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와 나는 더이상 사랑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정녕 언제일지 모르지만, 언젠가 우리의 기억이 시가 되려면 우리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가을이 물러나는 자리, 겨울이 어느 자작나무숲을 돌아 사이렌을 울리며 우리를 덮치는 날이 그리 멀지 않음을 느꼈을 때, 우리는 사랑을, 아니 지나간 과오를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었다. 올려다 본 하늘은 높고 시렸고, 그 순간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시가 되지 못한 이야기들을 받치고 있는 가슴에 쥐가 나는 날에는 무엇이라도 해야 했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에 더는 머리에 꽃을 꽂은 소녀들이 뛰어다니지 않지만, 우리가 그렇게 미치고 싶었던 날들에는 우리를 포함한 모두가 머리에 꽃을 꽂았다고 나는 말했고, P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었다고, 그랬었다고 너도 나도 오롯이 기억하고 있다고 희게 웃었다.   

그렇게 술도 아닌 뜨거운 차를 나누며 P는 내게 말했다. 그시절 나는 네가 무서웠노라, 네가 쌓아가는 그 무엇이 무서웠노라고. 

나는 P에게 말했다. 그시절 나는 진저리나게 추웠고, 불을 지피면 살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장작더미를 내 키보다 높이 쌓았고, 키보다 높이 쌓다보니 하늘을 가렸다고, 그러나 정작 나는 성냥이 없었노라고, 성냥 없이 벌벌 떨며 장작을 쌓았노라고, 그저 장작만 쌓았노라고, 그러니, 내가 쌓은 것은 장작이 아니라 무덤이었노라고. 그리고, 

나는 성냥, 성냥, 성냥이, 사랑인 줄 알았노라고. 

단풍 하나 물들이지 못하는 내가 미쳐서 날뛰기만 했던 날들이 이제는 부끄러워, 이제는 부끄러워 정작 찾은 성냥을 분질러버렸다고 나는 울었고, P는 그렇게라도 살아줘서 고마웠노라고 했다. 가끔은 내 장작더미를 뒤에서 받치고 있었노라고, 불타지 않는 장작더미를 그렇게 받치고 있었노라고 했다.

고백이 떠도는 시절, 우리의 고백은 그 무엇 축에도 끼지 못하겠지만, 너는 나였고, 나는 너였고, 우리는 무수히 많은 우리였다는 고백들이 은행나무 아래로 흩어졌다. 거름도 되지 못할 고백이기에 아스팔트 위로 떨어져 나뒹굴어도 딱히 서럽지 않았다. 

더는 누구의 비명도 채집하지 않음을 고백하는 오늘, 그대, 그리고 또 그대들, 내품에 안겨 사랑이 성냥인줄 알았던 그시절, 그시절 못다했던 꿈 나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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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 2010-11-15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다보니, [담]이 생각나 장작더미 너머로 성냥 대신 꽃 한 송이 던져 봅니다.
꽃 한 송이에 장작이 무너지기도 하지 않을까 싶어서...

굿바이 2010-11-15 19:32   좋아요 0 | URL
고마운 마음, 잘 받을께. 염치없지만 잘 받을께^^

風流男兒 2010-11-15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지만, 제가 만약 그 장작을 보고있었더라면 분명 어디서든 성냥을 찾아서 누나 옆에 두었을 거에요 아주 몰래 말이죠.

굿바이 2010-11-15 19:35   좋아요 0 | URL
음...자나깨나 불조심!! 설마속에 화재있고, 조심속에 화재없다!!ㅋㅋㅋ

동우 2010-11-16 0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의 글을 읽고서 유제하의 노래를 들으니.
노래의 저 진부함이라니.

굿바이님.
글만 남겨 놓으세요.

굿바이 2010-11-16 11:08   좋아요 0 | URL
이런 말씀, 매번 받기만해서 너무 염치없습니다. 잘지내시죠? 변덕스러운 계절 항상 건강하세요.

도란도란 2010-11-18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굿바이님!^^ 알찬 서재 잘 구경하고갑니다
저는 이음출판사에서 나왔어요~
저희가 이번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를 연일 차지하여 화제가 되고있는 도서
<모터사이클 필로소피> 한국판 출판 기념으로 서평단을 모집하고있거든요^^
책을 사랑하시는 굿바이님께서 참여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리플 남기고가네요
저희 블로그에 방문해주세요~! :)

굿바이 2010-11-22 11:28   좋아요 0 | URL
먼저 허접한 글들 읽어주시고, 또 이렇게 좋은 제안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모터사이클 필로소피>는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책이었습니다. 서평단은 다른 분들이 더 훌륭하게 하실 것 같아서 신청하지는 않지만, 책은 기회가 되면 사보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출판하시길 바랍니다.
건승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