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잠깐 설웁다 문학동네 시인선 90
허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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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한 번쯤 연락을 했다. 성의가 없다기보다 그저 우리끼리의 룰이라고 해야 하나. 언제부터 이런 심드렁한 룰을 정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고등학교 졸업 이후였던 것 같고, 그렇게 비슷한 성정의 아이들이 마흔이 넘어서도 여전히 그렇게 일 년에 한 번 연락을 주고 받는 것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걱정했다. 그러니까 P의 전화는 정기적으로 걸려오던 전화가 아니었다. 연말도 연초도 아니었으니.

 

P는 C의 남편 소식을 전했다. 부음이었다.

 

무척 바쁜 하루였다. 학교에서 그리고 또 다른 장소에서 회의가 있었다. 마지막 회의는 대충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집으로 가는 길, 택시에서 열차표를 예매했다.

 

목포로 가는 열차는 평일인데도 승객이 많았다. 심지어 기차표 예매를 잘못해서 유아동반실에 자리를 잡았다. 용산역에서 출발한 지 10분이 지났을까. 나는 생기 넘치는 아이들을 견딜 수가 없어 열차 승무원에게 요금을 더 지불하고 특실로 자리를 옮겼다. 특실은 승객이 많지 않았다.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C의 남편을 몇 번 만났을까. 십 년 동안 다섯 번이 넘지 않는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C를 생각했다. 그 녀석의 마음을 가늠할 길이 없다.

 

열차에서 자리를 옮기고 얼마가 지났을까 배가 고팠다. 그래서 생수를 마시고, 가방을 뒤졌다. 물렁한 초콜렛이 손에 잡혀 입에 넣었다. 이상하게 더는 슬프지가 않았다. 다시 가방을 뒤져 옷을 갈아 입을 때 찔러 넣은 시집을 꺼냈다. 이런 시간에 시집이라니.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상강

 

허은실

 

 

마지막일 것이다

한쪽 날개가 찢겨 있었다

북한산 비봉 능선

나비 한 쌍

서로 희롱하며

춤추고 있다

 

그 높고 아득한 공중을 나는

시기하였다

 

길바닥에는

가을 사마귀

풀빛이 갈색으로

그을렸다

가늘은 다리가

어디로 갈지를 몰라 하여

나는 잠깐 설웁다

 

곧 서리가 내릴 것이다

구애가 전 생애인

몸들 위로

 

 

장례식장에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친구도 있었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나를 알아보는 친구도 있었다. 그리고 이름도 얼굴도 알아볼 수 있는 C가 있었다. 무슨 말을 하나. 나는 말을 찾지 못했고, 말을 하고 싶은 의지도 없었다. C의 손을 잡았고 그게 다였다. 그렇게 몇 시간을 그곳에 앉아 있었고 새벽이 되어서야 나는 그곳을 나왔다. 오후에 서울에서 회의가 잡혀 있었다. 다시 첫 기차를 타야했다.

 

장례식장을 나서며 자주 연락하겠다는 내 말에 C는 하던 대로 하자고 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알았다고 했다.

 

피곤한 눈은 뜨거웠고 렌즈는 뻑뻑했다. 그래, 우리 하던 대로 하자.

 

 

마흔

 

허은실

 

 

니코틴 때문이 아닐지 몰라

내가 재떨이를 헤집는 이유

 

뜨겁다 몸들

퀴퀴하다

 

생살에 비벼 끄던

간절한 말들

 

나는 마지막 한 모금을

깊이 빨아들인다

 

입술까지 닿는 꽁초의

뜨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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