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을 잃었다. 정확히 도둑맞았다. 신고를 했다. 지구대에서 순경이 왔다. 진술서를 쓰기 위해 지구대에 갔다. 경찰차를 탔다. 경찰차는 안에서 열 수 없는 구조였다. 그래서 오랜만에 남자가 열어주는 차에서 내렸다. 좋아할 것이 없는 순간 나는 이런 것을 위로라 생각했다. 이 사건을 두고 사기인지, 강도인지 경찰관들끼리 잠깐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았다. 상부에 전화를 해서 무슨 코드같은 것을 받아적고 진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묻는다. 답했다. 사건의 정황을 묻는다. 되도록 시간과 사건을 정확히 전달하려고 애썼다. 지갑의 상표를 묻는다. 기억나지 않는다. 내용물을 묻는다. 돈과 상품권, 카드와 쿠폰, 그리고 사진.... 나는 사진이라고 말하는 대목부터 목이 메인다. 유일한 사진, 엄마와 아빠와 내가 부산에서 찍은, 아주 어린 굿바이가 빨간 털모자를 쓰고 찍은 유일하게 행복해 보이는 사진인데, 나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리고, 세례성사때 받은 성모상 팬던트가 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또 나는 울컥거렸다. 그 팬던트는 참 오랜 시간 나를 위무했던, 내 유년시절 갑자기 집안에 노란 딱지가 붙거나, 밤기차를 타거나, 학교를 휴학해야 하는 기간동안 나를 달랬던 것이었다고 하려니 기가 막힌다.
황군에게서 받은 10년이 된 쪽지가 있다고 하려니 다리가 휘청인다. 황군이 준 쪽지가 내게 얼마나 대단했는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거나, 의심을 당하거나, 억울한 순간, 무슨 타이레놀처럼 나를 진정시켰던 것이었다고 말하려니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지금은 저세상으로 떠난 친구가 건네준 외국 화폐가 들어 있다고, 살아보겠다고 태평양 건넜던 친구랑 반씩 나눠가졌던 2달러 화폐가 있다고, 조카가 글씨를 배워 처음 써준 메모지가 있고, 부도난 회사의 명함이 있고, 외국으로 도망간 선배의 연락처가 있고, 이혼하고 잠수 탄 친구의 주소가 있고, 함께 좋은 세상 만들자며 건낸 카드가 있고......
그러나 진술서에는 현금과 상품권의 액수만 기입되었다. 명품이 아닌 지갑은 그저 빨간 지갑이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 많은 것을 갖고도 허기져했다. 복수는 늘 이런 식이다.
아니 깨달음은 또 늘 이런 식이다.
바람 좋은 날, 바람 빠진 마음으로 더듬는다. 잃어버린 것들과 아직 남아있는 것들을.
세속은 늘 이렇다. 어긋나는 모든 것들이 물결치는, 하루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