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중고서점에 책을 팔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알라딘 중고서점 직원들이 책을 평가하는 기준이라는 것이 뭐랄까 기계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물론 나만 그럴 수도 있고. 그러니까 낙서의 유무, 책 자체의 손상 정도, 구입여부(증정품은 제외되는 것으로 알고 있음), 구간과 신간, 알라딘이 보유하고 있는 동일 서적의 양 등이 해당 기준으로 보인다. 더 많은 기준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잘 모르겠으니 일단 이 정도. 물론 나는 지금 알라딘의 서적 매입 기준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방학을 맞아 어떤 퍼포먼스라도 하고 싶어 책장을 정리하고 더는 읽지 않을 것 같은 책을 골라냈다. 책을 골라낸 후 알라딘에 팔 수 있는 책과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하면 좋을 책을 나누는데, 기증으로 분류된 책들은 대체로 출판사에서  증정받은 책 혹은 선물로 받았으나 내 취향과는 먼 책들, 그리고 시집들이다. 기증에 해당하는 도서들은 내가 구매하지 않은 책이니 나도 그냥 내놓는게 자연스러운 것 같고, 시집이 기증물품으로 분류되는 이유는, 이건 정말 개인적인 이유이지만, 시가 돈으로 환산되는 어떤 느낌이 싫어서다. 쓰고 보니 더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여튼 그렇다. 그렇게 분류를 하고 나니 알라딘에 팔 수 있는 책이 많지는 않았다. 아참 이번에는 시집 한 권도 팔았다. 처음 있는 일이다. 그 시집은 팔아도 될 것 같았다. 시인을 향한 나의 복수는 이렇게 극도로 쪼잔했다.

 

그렇게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팔고, 천천히 알라딘 서가를 둘러보니, 오호~ 반가운 책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놀랐던 것은, 책 안쪽에 저자의 친필로 가늠할 수 있는 메모가 있었고, 그 메모의 내용이 심상치 않다는 것. 그런데 이 책을 받은 사람은 왜 팔았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알라딘은 이런 메모가 있는 책을 매입하나? 그것도 궁금했다. 그래서 망상에 가까운 공상으로 나는 뭔가 이 책이 내게 발견된 이유를 애써서 찾고 싶어졌다. 혹시 아니? 나는 이 책을 읽을 수 밖에 없는 운명 따위에 내몰린 것이.........

 

그렇게 완벽한 몰입의 상태로 책을 다 읽어갈 무렵 나는 이 책이 알라딘 서가에 꽂혀있는 이유를  발견했다. 단서는 저자의 글에서 찾았다.

책에서 읽은 다른 이의 말을 나의 언어로 둔갑시켜 차용하지 마세요. 다른 이의 말을 빌려서 내 욕망을 드러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그런 좋은 말들은 듣고 난 뒤 씹어서 뱉어 버리세요. 여러분이 지금 읽고 있는 이 책도 여러분의 말이 아닙니다. 읽고 나서 버리던가, 남을 주던가, 아무튼 몸 밖으로 뱉어 버리세요(p.267) 

 

오호~이렇게 자연스럽게 멋있는 사람들을 보았나. 순전히 내 추측에 추측을 더했지만, 정말 저 말 때문에 책의 주인이 이 책을 팔았다면 이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퍼포먼스인지.  그리고 기계적인 줄 알았던 알라딘 도서매입 직원의 작은 실수(?) 또한 얼마나 즐거운 퍼포먼스인지. 인간이 그리는 무늬들이 이렇게 재미나다니. 정말 별 일도 아닌 일로 혼자 키득거리는 나는 이 밤이 참 좋네.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오랜만에 몰입하니 사는 일이 재미있네요. 정말. 

 

아참, 엄한 소리만 하다가 책 이야기를 못했다. 글을 읽으면서 EBS다큐멘터리에서 봤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현생인류의 어떤 한 종족의 남성이 야생에서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의 모습. 조용히 손에 쥔 연장을 꽉 움켜잡고 일격을 가하려는 모습. 눈빛에서 느껴지는 결기와 그 민첩한 손동작. 저자의 글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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