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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미셀러니 사전 - 동서양을 넘나드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앤털 패러디 지음, 강미경 옮김 / 보누스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듣는 모든 말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견해일 뿐이며
우리가 보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아우렐리우스
정조(正祖)시대에 문체반정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한문의 문체를 순정고문(醇正古文)으로 되돌린다는 의미로 소품, 소설, 고증학처럼 고문과 다른 이질적인 언표들을 ‘바른 곳으로 되돌린다’ 라는 취지가 담겨있다. 조선 역대 왕들 중 가장 지적인 왕이라고 지목될 정조가 이와 같은 정책을 표명한대는 당파간의 미묘한 정치게임의 논리도 숨어 있겠지만, 더 나아가 문체가 갖는 중요성 즉, 한 시대의 사유체계이자 지식인들을 옥죌 수 있는 도구라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중세적 사유체계를 벗어 날 수 있었던 소품과 소설들이 규제되고, 조선 후기 문학은 일정부분 퇴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역사 미셀러니 사전]을 읽으며 불현듯 문체반정이 생각난 이유는 저자의 집필 동기에 있다. 저자는 머리말에 “나는 내가 동의하지 않거나,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거나, 또는 지루하다고 느끼는 내용은 모두 생략했다.” 라고 밝히며 “이 방법론들은 흥미와 관심유발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내용만 다룬다.”라고 적고 있다. 나는 '과연 역사서가 작가의 의지에 따라 마음대로 재단되어도 무방한가'라는 의문과 '21세기에 역사서는 새로운 형식의 문체들로 바뀌어야 하는가'라는 명제에 선뜻 답을 내리지 못하고 정조와 연암 박지원을 떠올리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무수히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자연사, 문화사, 생활사, 과학사라는 소단원으로 묶어 작가가 의도한 것처럼 거의 모든 것들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거의’ 다. ‘거의’ 는 말 그대로 ‘어느 한도에 매우 가까운 정도’다. 따라서 이것은 어느 한도에 매우 가깝기는 하나 그 한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한도의 어디까지가 매우 가까운 정도인지도 모호하다. 하여, 우리의 영리한 작가는 ‘nearly’라는 단어를 통해 이 책 한 권에 쏟아질 수 있는 비난을 교묘히 비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과연 그럴까. 큰 어려움 없이 책을 읽어 나가던 도중 책의 머리말에서 느꼈던 당혹감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 부분이 나타났다. 다름아닌 책 105쪽의 인쇄술에 대한 설명이다. 작가인 엔털 패러디가 쓴 글을 보자. “700년경 목판 인쇄술이 일본에서 개발되었다. 이 기술은 한국에서 개발된 활판 인쇄술과 같은 형식이었다. 1450년대 에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개발했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위의 문장을 읽어 보면 목판 인쇄술은 일본, 활판 인쇄술은 독일이 최초인 것처럼 읽히기 쉽다. 내 눈에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읽힌다. 그럼 사실은 어떻게 다른가!
첫째, 이것은 1337년에 간행되어 실물이 전하는 금속 활자본 “직지” 를 언급하지 않아 여전히 금속 활자는 서양에서 먼저 발명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둘째, 일본의 “백만탑 다라니경”보다 20년을 앞서는 우리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을 언급하지 않아 목판 인쇄술 역시 일본에서 먼저 시작된 것처럼 읽힌다.
물론, 혹자는 내 의견이 신경증이며 열등감이라고 말하거나 빗나간 애국심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난히 책에 대한 관심이 많고 글을 쓰고 싶은 사람으로서 자국의 인쇄술에 대한 역사적 자부심에 흠집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은 피할 길이 없었다.
여기서 나는 작가가 머리말에서 밝힌 의도를 다시 되짚을 수 밖에 없다.
“나는 내가 동의하지 않거나,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거나, 또는 지루하다고 느끼는 내용은 모두 생략했다.” 라는 부분이다. 내가 보기에 인쇄술과 관련한 우리의 유물은 그가 동의 할 수 없거나, 마음에 들지 않거나, 지루하기 때문에 생략한 것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책에는 이 밖에도 빠져나간 것들이 많아 원래의 모습을 제대로 상상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책의 기술방식에 박수칠 수 없으며, 작가의 말처럼 앞으로의 역사서는 미셀러니와 패러디의 형태로 발전할 것이라는 말에도 동의할 수 없다. 이 책에 대해서 만큼은 나는 정조의 문체반정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작가가 취한 태도는 연암 박지원의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한 부분을 문제 삼아 전체를 다 잘못이라고 말 하는 것 역시 일반화의 오류다. 하여 이 책 일부의 미흡한 점을 들어 전체를 깍아내릴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작가는 자신의 책에 일정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기는 책은 더욱 그렇다. 여타의 유용한 정보들이 있음에도 내가 이 책을 경계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아우렐리우스의 이 말로 이 책의 서평을 갈음할까 한다.
“우리가 듣는 모든 말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견해일 뿐이며, 우리가 보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