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산맥은 강건하다. 땅에 가득히 꽂히는 여름의 빗줄기는 살아 있는 것들의 물 속 깊은 곳에 가두어진 비린내를 몸 밖으로 밀어내 뜰과 거리에 가득 차게 한다. 비오는 날은 거리에서 마주치는 엇갈리는 모르는 여자들도 비린내를 풍기고, 개집 속에서 대가리만 내밀고 빗줄기를 바라보는 우리집 잡종견조차도 생명의 날비린내를 주체하지 못한다." - 김훈, <풍경과 상처>
케이크를 사자 빵가게 소녀가 묻는다. 초는 몇 개 드릴까요?
아버지의 나이에 맞게 초를 달라고 하자니 꽂는 나도 보는 아버지도 지루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한 개를 달라고 했다. 어차피 한 해를 또 살아내셨으니 그거면 총분할 것 같았다. 그렇게 가족은 아버지의 생일을 핑계로 모였고 이제는 제법 커버린 조카들은 저마다 핸드폰을 들고 뭔가를 하느라 예전처럼 소란스럽지 않았다. 마당의 개도 짖지 않는 폭염이었고 조용한 생일잔치였다.
저녁을 먹고 거실에 모인 가족들은 TV를 보거나 새로울 것 없는 일상을 이야기했다. 에어컨이 뿜어 내는 차고 건조한 바람 덕분에 표정은 온화하였으나 그렇다고 딱히 행복한 얼굴들도 아니었다. 다들 시급한 문제가 있고 시급하지는 않더라도 복잡한 속내가 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알 것도 같지만 알 수는 없는 마음들이 떠돌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몽매하였으니 그렇게 퉁명스러울 것도 없는 밤이었다. 그저 아직 먹고 사는 걱정에 노출되지 않은 조카들을 바라보는 일이 유일한 즐거움인 그런 여름밤이었다.
언니와 올케는 아이들 이야기로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학교, 학원, 성적, 영어...... 둘은 점점 그들의 대화 속에 끌려 들어가고 있었지만 나는 어느 시간 이후로 조금 지루해졌다. 그래서 거실을 벗어나 주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냉장고에 차가운 맥주가 있는 것을 봐두었던 참이다. 맥주를 따서 한 모금 마시고 있으니 갑자기 거실이 조용해 진다. 평소에는 절대 들을 수 없는 엄마의 낮은 목소리. 니들 아이들 이야기 그만 할 수 없니? 어쩌면 그렇게 니들 밖에 모르냐?
이어 거실은 조용해진다. 그럴 필요 없는데. 그게 아닌데. 그냥 맥주 한 잔 마시고 싶었는데. 나는 이제 나갈 수도 없는 주방에서 서성인다.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들린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나는 다시 거실로 나간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여전히 묵찌바 놀이를 하고 있는 조카들에게 간다. 이모도 껴주라.
자정이 가까워지고 나는 이층으로 올라왔다. 창문을 열자 비린내로 치면 최상급일 바다 냄새가 묵직하게 몰려온다. 나는 항구에 가깝게 있음을 실감한다. 장마가 끝났으니 뜨거울 일 밖에 없을 것 같지만 이내 간간한 냄새 뒤로 헐겁게 따라 붙는 기운이 있음을 느낀다. 여름도 길 것 같지는 않다. 창문에 기대어 밖을 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마당으로 나오신다. 주무실 시간이 지났는데. 아버지가 이층을 올려다 본다. 나와 눈이 마주친다. 어서 창문을 닫으라는 손짓이다. 어서 자라는 얼굴이다. 그리고 마당에 있던 전자 모기체를 휘두르신다. 불빛이 튄다. 내 탓에 죽어나가는 모기가 여럿이다. 소리도 빛도 괴기스러운 모기체다. 나는 가만히 생각한다. 감전사가 잔인할까 압사가 잔인할까 아니 화생방이 잔인할까. 주린 배 한 번 채우자고 달려드는 모기 신세가 비장하기까지 하다. 창문을 닫는다. 애먼 목숨 그만 죽어도 되는 밤이기에.
김훈은 잡종견조차도 생명의 날비린내를 주체하지 못한다고 썼는데 내게도 그런 비린내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아버지가 왕성하게 윙윙거리는 모기에게 화풀이를 하시는 이유가 거기 있는지도 모른다. 딸에게는 없는 비린내. 여름 한 철 모기에서도 풍기는 그 비린내. 의도하지 않은 불효이지만 의도한 것 보다 강력하다. 김훈의 책 제목이 <풍경과 상처>였다는 것을 다시 떠올린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내가 작가보다 더 한 말들을 알고 있다 해도 그런 밤 이보다 적확한 말은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어느 날 당신도 나만큼 난처했었는지. 막막했었는지.
"저무는 연안의 선착장에는 낡은 어선 한 척 묶여 있고 갑판위에는 빈 소주병과 고추장 말라붙은 양재기 몇 개 뒹굴고 있다. 땅에 들러붙은 것들의 괴로움과 땅에 들러붙지 못한 것들의 괴로움은 결국은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저녁의 빛들은 정주하는 문명의 가장자리를 스치며, 개펄 위를 지나 바다로 나아갔다. 일몰의 서해에서는 시간의 빛깔과 공간의 빛깔이 구별되지 않았다. 말들의 구획이 무너지듯이 빛깔들은 서로를 향해 무너졌고, 건너갈 수 없는 빛의 다리가 와 닿는 선착장에는 누렁개 한 마리와 여자 한 명이 쪼그리고 앉아 저무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엉덩이를 깔고 앉아 허리를 곧추세운 개의 뒷모습과 무릎을 세우고 쪼그리고 앉은 여자의 뒷모습은 형제처럼 닮아 보였다. 그것들은 바다 앞에서 쪼그리고 앉은 포유류들이었다."-김훈, <풍경과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