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27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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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준 것인지, 누구에게 그냥 줘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이응준의 책을 다시 샀고, 다시 읽는다. 어쩌면 놓쳤을 수도 있고, 지금에서야 혼자 오해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아득하게 앉아 이응준의 책을 읽고 있었을 한강을 떠올려본다. 이 책에 수록된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이라는 단편이 허망한 추리의 근거라면 근거다.   

책을 옆에 두고 조카에게서 얻은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다 굴린다. 가늠할 수는 없지만 납득되는 숫자가 허공을 향한다. 다시 던진다. 역시나 그럴 수 있는 숫자가 내 앞에 놓인다. 반복할 수록 우연이 필연적인 숫자들의 조합으로 엮여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사람들의 조합도 그러할 수 있을까. 우연이지만 필연적인 조합. 이응준을 한강을 그리고 나를 우연이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조합으로 묶는다면, 그 필연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아마도 '실재하며 작동중인 쓸쓸한 것들의 조합' 이 되지 않을까.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두고 힘빠지는 이야기를 얼마나 오래 했는지 이제 기억도 멀다. 단지 써야하기에 쓰는 것,이라 말하며 서둘러 자리를 떴고, 써야한다는 그 말의 울림이 그저 먹먹해 집에 오면 으레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곤 했다. 무엇인가 써야함에도 어떤 단어도 이어갈 수 없는 막막함. 치부와 상처가 활자로 떠돌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 같은 근거없는 두려움이 도시의 불빛처럼 밤에도 잠을 막아섰다. 그럼에도 겁쟁이가 숨어들 공간이 있을 수 없는 것 처럼 '실재하며 작동중인 쓸쓸한 것들의 조합' 들은 매번 활자로 떠돌며 나를 찾아낸다. 떠돌아야 한다고, 가벼이 떠돌아야만 한다고 최면을 건다. 서로가 서로에게. 살아야 한다는 말 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말이다.  

"음지는 양지를 탐하여 흉내낼 때 가장 어둡고 축축해 보이는 법이니까. 너는 온갖 세상사에 얽혀 있는 듯 행동하곤 했지만, 실은 언제나 너 홀로 자신에게 골똘했을 뿐이었다. 나는 곧 너를 완전히 이해하겠다는 희망을 포기하였고, 그 대신 너의 전체적인 존재감을 얻어낼 수 있었다. 더불어 네가 어째서 나에게 느닷없이 손을 내밀었던가도 깨달았다. 너는 내가 너처럼 병들었다는 사실을 동물적으로 간파했던 것이다. 그림자 같은 그림자에게 드리우길 원한다. 그거였다."<Lemon Tree 中>

작가가 그려낸 인물들은 타자를 염두한다기 보다 독백으로 일관하고, 흘러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시간은 어디 쯤에서 단절되어 있다. 줄거리를 기억하기에는 모호한 추억들로 채워진 사람들이다. 책은 각각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기 다른 인물들이 출몰하지만, 한 명의 주인공이 다른 공간을 오고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책은 몇 편의 단편속에 묘사되었던 푸른 안개속을 더듬는 듯 하다. 물가의 새벽을 체험한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는, 시리고 명징한 그렇지만 힘이 빠진 안개속을 허위허위 내저으며 걷는 기분이다. 물리적으로 큰 힘이 아님에도 진을 빼고야 마는 그런 경험. 삶이 반드시 기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어느 주인공처럼 삶이 반드시 기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자의 지친 새벽같은 소설이 바로 이응준의 소설이며, '실재하며 작동중인 쓸쓸함'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소설이 바로 이 책이다.

"엉뚱한 얘긴지 모르겠지만, 기실 우리네 삶은 수채화가 아닌 유화가 아닐까. 성숙한 인간이라면 우선 세상의 바탕을 마땅히 고통스럽고, 슬프고, 쓸쓸하고, 외로운 곧 어둠의 색으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대신 살아가는 동안 내내 점차 희망이나 보람 같은 것들을 대변할 만한 밝은 색깔들을 스스로 찾아내어 그 비관적인 인식 위에 덧칠하며 제 평생의 아름다운 그림 한 장을 완성시킬 것!" <내 가슴으로 혜성이 날아들던 날 밤의 이야기 中> 

이 푸르고 외로운 별에서 내가 태어난 순간, 나는 앞으로 얼마가 될 지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 숨쉬는 한 춥고 쓸쓸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울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를 바라보던 내 부모의 눈은, 너를 만나 다시 뭔가 잘해보리라는 마음이 들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우리는 외로웠으리라. 그렇게 우리의 쓸쓸함은 무성해졌으리라. 그러나 세상에 알려진 죄와 알려지지 않은 죄를 모두 저지르고 난 오늘, 어느 문지방에서 돌아보니, 문득 그 모든 것들도 '추억의 속도로 걸어가고'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전히 뒷모습은 보이지만, 꼭 그 날의 새벽처럼, 푸른 안개속으로, 무성하고자 했던 욕심들과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두려움마저 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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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9 16: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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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0 11: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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