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마음에 와닿은 무엇"
"파종은 전선이다. 한치의 땅도 묵히지 말자"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 "모두다 속도전 앞으로" "천리마를 탄 기세로 달리자"... 현대사의 한장 한장을 구호의 연속이라 해도 될만큼 구호에 매달려 살아온 사람들. 삶의 순간순간을 체제를 위해, 아니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죽을 각오로 매달리며 살았을 사람들. 그들의 절박함. 읽는 내내 '구호 아래서' 또는 '구호에 의지해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생각했다. 그들이 말하는 정치며, 사상이 그들 각자에게 무엇일지를 헤아려보면서.
사실 완성도보다 출간 자체의 의의가 더 큰 책이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또는 '주체의 나라'로 보는 극단을 경계하고 균형을 잡는데 초점을 두고 있어, 뚜렷한 시각이 드러나지 않는 아쉬움도 있다. 그럼에도 여기에 이 책을 가져온 이유는, 이 책에는 북한을, 북한 사람들의 삶을 헤아려보게 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 다닐 때 북한정치사나 한국정치사 같은 과목을 수 차례 들었지만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북한 사람들의 절박한 삶'이 비로서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 숱한 어려움을 겪고도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라니... 국제정치니 경제니 하는 말보다 먼저 그 구호를 절박하게 외치고 있을 누군가가 떠오른다. 그래서 아프고, 화나고... 미안하다.
사회.역사담당 김현주(realsea@aladin.co.kr)
"비밀과 거짓말"
폭스 이블미네트 월터스 지음, 권성환 옮김 / 영림카디널
논스톱으로 새벽 4시까지 읽었다. 다음날이 휴가이기도 했고 쉬이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다. 확실히 영국 여성 추리작가들의 작품은 디테일과 묘사가 훌륭하다. "영국의 시골에선 세상의 모든 일이 다 벌어질 수 있을 거 같아요, 아, 마플 할머니 때문인지 영국 시골마을은 범죄소굴 같아요." 이런 잡담을 잠시 하기도.;;
2001년 영국 셴스테드, 서너 가족만이 상주하고 도시 사람들의 주말 별장만 빼곡한 작은 시골마을이다. 어느날 한 저택의 안뜰에서 제임스 로키어-폭스 대령의 부인 에일사가 얼어죽은 채 발견된다. 이 죽음을 계기로 로키어-폭스 가문의 어두운 가족사와 감춰왔던 비밀이 차례로 드러난다. 한편 폭스 이블이라는 사내가 이끄는 부랑자 한 무리가 마을 빈터를 무단으로 점유,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이 소설은 결국 '사냥감과 사냥꾼'의 이야기이다. 사냥하는 자의 심리, 사냥당하는 자의 심리, 그 주변의 경직/고조된 공기에 저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사람들. 인물들끼리 주고받는 대화가 썩 멋지고 플롯과 캐릭터의 묘사는 치밀하고 설득력 있다. 독자를 서서히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구성도 일품. 어느 출판사에서 '골든대거 상'(영국 추리작가협회 상) 시리즈를 계속 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문학담당 박하영(zooey@aladin.co.kr)
"인용으로 감상을 대신하렵니다"
정말 나는 몰랐으니까. 남자란 존재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도. 연인과 함께 지내는 밤의 달콤한 친밀감이 아니라, 그저 함께 자는 남자의 팔이 얼마나 편안한 것인지. 남자의 단순함, 남자의 복잡함, 남자의 관용, 남자의 안심.
...색깔 있는 세계란 아마도 의존과 관계가 있으리라. 어른만이 할 수 있는 의존도 있다는 것을, 남편을 만나고서야 처음 알았다. --본문 55~57쪽
집안에 있어도 비슷하다. 우리는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다. 남편은 텔레비전을, 나는 남편의 머리를, 남편은 현재를, 나는 미래를, 남편은 하늘을, 나는 컵을.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그야 물론 때로는 답답해서 전부 같으면 좋을텐데 하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마음속 가장 깨끗한 장소에서는 그런 바람이 일시적인 변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오늘도 우리는 같은 장소에서 전혀 다른 풍경을 보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다른 풍경이기에 멋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났을 때, 서로가 지니고 있는 다른 풍경에 끌리는 것이다. 그때까지 혼자서 쌓아올린 풍경에. --본문 61쪽
예를 들어 함께 살기 전에는, 남편이 만나러 와주면 무척 기뻤다. 만나러 온다는 것은 나를 보고 싶어한다는 뜻이었으므로. 그런데 막상 함께 살기 시작하니 남편이 매일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보고 싶지 않아도 돌아온다. 그게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어리석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도무지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보고 싶었어?"
