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후란 번역판 ‘우국’(미시마 유키오)은 이번에 처음 접했는데 인용 대목이 ‘전설’(신경숙)의 해당 부분과 거의 같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문장의 ‘뜻’만이 아니라 ‘표현’이 같고 그것들의 ‘배열’도 일치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 단락 전체가 거의 같아졌다. 같은 것을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 역시 그렇다.

‘문장’ 단위라면 몰라도 ‘단락’ 단위에서 또렷한 유사성이 우연의 일치로 발생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십 년 전에 처음 발표된 이 단편소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결과에 이르렀는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지 못한다. 과정이 어떠하였건 ‘우국’과 ‘전설’ 사이에 빚어진 이 불행한 결과에 대해서는 작가의 자문(自問)과 자성(自省)이 필요해 보인다.

다른 작품들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음을 안다. 회피할 일은 아니며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 그러나 논란과 무관한 많은 다른 작품들이 있다. 신경숙 작가의 뛰어난 작품들마저 부정할 수는 없으며 그 작품들에 제출한 상찬을 철회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작가가 이번 사안에 대해서 사과하고 이를 창작활동의 한 전기(轉機)로 만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많은 분들의 고언대로, 신경숙 작가의 책임을 묻고 끝낼 일도 아니다. 과거 한국문학에 큰 빚을 졌고 현재 문단에서 활동하는 한 사람으로서 나 역시 침통한 책임감을 느낀다. 한국문학을 조롱하는 일이 유행이 된 것처럼 보이는 때일수록, 더욱, 한국문학이 독자의 신뢰와 사랑을 회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찾아나갈 것이다.

2015년 6월 18일 신형철

 

 

신경숙작가의 작품을 읽지 않으니, 그녀가 표절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들리는 말, 쓰여진 글을 보니 문제가 있는 것 같고, 문제가 그저 의혹제기의 수준이 아님을 직관할 수 있을 뿐.

그 정도 정보를 갖고 신형철이 신경숙의 표절에 대하여 쓴 글을 읽었다.

 

음.............우선 밝히건데 나는 신형철의 글이 좋은 사람이다.

그의 문학비평이 좋았던 이유는, 다른 이들의 글에 비해 덜 폭력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건 순전히 내 기준이다. 물론 내가 덜 폭력적이라고 느끼는 부분에 대해 누군가는 미꾸라지 같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고, 기만적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형철을 제외한 평론가들이 폭력적이라는 것도 아니다. 매우 협소하지만 내가 아는 평론가들은 그저 다른 연장을 가지고 그들의 세계를 구축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연장이 그저 내게 무서워보였을 뿐.

그런데 신형철이 신경숙의 표절과 관련해 언급한 이글은 덜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정확하지 않다. 신형철의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27쪽을 보면

문학(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래서 훌륭한 작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 문법적으로 틀린 데가 없는 문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을 말한다.

라는 표현이 있다.

'신경숙', 또는 '표절'이라는 사건을 두고 문학이라는 영역에서 밥을 벌어먹는 사람이 이 상황을 저렇게 쓰는 것이 '본질'에 가장 가까운 글쓰기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알기 싫을 수도 있고. 여튼, 신경숙과 관련해 벌어지는 각기 다른 이해당사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떠올랐던 문장이 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미치게 하리라 -올더스 헉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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