잃기 위해. "알고 있는 그 어떤 것도 더는 알아보지 않겠다는 자세"가 되어.
허기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대체 어디서 멈출 것인가. (본문 중에서)
생명을 품은 그녀는 역설적이게도 죽어갑니다. 보이지 않는 저 배 속의 생명이 그녀의 피와 살, 생명력을 무섭게 흡수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배고픔은 끝이 없고 그 허기의 원천은 바로 저 배 속의 아이. "쥐새끼 같은" 뱃속의 아기가 자랄수록 그녀는 조금씩 더 죽어갑니다.
전 여기 앉아 기다렸어요. 정확히 뭘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혹시 부영사님을 기다린 걸까요? (본문 중에서)
'그녀'는 피터 모르간이 쓰는 소설 속 인물입니다. (피터 모르간은 누구일까요? ^ ^ )뒤라스는 이 소설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교차시키는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요. 피터 모르간이 쓰는 소설 속 '그녀', 그리고 캘커타의 프랑스 대사관을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가 끝없이 반복되는 돌림노래처럼 단조롭게 진행됩니다.
땀이, 땀의 원천인 몸뚱이에서 철철 흐른다. 계절풍 동안의 이 무더위는 정말이지 사람을 미치게 한다. 더 이상 정신을 집중할 수 없다. 생각이 불타버리고 서로를 밀어내다가 공포가 모든 것을 잠식한다. 공포만이 남느다. (본문 중에서)
캘커타는 죽음의 도시입니다. "무더위"와 "어슴푸레한 빛" "도무지 색깔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단조로움. 굶주린 거지와 문둥이들, 버려진 아이들의 도시이지요. 프랑스 대사관은 외딴 성처럼, 섬처럼 거기 있습니다. "살인적인 태양을 피해 덧창을 닫고" 집안에 갇혀지내는 창백한 사람들의 성. 고향을 잃고 떠도는 이방인들의 섬. 그들에게 남은 건 참을 수 없는 권태와 미지근한 공포 뿐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지요. 피터 모르간의 소설 속 "그녀"처럼. 길을 잃기 위해, 알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알아보지 않겠다는 자세가 되어.
저 라호르의 부영사, 당신이 보기엔 약간 죽은 사람 같지 않나요? (본문 중에서)
쏟아지는 햇볕 속에서도 창백한 이국의 유령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삶을 연기하는 그들은, 그래요, 그림자도 없이 떠도는 그들은 유령과 같아요. 죽음은 그들의 욕망과 희미한 기억마저도 앗아가 버렸습니다. 하품하듯이 불평하는 것으로 공포를 견디는 그들 사이에 '부영사'가 있습니다. 샬리마르 정원의 문둥이들과 개들을 향해 총을 난사한 부영사는 캘커타로 임시 배속되어 다음 발령지를 기다리고 있는데요. 프랑스 대사관에서 부영사의 존재는 이상한 열기를 퍼뜨립니다. 그는 누구와도 다른 인물이었기 때문이지요. 죽어간다는 의식도 없이 죽어간 그들과는 달리 생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표출한 저항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부영사의 존재를 통해 자기 안의 숨은 욕망과 활기를 갉아먹는 권태, 그리고 공포를 엿보는데요. 죽음을 일깨우는 부영사의 존재가 그들에게는 매우 불편합니다.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아요. 아무도. 지옥 같은 고독이지요. 제 생각에 여사님은, 그의 존재가 불러일으키는 말썽에 화내지 않을 유일한 사람입니다. (본문 중에서)
부영사의 존재와 함께 부각되는 인물이 하나 더 있는데요. 프랑스 대사의 아내 안 마리입니다. 부영사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자기 안의 숨은 욕망과 공포를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부영사가 샬리마르 공원에 총을 쏘는 방식으로 생에의 갈망을 표출했다면 안 마리가 택한 방식은 상심(傷心)입니다. 밤의 무도회를 열고 여러 명의 정부와 쾌락을 나누는 안 마리의 퇴폐적이고 자조적인 욕망은 자기 자신을 둘러싼 절망적 현실을 인정하고 저항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읽을 수 있지요.
한 사람이 기억을 떠올린다. 정원에서 그가 「인디아나 송」을 휘파람으로 불어. 마지막 사람이 이 「인디아나 송」을 기억하지. (본문 중에서)
뒤라스가 직접 감독한 영화 《인디아송》(India Song,1975)의 원작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은 뒤라스의 여타 소설들에서도 드러나는 삶의 권태와 폭력성, 활기를 빼앗는 근본적인 허기...같은 "현재 삶 속의 죽음"을 그리고 있는데요. 고향에서 멀어지기 위해 걷고 또 걷고 끝없이 걷는 임신한 소녀와 캘커타의 프랑스 대사관을 둘러싼 인물들의 권태로운 몸짓을 교차해 보여주는 방식으로 무의미하고 공허한 돌림노래와 같은 생의 단면을 그려냅니다. 반복해서 읽다 보면 어쩐지 으스스해지는 그런 이야기지요. 뒤라스 특유의 문장, 건조하게 뚝뚝 끊어지는 단조로운 문장이 주는 독특한 울림과 위안이 그리운 이에게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