회사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그렇게 물으면 응, 하고 고개는 끄덕이는데,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것 같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신혼이라지만 그런 질문을 매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만사가 그 모양이라 그 한 해는 정말 진이 빠졌다. --본문 94쪽
인문.예술담당 이예린(yerin@aladin.co.kr)
"무제(10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힘든 하루를 마치고 퇴근길 인천행 지하철에 오르면서, 아 스무 살에 회사 다니는 것도 이렇게 빡빡한데 나이 마흔 먹어 다니기는 얼마나 힘들까 라는 생각이 들 때. 또 하나는 지하철에 힘들게 타고 내리시는 어르신을 뵐 때.
은퇴를 생각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느냐는 소리를 들을지 모르지만 '은퇴 이후의 삶'에 주목하는 이유는 역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생의 결론을 미리 생각한 사람이 중간부분인 지금을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와, 또 하나는 노년이라는 것은 힘들게 달려온 인생의 보답이라는 생각 때문에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에게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서 상기시켜 준 좋은 기회였다. 사오십년이 흐른 후 인생을 되돌아보며 '참, 열심히 살았다. 훌륭한, 성공한 인생이었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과연 누구 말이 맞는가. 이 책처럼 두리뭉실하게 목표 없이 사는 사람이 더 성공하는가? 아니면 숱한 자기계발서처럼 목표를 위해 치밀하게 달려가는 사람이 더 성공할 확률이 높은가? 결론이 난 건 아니지만 확실한 건 하나다. 두리뭉실하든 치밀하든 결론만이 아니라 중간의 과정을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성공에 골인할 확률이 높다는 점. 야심만만처럼 '성공한 사람 100인에게 물었습니다'라는 독특한 구성을 가지고 있는 자기계발서. 따라하지 않을 사람이라도 보면 재미있다.
경제.컴퓨터담당 윤성화(rain@aladin.co.kr)
"가을이라면 여행, 젊은이라면 도쿄"
뽈랄라 아저씨랑 두건사나이 이우일씨가 손을 잡고 도쿄로 떠났다. 이 둘이 탐방할 곳은 눈에 훤하다. 보나마나 장난감 가게겠지. '보나마나' 장난감 가게다. 그것도 온갖 장난감 가게는 다 등장한다. 숍 형태의 가게부터 천엔샵, 프리마켓의 장난감 가게까지. 언제나 그렇듯 두 분 모두 이러쿵저러쿵 불평불만도 많으시고, 가끔 기분좋게 아부도 해주신다. 장난감에 별반 관심없는 나조차 오색찬란한 사진 앞에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들여다보느라 눈이 아플 지경. "저건 뭐지, 마징가 아니야!" "오오, 건담이다!"
술이 빠지면 또 섭하지. 편의점 맥주부터 시작, 도쿄 모퉁이 할머니의 술집까지 어쩌면 그렇게 기가 막히게도 찾아내는지 원. <어시장 삼대째> 만화에 나온 전설의 '시샤모'(은어구이와 맛이 비슷하다고 함, 포장마차에서 구워 통째로 안주삼아 먹는다고)구이 사진을 보는 순간, 침이 꼴깍 넘어갔다.
절대로 말해두는데, 이 책은 일반적인 도쿄여행기는 아니다. 이 두 분께 여행사 코스에 나온 '도깨비 무박 2일 여행'이나, '하코다 4박 5일'같은 정직하고 착한 코스를 기대하신 분들은 없으리라 믿지만 말이다. 술, 만화, 장난감, 마구잡이 여행, 이우일, 현태준, 뜬금없는 칭찬과 불평. 이 중 한 가지라도 마음에 드신다면 이 책을 잡으시라.
