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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1
윌리엄 포크너 지음, 김명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평점 :
이 책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주인공 애디의 죽음을 통해 한 가족이 겪는 일련의 감정적 변화와 사건들을, 각기 다른 주인공들의 독백으로 전달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죽음이라는 한 사건을 두고 단일한 관점이 아닌 다원주의적 시선을 통해 설명하려는 노력은, 대체적으로 모던이즘이 지배하는 시절을 살았던 작가에게 실로 대단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이 쓰여진 시절을 감안하면, 물론 미국문학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관계로 정말 대충 더듬어 보면, 분명 형식적인 면에서는 혁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작가의 역량은 형식적인 실험에만 머무르지 않고, 난해함과 방관자적 입장이라는 변수를 끌어들여 신비로움과 처연함까지 덧붙였다. 실로 명민한 작가다. 그러나, 2010년을 살아가는 독자로서, 어찌나 실험적인 책들이 쏟아지는 시대를 살아가는지, 더 나아가 실험적이기만 하고 건질것은 없는 책들이 쏟아지는 시대를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이제 이런 부류의 책들을 읽는 일이 그리 달가운 과정만은 아니었음을 미리 밝힌다.
그렇지만, 구조가 갖는 답답함과 난삽함은 그저 내 게으름이나 무지를 탓하면 될 문제고,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살펴볼 필요는 있다. 서경식의 책 「끊임없이 진실을 말하려는 의지-에드워드 사이드를 기억한다」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사이드는 "멸망할 운명임을 알고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거의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진실을 말하려는 의지"를 표명했다. 마치 한 편의 시와 같은 말이다. 서경식의 진술을 들여다보며, 작가가 말하려는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나는 멸망할 운명임을 알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을 [절망]이라고 이해했었고, 승산이 없는데도 계속해서 진실을 말하려는 의지를 [조롱]이라고 이해했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서경식의 책을 떠올렸던 까닭은, 책 전반을 통해 작가가 말하려고 한 것이 [인간에 대한 절망]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며, [절망]이라는 메세지를 전달하는 작가의 자세를 [조롱]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들 중 그 어떤 일도 하지 않는 아버지, 죽은 부인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해 벌어지는 모든 성가신 일들을 타인과 아들들에게 맡겨버리는 남편, 큰아들이 다리를 다치자 병원으로 향하는 대신 다친 다리위에 시멘트를 붓는 아버지, 또 다른 아들의 가장 아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팔아버리는 아버지,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방관자로 것돌고, 심지어 부인을 매장한 후 바로 머리를 빗고 옷을 단정히 입고 새 여자를 맞아들이는 아버지이자 남편인 앤스에게 작가는 어떤 판단의 잣대도 들이대지 않는 듯 보인다. 작가는 '저 놈은 원래 저런 놈이고, 저런 놈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으며, 인간은 사실 다 저런 놈일 수 있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혹은 부성애라는 사람들의 기대는 이데올로기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겠어?' 정도의 썩소를 날릴 뿐. 물론, 앤스의 세째 아들인 주얼이 앤스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따라서 앤스가 오쟁이진 남편이라는 정황을 살짝 흘려보내며, 잠시나마 앤스를 비웃어 주는 태도를 취하기도 하지만 글쎄....앤스가 부인의 부정을 알았던들 괴로워나 했을까! 되려 그것을 핑계로 철저히 노골적으로 군림하지는 않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작가 윌리엄 포크너는 "이 소설은 나를 일으켜 세우거나 거꾸러뜨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이후 행보를 보았을 때, 이 소설은 그를 일으켜 세운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작품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면, 또한 인간에 대한 성찰이라는 것이 무심하게 풍경을 바라보듯 이루어 질 수 있었다면, 그는 작가가 아니라 神이 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인간을 조롱할 수 있는 것은, 실은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내가 이 책을 덮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인간에 대해 '어떻게?" 혹은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것 뿐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나는 김훈을 꽤나 닮아가고 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