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지음, 손성현 옮김, 김진혁 / 포이에마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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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유신론자인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작중 인물인 무신론자 이반을 완전히 극복한 것인지 잘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반이 쓴 소설 속 소설 「대심문관의 전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도전한다. 이는 자유와 빵의 문제로 주제화되는데,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본질적으로 긴요한 건 빵의 문제이지 자유의지에 관한 감당할 수 없는 선택적 문제가 아니라는 걸 무신론자 이반은 짧은 액자소설을 통해 강하게 웅변한다.

 

「대심문관의 전설」편이 기독교에 대한 역설적인 패러디라는 세간의 일반된 평가를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수용하고 이해함에 있어 내 속에서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찝찝함이 남아있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옹호하는 입장과 비판하는 입장 모두 도스토옙스키를 애정 있게 차용하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톨스토이보다 정통 기독교 교리(및 신학)에 더 가깝게 읽히기 때문에 목회자와 신학생 사이에서 탐독이 권장되는 작가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서 더 찬양받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니체, 마르크스와 함께 기독교를 가장 고약하게 기각하려고 한 프로이트는 도스토옙스키를 셰익스피어에 견주면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지금까지 쓰인 가장 장엄한 소설이고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세계 문학사의 압권이다"라는 아이로니컬한 찬사를 남겼다. 기독교를 허구와 망상으로 조롱한 프로이트가 도스토옙스키를 찬양했다는 점은 나에게 아이러니다. 사르트르의 선언 이후 독자의 해석권이 작가의 창작권을 압도하는 세계가 되었지만 작품의 핵심에 관한 이 다양한 해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처하기만 했다.

 

현대 신학자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의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은 앞서 말한 나의 고민을 충족시키기 충분한 책이다. '칼 바르트의 『로마서』가 쓰이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작품'이라는 소개가 눈에 띄었다. 그전까지 저자를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그 강렬한 소개 문구에 혹했고 더불어 출판사 '포이에마'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또한 평소에 좋아하고 신뢰하는 석영중 교수의 추천사도 한몫했다. 나는 오랜 기간 동안 석 교수의 여러 저작과 강의를 통해 러시아 문학의 조예를 넓히고 강한 도전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책의 두께는 상당히 얇다. 순수 분량만 따지면 한두 시간이면 읽을 수 있을 듯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완독하는데 무려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기본적으로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들을 사전에 읽어두어야 진도가 나갈 수밖에 없고 저자의 문체가 문학과 신학을 동시에 담아내는 독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대한 유려한 주석으로 읽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장 은혜로운 기독교 철학 에세이로 읽히기도 한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주옥같고 아름답다. 명언의 나열이며 아포리즘의 향연이다. 이런 책을 이제서야 만났다는 게 부끄러울 정도다.

 

저자는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들, 가령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을 수시로 인용하며 자신의 신학론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말년의 역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다'라는 웅대한 주제를 관통하는 작품이라고 해설한다. 저자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소설 속 소설 「대심문관의 전설」에 대한 주석이라 할 수 있는 「이반 카라마조프, 대심문관, 그리고 악마」라는 편을 아예 별도의 장으로 꺼내 32페이지에 걸쳐 구체적으로 해설한다.

 

나는 기존까지 「대심문관의 전설」을 '기독교 제도권 내의 오류와 모순을 은유한 작품'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즉 이반을 발칙한 무신론자로 인정한 뒤에 그가 쓴 패러디 안에서 기독교의 허실이 무엇인가를 탐색했다. 소설 속에서 이반이 상징하는 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명확히 해설한다. 이반은 하나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음이다. 그 어떤 인생도 피해 갈 수 없는 절박한 질문, 즉 하나님에 관한 질문을 애써 외면함이다. 바로 이것이 악마의 장난이요, 인생을 지옥으로 만드는 힘이다." 그리고 저자는 정리한다. 자기의 인생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부정하며 스스로를 속이는 인생이 곧 지옥이라는 것을.

 

「대심문관의 전설」에서 이반은 자신의 모든 지식과 사상을 총망라하여 기존 종교와 교회를 겨냥한 가장 무시무시한 공격을 감행한다. 문제는 하나님이란 존재를 신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현실 속으로 구속시키려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반이 단순한 무신론자가 아님에 주목한다. 소설 속에서 이반은 절대악을 대표한다. 이반은 『죄와 벌』의 스비드리가일로프, 『악령』의 스타보르긴과 키릴로프, 『백치』의 로고진과 같이 지옥을 은유하는 인물이되 이들의 정신 파괴와 자기모순을 대표하고 집대성하는 악의 화신이다. 이에 배치되는 인물로 동생 알료사가 있지만 그는 이반의 도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거나 반발하지 않는다. 도스토옙스키가 소설의 2부를 알료사의 이야기로 채우려 했다는 건 이 공백의 의미를 독자에게 이해시켜준다. 요컨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미완이기에 여러 다양한 해설(결론)이 난무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완벽한' 작품이 되었을지 모른다.

 

사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 잘 읽히지 않는다. 전지적 작가의 완벽한 묘사로 독자를 자신의 작품 속으로 자상하게 끌어들이는 톨스토이와는 달리 등장인물 간의 장황한 대화에 거의 대부분의 묘사를 할애하는 도스토옙스키 식의 소설 전개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3년 전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을 때도 그러했는데 무언가 교정이 되지 않는 문장, 인물의 과한 표현과 언행, 어색한 상황 설정 등에 '이거 대문호가 쓴 위대한 역작이 맞아?'라고 의문을 가졌던 기억을 떠올린다. 저자는 나의 이러한 감상을 알기라도 하는 듯 "그의 소설이 터무니없다 싶을 정도로 무질서한데도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그의 소설이 표방하는 과격한 부정(否定)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부정에서 나온 훨씬 위대한 긍정 때문이다."라고 강변한다. 계속된 서술에서 저자는 도스토옙스키의 월등한 인간 존재에 대한 치열한 질문을 소개하고 해설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어떤 관점으로 읽어야 하는지 도전받은 건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톨스토이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조만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시 읽을 것이다. 3년 전 허리 수술을 앞두고 병상에 누워 인간에 대한 환멸과 삶의 녹록함에 지쳐있을 때 읽었던 소설이다. 감정을 절제하고 객관적으로 읽기 어려운 시기였다. 차분히 다시 읽어보려 한다. 이 고된 도전의 동기로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이라는 보물 같은 책이 존재한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는 기독교인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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