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재계약을 할 때면 어김없이 집주인은 전세금을 올리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 행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세금은 어차피 세입자에게 돌려주어야 할 돈인데 그걸 뭐하러 그렇게 꼬박꼬박 올리는지, 추후 돌려줘야 할 돈이 부족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그런 푸념을 하니 잘 아는 선배가 하는 말. "너는 한번도 부자였던 적이 없어서 그 속내를 모르는거야, 돈을 굴려본 적이 없으니 그게 이해가 안가지."          그래. 나는 부자였던 적이 없다. 유년기에는 부모에게 얹혀 살았으니 그건 내것이 아니고, 지금은 말그대로 시장에서 노동력을 팔아야 쌀을 살 수 있는 상황이다. 이것 역시 누군가 내 노동을 사야 가능한 교환이고.        

 

역시나 권력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부려본 적 없는 힘의 짜릿함을 알 수 없다. 그저 상상할뿐이다. 상상력도 일천해서 어느 지점 이상은 나아가지도 못한다. 그러니 국가라는 권력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너무 크고 너무 멀어서 도통 한눈에 볼 수도 없는 그것을.          그렇지만 적어도 국가의 권력이란 '폭력의 정당화'가 아니라 '폭력과 정의'를 구별해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나는 배웠거나 믿는다. 물론 또다시 누군가 "너는 힘을 책으로 배워서 권력이라는 괴수의 이빨을 상상할 수 없지. 그 무엇이든 살아있는 것들의 목덜미를 한입 물었을 때, 이빨 사이로 번지는 그 비린내와 찰진 식감을 알 수 없지. 씹어본 적 없으니까. 그러니까 쉰소리는 그만하지"라고. 힘을 가져본 적 없으니 그래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힘에 의해, 권력에 의해 잘근잘근 씹혔던 사람이, 권력이라면 이제는 무서워서 오줌이라도 지려야할 것 같은 사람이, 도리어 국가권력이란 '폭력과 정의'를 구별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은수미국회의원이 그 사람이다. 그녀는 그녀만의 자세로 테러방지법에 반대하며 국회에서 10시간이 넘게 필리버스터를 진행했다.          기막히게 어쩔 수 없는 인간들에게 이가 갈려 멸종을 고대하는 나에게 그녀는 힘을 쭉빼는 감기약과도 같다. 그러니 할 수 없이 멸종을 고대하더라도 그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목소리가 닿는 곳에 함께 있겠노라고, 뭘 할 수는 없어도 그저 함께 있겠노라고, 어느 길목 어느 공원 딱 오십미터의 거리에서 나도 기다림의 자세를 취하겠노라고 다짐할 뿐이다.          긴 시간 들이마신 공기와 내뱉은 공기로 헛헛할 당신을 위해 허연의 시 한 편 보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자세

 

허연

 

 위대한 건 기다림이다. 북극곰은 늙은 바다코끼리

가 뭍에 올라와 숨을 거둘 때까지 사흘 밤낮을 기다

린다. 파도가 오고 파도가 가고, 밤이 오고 밤이 가

고. 그는 한생이 끊어져가는 지루한 의식을 지켜보

며 시간을 잊는다.

 

 그는 기대가 어긋나도 흥분하지 않는다. 늙은 바

다코끼리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먼바다

로 나아갈 때. 그는 실패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다시 살아난 바다코끼리도, 사흘 밤낮을 기다린

그도, 배를 곯고 있는 새끼들도, 모든 걸 지켜본 일

각고래도 이곳에서는 하나의 '자세'일 뿐이다.

 

 기다림의 자세에서 극을 본다.

 

 근육과 눈빛과 하얀 입김

 백야의 시간은

 자세들로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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