외국어.실용담당 김세진(sarah2002@aladin.co.kr)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재미있게 놀 것을 권함"
현재는 항상 미래의 담보물입니다. 초등학교 때는 중학교를, 중학교 때는 고등학교를, 고등학교 때는 대학교를, 대학교 때는 취직을, 미혼일 때는 결혼을, 젊었을 때는 노후를 말이죠. 하지만, 가끔은 걸음을 멈추고 '지금 나는 행복한가? 너무 바쁘지 않은가? 나의 다른 부분을 너무 심심하게 방치해두지 않았는가?'를 생각할 필요도 있습니다. <조약돌과 휘파람 노래>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은 항상 준비해야 할 미래가 '삶'의 한 부분이지만, 언젠가는 내 인생도 -별탈없이 흘러가기만 한다면- 겨울을 맞이할 겁니다. 그때 정말 필요한 것은 '현재의 행복'과 '과거의 추억'이 아닐까 합니다. 보잘 것 없는 조약돌과 바람이 가르쳐 준 춤과 노래가 들쥐 가족의 겨울을 행복하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쉽게, 미래에게 현재의 주도권을 넘겨줘서는 안되죠. 마스터 키튼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인생을 허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에일린 스피넬리는 책의 내용을 몇번씩 반추하게 하는 매력을 갖춘 작가입니다. 그녀의 또다른 그림책 <소피의 달빛 담요>도 강추!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은 삶의 애잔함과 고단함, 그 속에서 건져낼 수 있는 작은 아름다움을 영롱하게 그려내지요. 소리없이 눈물이 흐르지만 입가에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그런 느낌입니다. 남편 제리 스피넬리도 <스타 걸>과 <난 열 살이 되고 싶지 않아>로 예술성과 대중성을 골고루 갖춘 동화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정말 '부부만세'라고 할까요?
어린이담당 류화선(yukineco@aladin.co.kr)
"당신은 평생을 걸 수 있는 열정이 있는가"
사실대로 말하면 이 책의 초반부는 무척이나 지루하다. 100 페이지를 넘기기가 쉽지 않아 몇번이고 책을 다시 꺼내 처음부터 읽어야 했다. 하지만 거기만 지나고 나면 20대 초반의 패기만만한 네 친구의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책은 추리의 탈을 쓰고는 있지만 이야기 전체를 아우르는 단어는 '열정'과 '우정' 이 아닌가 싶다. 등장인물 모두 놀라울 정도의 집중과 열정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믿음과 틀에 도전하며 희망과 미래를 향해 달려간다.
책을 읽으면서 대학교 때의 내 모습을 많이 돌아보았다. 그때 나에게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앞으로의 인생, 지금의 삶에 대해 열정이 있었고 꿈이 있었다. 평생을 걸 수 있는 무엇이 있을 거라고 매일 밤을 마음 맞는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호기있게 외쳐대곤 했었다. 잊지는 않았지만 잠시 제쳐두었던 스무 살의 내 모습을 책을 덮으며 겹쳐보았다. 늦지 않게 다시 앞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책.
친구들에게 한 권씩 선물로 보낼 생각이다. 야, 그때 우리가 했던 말 아직 기억하지? 우리, 한 번 다시 뭉쳐볼까.
음반.DVD담당 서현(mirinae@aladin.co.kr)
"어려운 책이 많아서 재미있는 세상"
<벌거벗은 여자>, <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완역본 Vol. 1> 등 한번씩 짚고 넘어가주어야 할 좋은 대중과학서가 많이 나온 9월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일이라면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를 완역하리라는 집념을 가진 출판사 승산의 그간의 노력이 이처럼 결실을 맺는 걸 본 일이다. 내로라하는 과학책 번역가들이 여럿 달라붙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책이 완성되어 가고 있는데, 과연 의미있는 일이 되려면 널리 읽히는 수밖에 없겠도다.
<기계 속의 생명>은 도저히 일반대중을 위한 책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원제는 <The Garden in the Machine>이고 인공생명(Artificail Life)의 연구현황과 제문제를 다룬 책이다. "어려워 어려워"하면서 읽었고 읽고나서도 제대로 이해한 건 별로 없다. 그래도 자꾸 흥미가 가는 건 인공생명을 통해서 생명의 개념을 새로 정립하고 생물학의 영역도 재정의하게 되리라는 전망이 벌써 이처럼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기 때문이다. 미래에,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의 단어가 될까? 지금처럼 여전히, 유한해서 아름다운 것으로 이해될까?
편집장 김명남(starla@ala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