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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털리 부인의 연인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5
D.H. 로렌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평점 :
주제의식이 매우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책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은, 아마 산업사회의 폐단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새로운 관계를 제시한 작가의 노력때문일 것이다. 관계라는 것이 아름다운 점도 있고, 위안을 가져다 주는 부분도 있지만, 이것 또한 또다른 방식의 억압이라는 것을 체험하다 보니 그것말고 뭐 다른 것은 없나,하는 생각이 계속 차고 올랐다. 그렇지만 어찌되었건 이 작품을 두고 외설 논쟁을 벌이거나 에로티시즘을 운운하는 것은 매우 소모적인 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무엇이 아쉬웠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럴 근거가 별로 없거나, 있다고 치더라도 충분하지 않아 보였다.
시대적 배경이 1차 세계대전 이후고 공간적 배경이 영국이다 보니, 작가의 눈에 비춰지는 산업화의 속도나 돈에 미쳐가는 사람들의 모양새가 역겨웠으리라. 2010년을 사는 내가 느끼는 욕지기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할 것은 하나도 없었으리라. 그 마음이 클리퍼드를 하반신 불구로 설정했을 터이고, 코니와 멜러즈를 자연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는 성정으로 설정했으리라. 작위적이기는 하지만 납득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임에는 틀림없었다. 또한, 계급의 상층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이나 하층민이나 모두 돈에 미친 아귀같은 존재로 그려내는 대목은, 가난하거나 억압당하는 자들은 선량하고 순박할 것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데올로기, 즉 검증되지도 않았고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사실무근인 헛소리들을 쏟아내지 않았다. D.H 로렌스라는 작가의 위대함은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아닐까 싶다. 인간은 걸치고 있는 옷, 먹는 음식, 사는 집과 무관하게 누구나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며, 심지어 이기적인 존재다. 물론 간혹 이타적인 인간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이는 매우 제한적인 상황에서 존재하는 극소수다. 따라서 쓸데없는, 심지어 허구적인 감상에 빠져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을 외면하는 작가는, 혼나야 한다. 매우.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훌륭한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자꾸 나는 그 사랑이라는 것, 좀더 협소한 의미로서의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것이 다 뭣이다냐,하는 생각이 들어 책과 무관하에 계속 곁가지만 치고 있었다. 언제나 잿밥에만 눈이 돌아가는 이 꼬라지는 언제쯤에나 바뀔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리석게도 나는 한때 사랑이라는 것에, 또는 신념이라는 것에 내가 가진 알량한 것들을 몽땅 걸었던 적이 있었다. 늙어서 병들어 죽는 것이 한심해 보여, 싸그리 그리고 아쌀하게 사랑이든, 일이든, 뭣이든 해야 직성이 풀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 얻은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 내가 허망하다고 지껄이던 목숨이라는 것을 혹은 내가 가진 몇 푼 안되는 돈과 이력과 온전하다고 믿었던 감정들을 그렇게 꼭 다 걸었어야만 했던 것일까. 이제와 돌아와 거울앞에 선다는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가슴 철렁했던 시절의 모퉁이를 돌아 헛헛한 마음으로 골방에 들어앉아 보니, 허망하다고 말했던 것들이 정녕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허망하기 때문에 지켜야 했던 것이 나였는지, 허망하기 때문에 버려야 했던 것이 나였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책 표지의 그녀, 코니의 뒷모습은 이쪽이 아닌 저쪽으로 가라는 표지 같았지만, 내 깜냥에 이미 강을 건너버린 것 같은 마음은 또 다른 저쪽이 어디인지 이제는 가늠할 수가 없다. 그저 길을 잃고만 싶었던 청춘은 이제 정말 길을 잃은 셈이다. 아,아,아, 채털리 부인의 연인쯤은 아니더라도 선운사 동백꽃 지는 날, 같이 울어줄 사람 하나 있었으면. 아,아,아 푸른 달빛 부서지는 밤 담벼락 아래서 그렇게 가만히 곁에 서 있어줄 사람 하나 있었으면. 오다가다 오도가도 못할 마음 하나가 채털리 부인 앞에서 서성이는 그런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