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마크 투웨인은 `죽음은 훌륭한 평등주의자`라는 말을 남긴바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민주주의자는 아닐 것이며, 또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죽음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죽음은 실로 우리 각자의 삶만큼이나 독창적일 수 있으며, 각자의 성격과 문화적 배경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실현된다.
`생각보다`라는 첫마디 뒤에 붙이는 말에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이 말은 생각보다 위험하다. 나는 `생각보다` 뒤에 따라오는 말에는 대부분 발끈하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짦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가끔 생각한다. 행복이라는 건 어떤 특수한 종류의 프리즘이 아닐까 하고. 이 투명한 물체는 분명 내 손 안에 있는데도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면 도통 보이지 않는다. 유리알처럼 말갛고 물처럼 속이 훤히 비쳐서 마치 없는 듯 감쪽같기만 하다. 왜 아무것도 없지? 왜 내 손은 비어 있지?불안한 마음에 남의 손 안을 엿보면 전혀 다르다. 남의 손에 있는 프리즘은 어찌나 찬란하게 무지갯빛을 뿜는지 부럽고 샘나고 질투가 솟는다. 내 손은 텅 빈 듯이 보이는데 남들은 모두 무지개를 쥐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프리즘을 갖고 있으면서도 제 것은 보지 못하고 남의 것만 부러워하는 것, 그게 행복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아닐까.
꾸뻬는 시체 해부 장면을 여러 차례 봤는데, 그것 역시 죽음에 대해 사색하게 만들었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인간은 단지 물렁물렁하고 부서지기 쉬운 기관들의 덩어리에 불과했다. 영혼이 빠져 나가는 순간, 그 덩어리들은 한 순간에 생명력을 잃고 부패하기 시작한다. 그것에는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다. 죽음은 매우 찰라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고통의 순간도 길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