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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맥주 한 모금
필립 들레름 지음, 정택영 그림, 김정란 옮김 / 장락 / 1999년 12월
평점 :
절판
급할 것 하나 없는 책을 너무 빨리 해치워버렸다. 습관처럼 게걸스럽게 활자에 들러붙어 단어와 단어 사이의 간격을 무시하는 나는, 오히려 천천히 연필을 놀리며 나아가는 들레름의 속도를 따라 갈 수 없었다. 그렇지만 책을 덮는 순간, 철 지난 놀이공원에 흘려놓은 내 추억들은 느린 멜로디에 맞춰 빙빙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멈춰야 한다. 그것들을 더듬기 위해서라면. 지금 나는 멈춰야만 한다.
언제부터였을까? 감각의 사냥을 포기해 버리고 되려 느림을 따라 잡을 수 없게 된 것이.
풍경을 음미하고, 사물의 냄새에서 빛깔에서 사실 그 이상의 것들을 포획할 수 있었던 말랑말랑했던 시절은 도대체 언제 끝나버린 것인지 기억조차 불분명하다.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과 사물들이 던지는 개별의 주파수를 감지해 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도시는 뷰파인더로 보는 사람들, 이어폰으로 듣는 사람들, 전광판 밑에서 쉬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반강제적으로 말랑거리는 감각들을 박탈당해 버린 지금, 나는 무엇도 볼 수 없고 어떤 것도 들을 수 없다.
작가의 말처럼 마지막 햇살이 잠들어 있는 얼음처럼 차가운 오디 샤벳, 지하실에서 올라오는 쪼글쪼글해진 사과향기, 첫 맥주 한 모금의 통쾌함, 물에 젖은 에스파드리유의 축축한 느낌, 성글게 짜인 스웨터의 푸근함을 올곧이 알아채는 일은 삶을 반짝거리게 하는 능력이다. 그것들을 모조리 잃어 버린 이 밤, “멜랑콜리가 쳐들어 온다.”고 쓴 작가처럼, 어디로 끊임없이 내몰리고 달려야만 하는 내 목구멍 깊숙이 오늘 멜랑콜리가 쳐들어 왔다.
책을 읽으며 작가의 날렵한 문장, 따뜻함이 묻어나는 은유, 달콤한 단어, 문장을 깨끗이 자르는 호흡, 어디서도 훔쳐 본 적 없는 사유에 나는 오랜만에 행간의 틈바귀에서 쉴 수 있었다.
책의 제목이자 소제목의 하나이기도 한 [첫 맥주 한 모금]에서 저자는 “첫 잔은 목구멍을 넘어가기 전에 시작된다………동시에 우리는 알고 있다. 가장 좋은 기쁨은 이미 맛보아 버렸다는 것을.”이라고 쓰고 있다. 맥주 한 모금이 전하는 짧지만 강렬한 기쁨을 통해 삶의 의미를 환기시키는 작가의 관능적인 글쓰기는 너무 많은 질문과 절망으로 끓어오른 머리를 식혀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사물의 단면을 꼼꼼히 살피는 작가처럼, 나는 태아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아 내 기억의 단면을 찬찬히 살폈다. 비누방울처럼 팡팡 터져 붙잡을 수도 붙잡아서도 안 되는, 이미 맛보아 버린 내 작은 기쁨들.
한 겨울 밤 아버지의 점퍼 속에서 쏟아져 나온 축축한 호빵, 달달한 오뎅국에 데인 입천장, 언니가 그린 만화를 팔아서 모은 500원의 묵직함, 오빠의 자전거에서 나던 소음, 여름날의 소독차가 뿜어낸 연기, 가로등 아래서 만난 아찔한 목련의 그림자, 푸른 담벼락를 등지고 촌스럽게 울어버렸던 첫 키스, 누군가를 기다리던 코스모스 핀 익산역, 수술 후 깨어나 처음 보았던 울어서 엉망이 된 그 남자의 충혈된 눈……….
오늘처럼 녹슨 감각기관이 되살아 나는 날에는 잠시 멈출 수 밖에 없다. 오늘, 제대로 멜랑콜리가 쳐들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