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로의 길 - 유럽의 교훈 석학인문강좌 69
박지향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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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명예혁명(1688), 미국의 독립혁명(1776). 프랑스의 프랑스혁명(1789). 우리는 이 세 혁명을 '세계 3대 시민혁명'이라고 부른다. 영국의 혁명은 의회를 중심으로 왕권을 제한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으며, 프랑스는 절대왕정을 타도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봉건적 체제와 중세적 관념을 타파하고 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세 혁명은 공통점을 가진다. 

   나는 선술한 3대 시민혁명 중 2개만 긍정한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입헌군주제에 안착해 현재까지 이르게 한 영국의 명예혁명은 말 그대로 '명예로운' 혁명이다. 비록 의회가 주도했지만 영국은 명예혁명 이후 지금까지 큰 정치적 혼란 없이 입헌주의의 전통을 잘 지켜왔다. 미국의 독립혁명은 영국 국왕의 압제에 대한 저항으로 군주, 귀족의 신분과 봉건적 토지 제도의 잔재를 일소하고 3권 분립에 의한 민주적 공화제를 인류 최초로 만들어낸 위대한 혁명이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은 다르다. 혁명의 정의에 가장 근접한, 소위 '혁명의 어머니'로 불리지만 그 전개과정과 이후 프랑스의 역사를 조망하면 종국적으로 실패한 혁명으로 수렴된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평가는 다원적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실패한 혁명이라는 평가가 많아지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대의 다수 역사가들은 한 목소리로 프랑스혁명의 부정성을 논하고 있다. 나도 프랑스혁명이 실패한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이다. 영국과 미국은 올곧은 근대혁명을 통해 근대국가의 체제를 확립하고 시민의 자유와 안정을 꽃피웠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은 요란하고 잔혹하고 참담한 대가를 치뤘지만 끝내 나폴레옹 독재로 귀결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나폴레옹 체제 이후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를 거치면서 유럽의 2등 국가로 전락했다. 결국 1871년 보불전쟁에서 패한 뒤 유럽의 패권을 독일(프러시아)에게 넘겨줬다. 전통적으로 유럽이기를 거부해온 영국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여기서 프랑스혁명에 관한 부정적 입장을 구체적으로 공유할 생각은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근대성(近代性, modernity)'의 원류이다. 근대라는 말이 오늘날 더 이상 호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탈근대를 이야기하는 요즘에 근대는 낡고 식상한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하지만 비판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아는 것은 꼭 필요하다. 인류를 근대의 문으로 연 건 분명 유럽이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유럽의 근대를 논할 때 영국과 프랑스를 양축으로 언급한다. 이는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함께 아우른다는 의미인데 영국과 프랑스가 각 키워드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사실 영국적인 전통과 프랑스적인 특징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예나 지금이나 영국은 유럽으로 불리길 싫어하(했)고 프랑스는 유럽의 맹주이길 갈망한(했)다. 중세 말기의 100년 전쟁 이후 두 나라 사이의 지독한 긴장관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박지향 서울대 교수는 "근대성의 전범이라 할 수 있는 나라는 영국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신간 <근대로의 길>을 통해 근대 세계의 패권을 차지한 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최강국인 영국이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눈부신 성취를 이룰 수 있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핀다.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보장해주고 소유와 권력이 비교적 고르게 분산된 사회가 궁극적으로 성공한 사회"이며, 그런 "자유와 소유와 권력의 분산은 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영국에서 처음으로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2014년 12월 한 달 동안 진행했던 한국연구재단의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를 기반으로 씌어졌다. '근대로의 길, 유럽의 교훈'은 평생 저자의 연구의 핵심주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책 전반에서 저자의 거침없는 서술과 풍성한 자료 제시가 눈에 띈다.

   저자는 국내의 저명한 영국통이다. <영국사>, <제국주의>, <슬픈 아일랜드>,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중간은 없다. 마거릿 대처의 생애와 정치>, <대처 스타일> 등이 그녀의 영국 관련 주요 저서다.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경계와 탈(脫)근대 담론이 일고 있지만 인류가 지독한 중세적 사고에서 벗어난 데에 영국의 힘이 컸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저자는 일평생 영국사를 천착하면서 중요한 원리를 하나 발견했다. 영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자유, 소유, 권력의 분산을 빨리 확립한 원인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개인(個人)'이었다. 프랑스처럼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지만 영국은 광범위한 사회집단을 대변한 의회가 왕권을 제한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의 자유를 확대해갔다. 개인에게 노동과 아이디어의 대가를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영국의 제도적 장치는 기술자에게 동기부여를 했고 산업혁명을 촉발했다. 집단을 극복한 '개인의 발견'이 영국이 이끈 근대성의 초석이었다.

   개인에 관한 철학은 결코 과거완료적 주제가 아니다. '개인'과 '집단'의 대립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소련이 해체되고 동구권이 멸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세계는 집단주의(collectivism)에 신음하고 있다. 내 돈은 우리 돈이 되었고 내 책임은 우리 책임이 되었다. 독립적인 개별 인간에 대한 책임의식이 '공동체'라는 말랑말랑한 용어로 뒤덮여지고 있다. 오랜 유교적 전통으로 인해 공동체의식이 유독 강한 한국사회에서는 개인주의(individualism)를 이기주의(egoism)와 혼동할 정도로 개인에 대한 철학이 빈곤해 있다. 물론 공동체 자체는 좋은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는 모호한 것이다. 불분명한 것이다. 명징하고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건 개인이다. 자유로운 개별 인간(개인)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사회를 구성한다. 즉 시선과 기준은 항시 개인에서 사회로 향하는 것이지 그 역순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이 책은 여러 지적 감흥을 제공한다.

   물론 이 책의 한계가 없지는 않다. 지나치게 전문적인 내용 때문에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강의내용을 정리한 것이라 읽는 내내 공부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곳곳마다 등장하는 수치와 도표도 이를 대변한다. 저자의 욕심이 컷던 듯하다. 조금 더 쉽고 편안한 방식으로 딱딱한 강의를 유연하게 풀어서 기술했다면 책의 존재감은 달라졌을 것이다. 흥미로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많은 독자를 확보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처 스타일>을 위시하여 과거 그의 저작들이 대부분 대중과 호흡해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소중하다. 근대성의 역사적 원류를 살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근대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무엇보다 개인에 관한 탐구가 빈곤해 있는 한국의 현재성을 감안한다면 이 책은 꼭 필요하다. 이런 책이 많이 팔려야 한다. 독자로서 이런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 유독 근현대사와 관련해 지난한 논쟁에 빠져 있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에서 이 책의 존재가치는 매우 높다. 전문적이고 딱딱하지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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